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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혜 Jul 30. 2022

번외 #1. 천천히 무르익다

괜찮지 않을 용기가 있나요?

나라는 존재가 원래 없었던 것처럼 사라지고 싶은 날이 있다.

그 누구의 슬픔도 상실도 되지 않고, 원래 이 세상에 없었던 것처럼 말끔하게 사라지고 싶은 기분.


책임감과 죄책감 때문에 도망치지 못하는 지금 이 현실에서 벗어나

태초에 하늘과 땅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그냥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고 싶은 마음.


이러한 생각은 내 힘으로 더 나은 상황을 만들 수 없을 때, 나의 감정과 생각 따위는 무시하고 땅 깊숙이 묻어버려야 할 때, 스스로 위로하고 칭찬하는 것조차 가식적으로 느껴져 버거울 때 드는 감정이다.




우리는 '괜찮지 않다'라는 말에 알레르기가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

힘들어도 괜찮은 척, 싫어도 좋은 척, 울고 싶어도 태연한 척.

척을 많이 할수록 우리는 스스로 어른이 되었다 믿으며 애써 뿌듯해한다.

나 자신이 어두컴컴한 심해 속으로 떨어지고 있는 것도 모르고 말이다.


슬픔을 들킬까 화를 내고, 외로움을 들킬까 더 냉소적으로 변하는 나는, 시시때때로 무너져버렸다.

타인은 지옥이라는 여느 말에 확신을 가지다가도,

심해 속에 웅크려있는 나를 찾아와 내 손을 잡고 해변으로 이끄는 타인에게 나는 또 위로받는다.




사람들 속에서 절망하고 상처받을수록 '나는 저런 사람이 되지 말아야지'라는 강박이 생겨,

해가 바뀔수록 더 가혹하게 나 자신의 행동과 말을 검열하게 된다.

그 와중에 내 자존감 또한 지켜야 하는 나는 가끔 아이러니를 느낀다.


내 가치관과 자존감을 지키면서도 상대를 존중하면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야 하는 알 수 없는 경계선은

내게 외줄 타기 하는 곡예처럼 느껴지지만 합리적인 어른이 되고 싶은 나는 포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느 순간 타인의 무례함으로 인해 외줄 타기를 하다 삐끗해서 바닥으로 나뒹굴어진 상황이 오면 나는 주저앉아 고민하기 시작한다.


'다시 일어나지 않으면 떨어질 일도 없으니, 그냥 모든 것을 다 포기해버리면 어떨까?

다른 사람이 무례한 만큼 나는 그보다 더 못되게 행동하고, 상처받기 전에 내가 상처를 준다면 편할 텐데 왜 나는 끝없이 타인을 이해하려고 발버둥을 치는 걸까?'


그런 생각에 빠져있다가 나 스스로 부끄럽지 않은 인간이 되고 싶단 생각에 정신을 번쩍 차리기도 한다.




그러다 가장 마음이 평온할 수 있는 방법을 한 가지 찾았다.

단지 나는 오늘을 살려고 한다.


길을 걷다가 산책하는 귀여운 강아지를 보며 잠시 미소를 짓고, 비 온 뒤 나무 내음이 가득한 공기를 들이마시며 잠시 행복을 느낀다. 달달한 젤리 한 알에 입속이 즐겁고, 러닝으로 땀을 흠뻑 흘린 뒤 시원한 물에 샤워를 하는 행복이 모여 내 하루를 의미 있게 만들어준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살고 있다.

그러나 앞으로 애써 괜찮다는 말은 하지 않기로 했다.

충분히 분노하고, 슬퍼하는 동시에 마음껏 즐거워하고 웃겠다.


우리는 괜찮지 않은 것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많이 힘들고, 속상해하고 외로워하자.

괜찮지 않다면, 괜찮다고 말하지 말자.

적어도 내 스스로에게만큼은 솔직하자.


솔직하게 내 감정을 들여다보면, 오히려 신선할 때가 있고 그것만으로 인정받는 기분이 든다.

이렇게 나는 천천히 농도짙게 무르익는 인간이 되어가고 있다.


나는 정말 안 괜찮다.

당신은 괜찮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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