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더너드입니다.
저는 과거에 소프트웨어 개발자로 일해왔고 퇴사후 지금은 키보드 개발을 해오고 있습니다.
처음 코딩을 접하고, 개발자로 일을 시작했을 때 이 일이 천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컴퓨터 공학에 대한 이론부터 AI에 이르기까지 남들보다 빠르게 습득하고 코드를 구현하는데 재미를 느꼈습니다. 아마 논리적으로 빈틈이 없는 블럭을 쌓는 즐거움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당시 해커톤에 나가서 새벽이 오는 줄 모르고 코드를 짜며 보냈던 시간은 제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간 중 하나였습니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네이버에 입사하면서 AI 개발자로 커리어를 시작했습니다. 몇 년간은 출퇴근 시간을 아껴 논문 읽고 퇴근후에는 공부를 하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개발을 시작한지 5년차가 넘어가면서 몸에서 이상증세가 나타나더라구요.
손목과 허리가 아프고 어깨가 매일 뭉쳐있는 느낌이 점점 짧은 주기로 반복되었습니다.
시력이 떨어지면서, 시력교정수술을 했고 손목도 통증이 생겨 수술을 하게 되었습니다.
남들보다 빠른 나이에 결혼을 하게 되고, 결혼하고나선 퇴근 이후에 공부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이맘때쯤 개발자라는 직업이 그렇게 완벽한 직업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습니다.
개발자는 육체를 써서 일하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눈과 손을 써서 일하는 일이었습니다.
쏟아지는 AI 논문들 사이에서 살아남으려면 남들보다 한 자라도 논문을 더 봐야했고, 아픈 손목을 가지고 한 손으로 코딩을 할 수 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허리가 아파서 갔던 정형외과에서는 제게 거북목을 진단해주었습니다.
"자바 스크립트를 모르면 전화주세요" 라고 쓰여있는 치킨집 전단지가 마냥 남일 같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10만원짜리 옷은 안사도, 100만원짜리 의자는 샀습니다. 그렇게 의자부터 책상까지 하나씩 바꿔갔습니다.
허먼밀러 의자, 모션 데스크로 하나씩 제품들이 정착이 되고, 운동을 시작하면서 허리 통증이 많이 줄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키보드는 아무리 바꿔도 불편했습니다. 손목과 어깨 통증을 줄이려고 알아본 괜찮은 키보드들은 모두 해외 제품뿐이었습니다. 그리고 꼭 비싸게 구매한 해외 키보드들은 무언가 하나씩 불편하더군요. 이 때는 몰랐지만, 제가 키보드에 대해서 남들보다 더 예민하고 엄격하더군요. 아마 키보드를 개발하게될 운명이었나 봅니다.
50만원이 넘는 인체공학 키보드를 사용해도 불편했던 이유는 바로 제가 한국인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여기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편에서 키보드 제작기와 함께 자세하게 얘기해보겠습니다.
불편함에 고쳐쓰기를 반복했습니다.
50만원짜리 직구 키보드를 열어보고, 기판을 새로 디자인해보고, 펌웨어를 입혀보고, 3D 프린팅을 해서 바꿔보고. 이런 작업들을 여러 번 하다보니 내린 결론이 한 가지 있습니다.
이럴 바에야 처음부터 만드는 게 낫겠다.
만약 아래 통증을 겪고 있다면, 아마 키보드 때문일 확률이 매우 높습니다.
첫 번째. 손목통증
일자형 키보드를 사용하다보면 손목이 자연스레 꺾이게 됩니다.
키보드의 자판은 일직선인데 반해 손목은 대각선으로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손목이 꺾인 상태로 타이핑을 하다보면 손목 인대에 지속적으로 부하가 쌓이게 됩니다. 이렇게 시간이 흐르면 건초염이 발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보통 손목 통증을 처음 느낄 때 아래 부위가 가장 먼저 아프기 시작합니다.
손목 각도와 함께 살펴봐야할 부분이 근육과 인대입니다.
손목 회전과 함께 손등부터 손목 아래까지 통증을 유발하는 힘줄이 하나 있습니다.
아래 사진에서 보이는 4개의 손가락을 이어주는 힘줄을 손가락 폄근이라고 하는데요. 이 손가락 폄근이 손가락부터 팔뚝 안쪽까지 이어져있기 때문에 이 힘줄에 염증이 생기면 손목 통증이 발생하게 됩니다.
이 손가락 폄근은 연결되어 있어서 한 손가락만 움직이는게 불가능한데요. 예를 들어 새끼 손가락을 구부리게되면 다른 손가락까지 따라서 움직이게 됩니다. 이런 움직임이 많을수록 손가락 힘줄에 무리가 가게 되는데요. 손가락을 쫙 핀 상태에서 새끼손가락만 20번정도 구부렸다 폈다를 반복해보시면 더 직관적으로 알게되실 겁니다.
