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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 후 와인 한 잔의 효능

가면을 내려놓고 짠짠짠!

by 제이린 Jayleen


퇴근 후 집에 돌아오는 차 안은 때로 적막하다. 마음이 더 깊은 곳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조잘거리는 수다-라디오와 팟캐스트-로 차 안을 가득 채운다.


가슴이 말 못 할 무언가로 이미 꽉 차서 라디오 소리도 비집고 들어갈 수 없는 그런 때엔 세상의 소리를 꺼버린다. 디젤 엔진의 차가 파란 신호를 기다릴 때마다 부르르 떠는 소리가 마음을 안정시킨다.



이런 날이면 으레 베란다에 소중히 모셔놓은 와인이 생각난다.

어제 팬트리에서 온수매트를 꺼내다 바닥에서 와인 선물세트를 발견하고 아이처럼 좋아했다. 지난 주말 친구와 함께 신세를 한탄하며 와인을 두 병 비워서 마실 술이 똑 떨어진 차였다.

그렇게 나의 퇴근길 설레는 한 토막은 와인이 차지하게 되었다.


두꺼운 감색 종이상자를 열고 보니 같은 이름을 달고 화이트 와인과 레드 와인이 한 쌍으로 들어 있었다.

캬, 누가 줬는지 너무 좋은 선물이네.


팬트리 바닥에서 최소한 6개월 이상을 있으며 한여름까지 보낸 와인이 괜찮을까 가슴 졸이며 와인잔에 조심히 첫 잔을 따른다.


퐁퐁퐁 호선을 그리며 채워지는 노란 빛줄기.

햇빛이 전혀 없는 팬트리에 있어서 그런지 다행히 와인 맛에 이상이 없다.

여름을 잘 견뎌준 와인이 기특하기까지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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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잔 바닥에서 겨우 손톱만큼씩만 따라서 마시는데도 두 잔 정도면 눈꺼풀에 추를 단 듯 눈뜨는 속도가 느려진다. 고개를 움직일 때마다 머릿속에 차 있는 와인이 위아래로 찰랑거리는 느낌이다. 무겁게 기울어지는 와인잔.



'지난 주말, 그 사람이 악의가 없는 걸 알면서 나는 왜 그렇게 뾰족한 말을 했을까'

아직도 자라려면 한참 먼 내 인성에 실망했던 그 비참한 기분도 잊고,


결재문 기안에는 왜 어이 없는 오타와 실수가 한 개씩 꼭 들어가는지,

직장생활 10년이 넘어도 아직도 완벽함과는 거리가 먼 내 실력도 잊고,


역할에 충실했던 내 가면을 잠시 벗고 나로서 존재해 본다.






퇴근하면 습관처럼 켜두는 주방 간접등을 응시하며 취한 것 같기도, 깬 것 같기도 한 경계선의 그 상태에 머물러 본다. 싱크대와 인덕션이 만나는 구석에 자리한 그 등은 달처럼 밝고 둥글다.


나도 누군가가 어둠 속에 갇혀 있을 때, 저 등처럼 가만히 빛내며 있어주면 좋을 텐데.

도와준답시고 가벼운 입으로 해결책을 내놓고 그의 삶을 재단하며 내 경험을 나눈답시고 내 비극을 장황하게 늘어놓는 식의 경솔한 헛소리 말고,


그냥 내가 너 옆에 있다는 걸, 너를 응원하는 내가 묵묵히 기도하고 있다는 걸 속삭여주면 좋을 텐데.


내 위대한 에고는 때로 주방 구석의 간접등이 아니라 거실 한가운데 LED 천장등이 되고 싶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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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자기 전 적는 하루일과 메모장에 오늘부터 ‘오늘 하루 좋았던 점(감사)’과 ‘오늘 하루 아쉬운 점(반성)‘을 추가했다.


좋았던 점은 월요일임에도 업무에 깊이 몰입해서 많은 일을 한 것.

아쉬운 점은 아무리 골똘히 고민해 봐도 생각이 안 난다.

오늘, 진짜 좋은 하루였잖아?


마음에 거리끼는 민폐가 없고, 내가 누군가에게 해가 되지 않은 날.
누구도 미워하지 않고, 내 이득을 위해 비굴해지지 않은 날.
가면을 쓰고 역할극을 하면서도 진짜 나답게 산 날.



가끔 선물 같은 그런 날이 오늘이었으니까 머릿속 와인이 찰랑거려도

한 잔을 더 마셔야겠다.

내일 저녁에도 알량한 내 영혼에게 축하주를 건넬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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