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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다예 Dec 07. 2022

남미에서 생긴 일 18. 끝까지 바람 잘 날 없다(完)

[페루, 리마]

드디어 남미의 마지막 여행지 리마에 도착했다. 페루의 수도인 만큼 그동안 봐왔던 도시들보다 크고 정신없는 느낌에 긴장된 마음을 다잡았다. 리마의 호스트 재키는 바쁜 스케줄 와중에도 틈틈이 시간 날 때마다 이곳저곳을 구경시켜 주었고, 무엇보다 페루의 자랑거리인 식문화를 잔뜩 소개해 주었다. 


페루식 홍합 요리와 츄러스, 그리고 세비체


“나 피스코 사워가 너무너무 좋아!”


유난히 피스코 사워에 푹 빠진 나의 말에 재키는 함박웃음을 짓더니 제안했다. 


“그럼 이따 저녁에 집에서 같이 피스코 사워를 만들까?” 


생각지도 못한 제안에 눈을 휘둥그레 뜨고는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브라질에서 현지 친구들과 카이피리냐를 만들었던 기억을 소중하게 간직한 나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재키 역시 피스코 사워를 직접 만들어본 적은 없었지만, 레시피가 간단해서 별 무리 없을 거라며 집에 오는 길에 레몬만 좀 사다 달라고 부탁했다. 


리마 시내와 미라플로레스 구경


혼자 리마 시내를 돌아다니다가 어둑어둑해질 즈음 재키의 집으로 향했다. 근처 작은 슈퍼마켓에 들러서 레몬을 사려는데 뜻밖의 난관에 부딪혔다. 재키는 분명히 “limon”이 필요하다고 말했는데, 그렇게 적혀 있는 상자에는 초록색 라임만 잔뜩 들어 있었던 것이다. 당황해서 주인아주머니께 손가락으로 라임을 가리키며 “Limon?”하고 묻자 아주머니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상자에서 노란색 레몬을 찾아들자 아주머니는 고개를 가로젓더니 “Lima, lima!”라고 말하며 바로잡아 주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리몬이 레몬이고 리마가 라임일 것 같은데, 일단 재키가 말한 대로 limon이 적힌 상자에서 라임을 몇 개 꺼내 들고 계산했다. 집에 도착해서 재키에게 묻자 그녀는 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리마는 레몬이라고 멀뚱멀뚱 대답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스페인어권 국가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어서, 스페인을 비롯한 어떤 나라들에선 limon이 레몬이고 lima가 라임인데, 다른 나라들에선 그 반대로 부른다고 한다. 이렇게 헷갈릴 수가. 


우리가 만든 피스코 사워!


재키와 함께 만든 피스코 사워는 꿀맛이었다. 집에서 만들어 먹으니 바에서 시키는 것보다 훨씬 저렴하겠다, 우리는 그야말로 무제한 칵테일파티를 벌였다. 술이 떨어질 때마다 바로 만들어 먹으면 그만이었으니. 피스코 사워를 곁들인 수다는 새벽 두 시까지 계속되었다. 나는 이 당시 스페인어를 전혀 하지 못하는 주제에 로컬처럼 말하고 싶은 욕심만 많아서, 우습게도 술만 마시면 대화하다가 “정말?”이라는 단어를 쓸 상황에만 스페인어로 “Si?!”하고 크게 되묻는 버릇이 있었다. 취기가 올라올수록 나의 “Si????”가 점점 커지자 재키는 한참을 웃었다. 빈 잔을 보고 피스코 사워를 더 만들려고 자리에서 일어서다가 휘청거릴 즈음, 우리는 비로소 즐거운 밤을 뒤로하고 잠을 청했다.


재키와 함께 :)


아침에 일어나니 머리가 깨질 듯 아파왔다. 아무리 맛있어도 숙취에서 자유로울 순 없었던 피스코 사워 덕분에. 비몽사몽 술이 덜 깬 상태로 공항에 가기 위해 짐을 급하게 쌌다. 이카에서 산 피스코 네 병이 배낭을 꽉꽉 채운 모습을 다시금 보자 허탈한 웃음만 나왔다. 끙끙대며 짐을 들고 거실로 나오니 나만큼이나 부스스한 상태로 머리를 부여잡은 채 재키가 아침인사를 건넸다.