인류의 대부분 역사가 있던 사바나 초원 시기에는 손가락을 따로따로 움직여야할 일이 별로 없었습니다. 오히려 막대기와 같은 무기를 쥐고 필 때 4개 손가락이 붙어있어야 더 안정적으로 그립이 가능했을 겁니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 오면서 달라졌습니다. 우리의 5개의 손가락은 각각 독립적으로 스마트폰 자판을 입력하고, 노트북 키보드 키들을 입력합니다. 키보드를 오랫동안 타이핑하거나, 핸드폰 문자 메세지를 장시간 작성하면 손목과 손등 근육이 뻐근하게 느껴질 수 있는데, 바로 손가락 폄근때문입니다.
건초염, 터널증후군처럼 손목 인대 통증을 줄이기 위해서는 이 손가락 폄근에 부하를 최소화해줘야합니다. 그렇지만 현대 사회에서 키보드 입력을 줄이기는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방법이 없느냐.
아닙니다.
손가락 폄근과 연결되어 있지 않은 손가락이 하나 있는데요.
바로 엄지손가락입니다.
엄지손가락을 구부린다고해서, 다른 손가락들이 따라서 움직이지는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엄지손가락만 20번정도 구부렸다 펴보세요. 아무렇지 않으실 겁니다.
즉 키보드 타이핑시 손가락 폄근의 부하를 줄이려면, 새끼손가락보다는 엄지손가락을 활용하는게 손목 통증에 좋다는 말이 됩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일반 키보드의 경우 엄지손가락의 역할은 스페이스바에 고정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대로는 엄지손가락을 제대로 활용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터널증후군, 건초염을 방지하기 위한 키보드는, 엄지손가락에 새로운 임무를 부여해줄 수 있어야 합니다.
두 번째. 라운드 숄더
키보드 자판에 손을 올리고 검지와 검지 사이의 거리 VS 내 어깨의 너비를 비교해보세요.
분명 검지 사이 거리가 어깨 너비보다 짧을 텐데요. 신경쓰지 않았을 때 어깨가 자연스럽게 말릴 수 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만약 어깨가 말리지 않았다고 생각된다면, 검지와 검지 사이의 거리를 어깨 너비만큼 한 번 벌려보세요.
이 자세가 더 편하게 느껴진다면 이미 어깨가 말려있다는 의미입니다.
손목 통증과 라운드 숄더가 있다면 엄지 모듈이 있는 스플릿 키보드(분리형 키보드)를 사용하면 확실히 개선을 느낄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해 키보드를 반으로 쪼개서, 원하는 손목 각도, 원하는 너비로 사용할 수 있게 하는 제품입니다.
잘 만든 키보드를 찾으면 손목 내회전이 방지되면서 인대 염증에도 도움이 됩니다.
아래 사진처럼 분리형 키보드를 사용하면 손목 대신 키보드의 각도가 회전하기 때문에, 이제 손목이 꺾이지 않고 자연스럽게 위치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키보드를 몸에서 멀리 떨어뜨릴수록 손목각도는 편해지지만 어깨가 앞으로 나가게되고, 반대로 키보드를 몸쪽으로 가까이 하면 어깨는 편해지지만 손목 회전 각이 커지게 됩니다.
분리형 키보드를 사용할 경우, 몸쪽으로 키보드를 가까이 하더라도 키보드가 분리되어 있기 때문에 어깨에 무리가 가지 않는 자세로 사용이 가능합니다.
그렇지만 이게 끝이 아닙니다.
키보드는 한국이나 미국이나, 일본이나, 중국이나 모양이 똑같습니다. 언어별로 타이핑하기 쉬운 방법이 다 다를텐데 왜 키보드는 동일하게 만들까?
예를 들어, 해외의 유명한 분리형 키보드를 보면 왼쪽 키보드에만 B키가 있습니다. 그러나 영문 / 한글을 모두 쓰는 한국인에게는 B(ㅠ)가 양쪽 키보드 모두에 있어야 합니다. 예룰 들어 BOY와 우유를 입력한다고 생각해봅시다. BOY의 B는 영문 모음이기 때문에 왼손 엄지로 입력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우유의 ㅠ키는 한글 모음이기 때문에 오른손으로 치는 것이 더 자연스럽습니다. 해외 분리형 키보드를 사용하게 되면 왼손에 더 많은 부하가 걸리기 때문에 타이핑시 버벅이는 현상과 왼손에 피로도가 더 높아지기 마련입니다.
