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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써머대디 Jun 27. 2023

사랑하려 애쓰기를 멈추고

강아지 한 마리를 잠시 돌보았다. 강아지를 키워 본 적이 없기에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서툴 따름이다. 강아지를 볼보는 게 처음인 건 아이들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아이들은 강아지 때문에 마음이 괴롭거나 걱정이 앞서지 않는다. 나처럼 말이다. 이 집에서 나만큼 강아지를 돌보는 사람은 없다. 아침에 가장 먼저 마당에 나가 어루만진다. 그때그때 똥오줌도 치우고 밥그릇 물그릇도 채운다. 강아지를 위해 울타리도 만든다. 밤에 끙끙 대는 소리에 깨는 사람도 나이고 비 오는 날 강아지가 감기에 걸리지 않을까 염려하는 사람도 나이다. 그런 것도 사랑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은 달리 느낀다. 그것이 사랑이었을까?


한 번도 키워보지 않은 강아지였기 때문에서는 아닌 거 같다. 나는 마당에 꽃 풀을 돌볼 때도 그만큼의 마음을 쏟는다. 봄여름가을이를 돌볼 때도 그만큼, 아니 그 이상의 마음을 쏟는다. 하지만 나는 이 질문 앞에 자유롭지 않다. 그 사랑은 정말 사랑이었을까? 혹은 어떤 종류의 사랑이었던 건 아닐까?


적어도 나는 느낀다. 내가 그 사랑으로 아이들 앞에 설 때 분명 가장 가까웠다가도 어느새 가장 멀어지기도 한다는 것을. 나는 아이들을 가깝게 느낀다. 동시에 아이들과 나 사이에는 도저히 가까워질 도리가 없는 우주 같은 거리를 느끼기도 한다. 꽃풀을 정성을 다해 돌보는 사랑은 꽃풀이 그대로 피고 자라며 꺾이거나 퍼져나가는 것을 지긋이 바라보기만 하는 그 사랑을 당해낼 수가 없다. 그러니 나는 여전히 꽃풀이 가깝고도 우주만큼 멀게 느껴진다. 아이들을 돌보는 사랑은 아이들에게서 흘러나오는 몸짓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그 사랑을 당해낼 수가 없다. 나는 강아지를 정성으로 돌보았지만 강아지와 뒹굴며 노는 저 아이들의 사랑을 당해낼 수가 없다.

그러니 나는 내 사랑으로 사랑하기를 언제쯤 그만두고 내 앞에 놓인 모든 생명들을 흘러가는 강물이나 어디로 와서 가는지 모를 바람처럼 그대로 ‘둘 줄’ 알게 될 것인가. 언제쯤 사랑하려 애쓰기를 멈추고 흐르는 사랑 속에서 자유롭게 춤 출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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