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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행복을 찾은 것처럼

To find happiness the same way I did

by 제이린 Jayleen


시간이 많다는 건 축복인 동시에 불행이다.

칼퇴라도 하고 오는 날엔 저녁밥을 챙겨 먹고도

8시부터 딱히 할 일이 없다.

이혼소송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무언가에 몰입하기가 어려워진 나는 종종 그 시간을 멍하니 보내곤 했는데,

그럴 때면 과거의 여러 장면을 오가며 미래의 희뿌연한 그림자를 무의식이 그려내는 것만 같았다.


내가 얼마나 귀한 사람이고, 또 소중한 시간인데 잡친 기분으로 보낼 순 없지.


조금이라도 기분이 낙하되는 게 감지되면 지체 없이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밖으로 나가 짧게는 30분, 길게는 2시간도 걸었다.

걷는 동안 마음이 정돈되고 체력은 덤으로 따라왔다.


넘치는 시간을 의미 없게 보내기 싫어 바쁜 회사일이

어느 정도 갈무리 되는 9월 말,

나는 친한 동생과 함께 교토 여행을 짧게 떠났다.

길모퉁이마다 고즈넉한 사찰이 자리한 도시, 교토.

음식점 정원에도 작고 단정한 멋이 깃든 일본의 풍경 속을 걸었다.



주변의 풍광을 오래 감상하며 걷도록 설계된 사찰을 따라, 다가오는 가을을 한껏 누렸다.





은각사를 거의 둘러보고 나올 때쯤, 은각사를 방문한 사람들이 각자의 염원을 담아 적어 놓은 손바닥만 한 나무판을 발견했다.


에마(絵馬)’라고 부르는 이 나무판은,

옛날에는 신에게 말을 바치던 풍습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지금은 말이 그려진 나무판에 각자 소망을 적어 일본 신사나 절에 걸어둔다.


그런데 안에 적힌 말을 읽어 보니 우리 사는 모습, 크게 다르지 않다.

자신과 사랑하는 사람들, 가족들의 건강과 행복을 각자 자신만의 언어로 적어 놓았다.





그중에 내 눈길을 사로잡는 한 에마에는 이런 내용이 적혀 있었다.


“Wishing my future children and grand children to find happiness the same way I did.”
내가 그랬던 것처럼, 미래의 내 자녀와 손자들이 행복에 이르는 길을 찾게 되기를.




행복의 길을 한 번이라도 걸어본 사람만이 남길 수 있는 문장 같았다.


나도 언젠가 저런 문구를 쓸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행복이 멀리 있지 않음을 아는 사람.

매일의 일상에서 자족함을 누리고,

불행한 순간이 와도 그와 손잡고 담담히 걸어갈 수 있는 사람.


그런 지혜와 여유를 품은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었다.

로버트를 만나 와인 한 잔 기울이며 웃고 싶은,

그런 교토의 늦여름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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