위 키보드는 문랜더 키보드로 직구가로 약 50만원 정도에 구매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이유와 함께 오쏘배열까지 처리된 해외 인체공학 키보드를 사용하다보면 타자 속도가 크게 떨어집니다. 저는 200타를 못넘기고 나가 떨어졌습니다.
이렇게 오쏘리니어, 단일 1U 키 등 인체공학 배열은 적응이 생각보다 어렵습니다. 적응하려면 최소 1주 ~ 몇 달동안 꾸준히 연습해야합니다. 이 적응기간에는 운동회때 2인 3각을 할 때처럼 손가락이 묶인 것처럼 느려지는데 아무리 비싼 키보드여도 이건 생각보다 참아내기가 어렵습니다. 또 집에서 일반 키보드를 쓰게되면, 또다시 새로운 배열에 적응해야하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저는 타이핑하고 있을 때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잊어버릴 정도로 편안한 키보드를 만들려고 합니다. 동시에 누구나 하루내에 적응할 수 있는 키보드여야 합니다."
많은 키보드를 사용해본 결과 적응에 시간이 많이 드는 키보드는 이후에 편안하더라도, 그 장점보다는 단점이 큽니다. 니치한 키보드 회사가 사라지는 경우도 부지기수라 키보드가 고장날 때마다 새로운 배열에 적응해야합니다. 하나의 키보드에 적응하면, 다른 일반 키보드를 사용하기가 어려워집니다. 적응 기간동안에 수련을 하는 마음으로 시간을 투입해서 연습해야하는데, 직장인에게 쉽지 않습니다.
이 철학이 중심입니다. 키보드를 개발하면서 문제가 생기고 고민이 생길 때마다 돌아오는 원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 키보드가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수 없다는 점을 기본 전제를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키보드는 특정 사람들에게는 판매할 수 없습니다.
구체적으로는 다음과 같은 디자인 원칙이 있습니다.
1. 충분한 거리를 벌릴 수 있는 분리형 키보드일 것
2. 손목 각도가 꺽이지 않을 것
3. 손가락 폄근 사용을 최소화하여 손목 인대의 부하를 줄일 것
4. 한국인이 입력하기 쉽고 적응하기 쉬운 배열일 것
5. 손목 내전근 회전을 줄일 수 있는 디자인일 것
6. 엄지 모듈을 포함한 각 키들의 위치와 높이가 누를 때 편안할 것
7. 어떠한 환경에서도 편안하게 사용이 가능할 것
8. 쉽게 휴대가 가능할 것
이 키보드가 만족시킬 수 없는 분들입니다.( 판매하지 않을 사람 )
1. 오쏘리니어 배열을 원하는 사람 -> 적응하기 쉬운 배열이라는 원칙에 어긋납니다.
2. 무선 키보드를 원하는 사람 -> 무선 방식은 2.4GHz 방식이든 블루투스 방식이든 주변 환경에 따라서 영향을 많이 받게 됩니다. 특히 스플릿 키보드는 2개의 채널을 연결해야하는 특성상 채터링 현상이 많아, 무선 스플릿 키보드를 사용하더라도 결국에는 유선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무선으로 제작하지 않습니다.
3. 손목과 어깨가 중요한 문제가 아니신 분.
위와 같은 철학을 기반으로 키보드를 제작해서 실제 쓸 수 있는 제품을 만들때까지 1년 이상 걸렸던 것 같은데요.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비용도 많이 들었습니다.
그래도… 완성했습니다!
제가 지금 이 브런치 글을 쓰고있는 키보드입니다.
1차 시제품 키보드
1. 분리형 키보드 입니다. + 각각 키보드를 컴퓨터에 연결해서 한 쪽씩만도 사용할 수 있게 만들습니다.
2. 양쪽에 B 키가 있어서 한글 / 영문 타이핑할 때 불편함이 없도록 했습니다.
3. 스페이스용으로만 쓰이던 엄지손가락을 더 활용할 수 있도록 키들을 추가 디자인했습니다.
4. LED를 넣고 2U 이상 키들에는 모두 스태빌라이저를 두었습니다.
5. 추가적으로 몇 가지 개선작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받자마자 바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에 큰 가중치를 주고 개발했습니다.
타이핑 속도 100타로 줄어드는 과도한 오쏘배열, 인체공학배열은 모두 제외시켰습니다.
실제 제작기는 2편에서 자세하게 공유드리겠습니다.
어떤 키보드인지 궁금하셨던 분이나, 직접 제작해보고 싶으신 분은 아래 자세한 키보드 제작기를 먼저 한번 살펴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키보드 개발기 2화 : Connecting Dots.
https://brunch.co.kr/@thenerd/10
https://www.youtube.com/watch?v=qbYRLMHMjM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