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앞엔 어떤 상처도 힘이 없다
나보다 열 살 남짓 많은 그녀는 군더더기가 없는 사람이었다. 느끼는 만큼만 표현하고, 자기의 이득을 위해 말을 보태거나 뺄 줄 몰랐다. 그 정직한 성격대로 업무도 깔끔하게 처리해서 그녀는 여러 모로 신뢰가 갔다.
빈틈이 없는 만큼 다가가기도 쉽지 않았던 그녀에게 갑자기 병마가 찾아와 암 투병을 한 지 2년이 되어 간다. 휴직을 쓰고 항암과 통원치료를 하는 그녀를 두 달 전쯤 우연히 기회가 되어 볼 일이 있었는데, 그녀는 적당히 바람을 넣은 풍선처럼 얼굴과 몸이 부어 있고 뭉텅뭉텅 머리가 빠져 모자를 쓰고 있었다. 특유의 강단 있는 목소리는 그대로였는데, 눈빛이 이전만큼 매섭지 않아 달라진 그녀의 건강을 실감했다.
나를 보자마자 ‘너는 아직도 젊다’며 반색을 했다. 그러다 오랜 기간 나와 같은 사무실에 있었는데도 친해지지 못했던 데는 나의 부족한 사회성이 한몫했음을 짚고 넘어가는 그녀의 강단에 다행이다 싶었다.
아직 내가 알고 있던 그녀가 그 안에 살아남아 있었다.
어제 정말 오랜만에 본 클래식 공연을 아침에 떠올리며 그녀에게 내가 좋아하는 ’Rachmaninoff Piano Concerto No.3’ 2악장 유튜브 영상 링크를 보냈다. 마냥 서정적인 2악장이 아니라 휘몰아치며 잔잔해지는 그 격동을 담은 이 곡에서 나는 늘 ’ 괜찮아. 네가 괜찮다고 하면 괜찮아져. 이렇게 힘내보자 ‘라는 응원의 소리를 듣기 때문이다. 그녀에게도 힘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오늘 메시지를 보냈는데, 저녁에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마주하게 되었다.
그녀가 지난주 길어야 반년의 시한부 판정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한 걸음 떼기조차 어려울 만큼 찾아온 극도의 두통 때문에 찾아간 주치의는 머리에도 방사선을 쐬는 치료를 받을 것을 권하며 치매의 위험에 대해 경고했다. 치매라는 단어에 겁먹고 다른 치료는 없는지 묻는 그녀에게 주치의는 ‘이 치료 안 받으면 죽어요 ‘라고 매몰차게 단정 지었단다. 다른 희망은 없을지 어렵게 다른 병원을 찾아갔지만, 다른 의사는 '너무 늦었다’면서 오히려 앞으로 3~6개월 남아 보인다고 판정을 내린 것이다.
도대체 무엇이 늦었다는 걸까. 병이 발견된 이후 꾸준히 치료를 받고 병원에서 하라는 대로 착실히 치료를 받았는데. 무언가를 늦어버리게 만든 주치의도 원망스럽고, 아무것도 모르면서 시한부 판정을 내려버린 그 의사도 무책임하게 느껴진다.
그녀는 이제 모든 것을 수용하고 체념한 사람처럼 어떤 의지와 희망도 보이지 않는 상태에 있다고 한다. 며칠 전 오랜만에 내가 보낸 카톡에 아직 그녀의 답장이 없다.
이 세상에서 영원히 내가 사라질 거라는 느낌.
사랑하는 가족과 지인들을 남겨두고 떠나야 한다는 것.
무엇보다 아직 커가고 있는 자식들을 끝까지 책임지지 못하고 장성해져 가는 모습을 보지 못한다는 것.
더 많이 웃고 행복할 수 있는 인생의 가능성의 문이 모두 닫히는 그 마음이 얼마나 무너질까.
몇 년 만에 한 번씩 잠깐 보았던 이모의 죽음보다, 10년의 직장생활 동안 늘 가까이 있었던 그녀의 비보가 더 가슴에 사무친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은 우리 안의 시간을 다른 방향으로 흐르게 만든다'던데, 그녀의 투병이 막다른 골목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이후 무한하게만 느껴졌던 내 시간의 유한성이 피부로 와닿는다.
