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 영화 <화양연화>
장면이 전환될 때마다 흐르던 재즈선율과 취향을 저격하던 치파오 의상, 치명적인 붉은 색감까지. 왕가위 감독은 색감뿐만 아니라 음악까지 영화에서 활용할 줄 아는 연출가였다. 영화를 보는 내내 감독이 보여주는 세상으로 빠져들었다.
차우(양조위)가 첸(장만옥)이 건넨(정확히는 첸이 남편의 출장길에 부탁해서 받은) 전기밥솥을 안고 있던 모습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첸은 남편이 있음에도 차우를 좋아하는 본인의 진짜 마음을 깨달았지만, 결국 현실을 선택했다.
차우와 마찬가지로 결혼을 하고 배우자가 있지만, 자신의 본능과 꿈을 쫓는 첸. 그는 무협소설을 쓰기 시작하고 싱가폴로 떠나버린다. 극의 말미, 신전 벽에 대고 자신의 비밀을 이야기하던(이전 장면에서 친구에게 이야기 하던 <임금님 귀는 당나기귀> 이야기처럼) 차우의 모습이 굉장히 인상적이다. 과연 무엇을 말했을까. 사랑해서는 안 될 사람을 사랑했다? 그녀에게 끝까지 함께 있어주지 못했다? 어떤 말이건 본능에 충실했던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는 내용은 아니었을 것 같다.
첸은 떠나간 차우에게 전화를 걸었다가 말없이 끊고 그의 방에 몰래 찾아와 자취를 느끼는 등 그를 잊지 못했지만, 결국 그녀의 가정을 선택했다. 아마 영화 속 시대인 1960년대 홍콩의 여인상을 첸도 따랐던 것이라 생각된다.
정말로 차우의 아내와 첸의 남편이 만났던 사이인지는 모르겠다. 정말 그랬다면 차우의 아내는 마음 한 구석 꿈이 있는 남편으로부터 안정감을 찾지 못했고, 첸의 남편은 지나치게 완벽한 아내에게서 안정감을 찾지 못해 그러한 허전함이 서로를 끌리게 한 것이 아닐까. 극의 흐름 내내, 첸의 남편과 차우의 아내는 앞모습이 아닌 뒷모습만 보여졌다. 굉장히 인상적인 대목 중 하나다. 배우자에게 허전함을 느끼는 두 인물의 공통점이 보이기도 하고 차우와 첸에게 더욱 집중하게 되는 효과가 있었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정말 궁금한 점은 차우의 아내가 만나던 상대는 첸의 직장 상사가 아니었던가? 모든 정황이 그러한 짐작을 가능하게 했는데, 이렇게 관객의 혼란스러움을 유발하는 것이 어쩌면 감독이 의도했던 바가 아닐까 생각된다.
장만옥만큼 치파오가 잘 어울리는 배우는 없을 것이다. 매 장면 바뀌는, 너무 아름다웠던 치파오의 색상과 디자인이 영상미에 큰 몫을 했다. 역시 왕가위 감독은 미쟝센의 대가임을 다시 한 번 느낀 작품이다. 치파오의 무수한 변화들이 여주인공의 감정 변화를 나타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유난히 짙었던 붉은 색감은 서로를 향한 사랑의 깊이라고 생각된다.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때를 뜻하는 <화양연화>. 둘에게는 서로 함께했던 그 시간이 바로 화양연화였을 것이다. 앞으로 ‘화양연화’ 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영화에 가장 많이 등장했던 붉은 색감이 떠오를 것 같다.
요즘 난... 편히 살려고 해요. 내 잘못도 아닌데...더 이상 고민하고 싶지도 않고 짧은 인생에... 뭔가 다른 걸 찾아야죠.
살면서 이런 뜻을 전달하는 말을 많이 들어왔지만, 영화 속 양조위가 했던 대사가 가장 와 닿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