“다시는 집에서 피스코 사워를 만들어먹지 않을 거야.” 


재키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끔찍하다는 듯 말했다. 동감하며 덩달아 웃는데 또다시 두통이 찾아왔다. 그녀에게 열쇠와 함께 선물과 엽서를 건네고는 술냄새를 폴폴 풍기며 작별인사를 했다. 언젠가 다시 만나 한 번 더 밤새도록 수다를 떨 수 있길 바라며. 


배낭을 한가득 채운 피스코... 그리고 재키에게 준 엽서와 선물


“네? 제 이름이 탑승객 명단에 없다니요?!” 


집에 갈 생각을 하니 싱숭생숭해진 마음으로 도착한 리마 공항. 분명 비행기 타는 일밖에 남지 않았는데, 역시 남미는 날 마지막까지 수월하게 보내주는 법이 없었다. 라탐 항공 카운터에서 나는 항공사 직원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듣고는 황당할 수밖에 없었다. 직원은 쩔쩔매며 비행기를 마이애미 경유 편으로 바꿔주고 사과의 의미로 항공사 크레딧을 주었다. 


비행기 티켓이 있다고 마음대로 집에 갈 수 있는 건 아니란다...^^


약간 늦춰진 비행시간에도 그나마 집에 갈 수 있다는 사실로 위안을 삼고 기다리다가 마침내 탑승을 했는데, 비행기는 한동안 이륙할 생각조차 없는 듯 그대로였다. 앞쪽에서 어떤 여자와 승무원이 실랑이를 하고 있었고, 주변 남미 사람들이 모조리 귀를 쫑긋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지만 나는 도통 무슨 일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급기야는 경찰까지 왔는데, 이쯤 되니 여기저기서 불평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예정 이륙 시간보다 한 시간 반이나 지난 후였다. 


경찰이 비행기에 들어와 상황 조정을 하려는 모습


“저 여자가 비상구 좌석에 앉은 사람이 적합하지 않다고 비행기를 못 띄우게 항의한 모양이야.”


옆에 앉은 남자가 다행히 영어를 할 줄 알아서, 어리둥절해 보이는 내게 넌지시 알려주었다.


“여기는 미국이랑 달라서, 아무리 경찰일지라도 마음대로 승객을 끌어낼 수가 없어.”


그는 짜증 섞인 투로 덧붙였다. 실제로 경찰은 여자와 몇 마디 나누더니 아무 조치도 취하지 못하고 비행기에서 내렸다. 이윽고 비행기 전체가 한 마음 한 뜻으로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나중에 재키에게 영상을 보여주며 물어보니 비행기에서 내리게 하라는 뜻이란다. 철면피로 뻗대던 여자도 대중을 이길 순 없었는지 결국 스스로 일어나 떠났고, 비행기는 환호성과 박수 소리로 가득 찼다. 그렇게 나는 남미 땅을 무사히 떠날 수 있었다. 세계일주를 하면서도 겪어보지 못했던 사건들이 마지막에 우르르 터지는 모습에 가슴을 쓸어내리며 눈을 감았다.


승객들은 일제히 일어나 그녀에게 손가락질하며 복창하기까지 했다


남미, 하루도 방심할 수 없는 곳. 그래서 더더욱 재미있었던 곳.




33일 남미 여행 총정리

2018.12.16 ~ 2019.01.18

비용 176만원 (항공권 80 + 여행경비 96)

방문국가 6개

방문도시 12개

배낭무게 9kg

호스텔 1회

카우치서핑 11회

비행 0회 (인아웃 제외)

버스 11회 (야간버스 6회)

최장이동 17시간 30분 (상파울루 - 포즈 두 이과수 버스)

최단이동 4시간 (아순시온 - 포르모사 버스)

도난 및 사고 0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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