그녀에게만 이런 불행이 오리란 법이 없다. 무한대로 느껴지는 내 시간도 얼마 남았을지는 장담할 수 없다.
수시로 흐르듯 써버리는 이 시간이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인가.
초침의 소리를 들을 때마다 그녀 가슴이 얼마나 따끔거릴지가 상상되어 코끝이 찡하다.
죽음이 오히려 삶의 의미를 선명하게 만든다던데, 그 선명성은 남아 있는 자들이 어렴풋이 회복하게 되는 삶의 가치보다 훨씬 깊은 의미다. 당사자가 인생의 다른 의미를 알게 되는 것은 이별만 남아 있는 그 삶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정리의 단계로 넘어가야만 가능한 일이다.
치매가 두려워 뇌치료를 받지 않으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고,
뇌까지 치료를 받는다 해도 길어야 6개월의 시한부를 받은 지금
그녀는 어떤 선택을 향해 가고 있을까.
투병 중에 받는 연락이 혹여 짐처럼 느껴질까 싶어 연락을 저어했던 그때, 물어오는 안부가 큰 힘이 된다며 언제든 연락하라고 했던 그녀.
며칠 전 보낸 카톡에도 아직 답장이 없는 걸 보면 육신과 마음의 깊은 고통의 터널 속을 지나고 있는 듯하다. 이럴 때 누군가 '아직 당신을 위해 기도하고 있는 이가 있다'는 걸 넌지시 알려주면 힘이 되지 않을까.
아니다, 죽음을 앞둔 이에게는 똑같이 시한부를 겪어본 이가 아니라면 그 어떤 위로도 젠체와 오만처럼 느껴질 수 있으리라 싶어 핸드폰을 들었다 놓았다를 반복한다.
할 수 있는 일은 간절히 그녀의 평안을 기원하는 일밖에 도리가 없다. 마음속으로 그녀의 모든 고통이 잠재워지고, 그녀가 얼마나 많은 사랑 가운데 머물고 있는지를 깨닫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본다.
오늘 하루가 얼마나 그녀에게 소중할까를 되짚어보며 나에게는 건강이 허락되어 있음을 감사하는 마음을 순간 발견하고 화들짝 놀란다. 누군가의 불행이 내 삶의 희망의 연료가 되는 것은 치사한 일이다.
누구에게도 다 터놓고 말하지 못하고 가슴에 켜켜이 묻은 내 상처도 그녀가 앞둔 죽음 앞에선 아무 힘을 못 쓴다. 힘들었다고, 지금은 이겨냈노라고 응석과 자부심을 드러낼 생각조차 할 수 없다.
어쩔 수 없는 이 치졸한 마음을 그녀에게 속삭임으로 사과하고, 자꾸만 떠오르는 내 삶에 대한 긍정성을 의식적으로 눌러본다.
계획대로 살아지지 않는다는 게 인생의 묘미이지만, 행운보다 불행이 더 많게 느껴지는 것은 기쁨보다 슬픔이 더 크게 다가와서일까.
지금까지 큰 불행을 마주했으니, 예상 못했던 행운이 남은 그녀의 인생에 선물처럼 내려오길 간절히 바라본다.
단풍이 모두 져서 나무도 헐벗고 낙엽도 사라진 겨울의 시작이지만 그녀의 마음이 가을에 머물렀으면 좋겠다. 한기가 서리기 전 결실을 맺는 그 계절에 그녀의 시선이 가 있으면 좋겠다.
내년 크리스마스에 그녀가 좋아할 디저트를 예쁜 포장지에 담아 선물할 수 있기를.
사랑하는 이의 죽음 앞에서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삶의 유한성을 직면하게 되나요?
지금, 당신에게 주어진 '건강한 하루'를 어떻게 기억하고 싶으신가요?
고통 속에서 홀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을 그녀에게 마음으로라도 함께 응원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Yunchan Lim 임윤찬 – RACHMANINOV Piano Concerto No. 3 in D Minor, op. 30>
https://youtu.be/GvKQKnIVy1I?si=RTFTMviAOrDgnzW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