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치심과 모욕감을 수차례 언급한 그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그가 대체 어느 포인트에서 모욕을 느꼈는지 가늠할 수 없었다. 두서없이 목소리만 큰 그는 기세가 등등했다.
“하세요. 다만, 일을 이런 식으로 처리하시는 건 저희 회사를 우습게 보신 거고, 구체적인 이유도 없이 계속 신고하겠다고 하신 건 협박입니다. 또 제가 여자고 사장님보다 어리다고 무시하는 언사 불쾌했고, 소리 지르실 때 두렵기까지 했으니 저도 신고하겠습니다. 다시 생각해봐도 무례한 점 없고, 부당한 강요 전혀 없었으니 전 상관없습니다.”
잊을만하면 터져 나오던 건설회사들의 비리, 대기업들의 갑질의 역사가 쌓은 부정적인 인식은 이 업계에 몸담은 이들에겐 업보가 되었다. 매사에 조심한다. 오히려 이런 민감성을 알고 있는 하청업체들이 역으로 협박해 올 때가 많다. 자신의 실수와 손실을 무마하려 되려 화내는 경우도 있고, 제 뜻대로 되지 않을 땐 언론에 제보하겠다고 협박한다. 많이 들었던 얘긴데 오늘이 내 차례였던가 보다. 겪어보니 생각보다 더 불쾌하다. 내가 지켜온 정의와 양심이 가엽다. 켕기는 게 없으면 문제 될 것도 없지 않냐고? 그렇다. 그렇기에 두렵지는 않다. 그래도 어처구니없는 협박에 내 자존심은 상처를 받는다. 최악의 경우 상대의 무고와 나의 결백을 해명해야 할지도 모르는 처지가 애처롭다. 존중이 만만함으로 돌아오고 신뢰가 칼이 되어 등에 꽂힐 때 인간에 대한 믿음이 사라진다.
감사팀을 운운하면 내가 고분해 질 것이라는 기대가 깨진 것일까. 금방이라도 세게 문을 닫고 나가버릴 것 같던 그가 주춤주춤 다시 자리에 앉았다. 단 일 분도 더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이 맥락 없는 대화에 진을 빼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일은 해야 하니까 꾸역꾸역 화를 삼킨다. 월급 받는 자의 숙명이라 여기고 사과 비슷한 것도 나누며 마무리했다. 모두가 해외여행에 목말라하는 이 시점에 주위의 부러움을 사며 해외 파견을 나온 지 두 달, 대기업 건설회사에 다니는 여자 엔지니어의 운수 사나운 하루는 이렇게 마무리됐다.
대형 프로젝트를 수주했을 때, 수년간의 고생 끝에 큰 교량을 완공했을 때 분명히 보람도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오늘 나의 일은 그저 고단하다. 웃는 얼굴로 마주한 채 방어를 염두에 두고 협업하는 사회에서 우리는 과연 진정한 성취나 보람을 찾을 수 있을까. 그저 모두가 돈의 노예가 되어 돈 때문에 참고 돈 때문에 사나워지고 있는 것 같아 씁쓸하다. 권위를 악용했던 자들의 약점을 이용해 새롭게 악한 권위를 만드는 자들과 섞여 하루하루 해 나가는 밥벌이는 지겹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