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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르조 Jan 17. 2023

부유하는 우리들

230117

문득 우리 모두가 부유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드뷔시의 달빛을 들으며 어둠 속에서 샤워를 하고 있었다. 내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따뜻한 물줄기가 내 몸을 휘감았다. 신체도 정신도 완벽한 고요 속에 있었다. 갑자기 어떤 생각이 찾아왔다. 우리는 모두 삶을 떠다니는 것이 아닌가. 내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쩌면 누군가 내게 속삭인 걸지도 모른다. 인간은 우주라는 바다를 플랑크톤처럼 부유하다 사라지고 생성되었다가 또 없어진다.


최근 꽤 목표 지향적인 삶을 살고 있었다. 새해를 맞아 새로운 부서에 배치되었고 해보지 않은 업무를 부여받았다. 부끄럽지 않게 몫을 할 수 있도록 업무를 익혔다. 친구들과 하는 부업도 궤도에 올랐다. 우리가 나아가야할 방향과 내가 해야할 일이 뚜렷했다. 나의 깊이가 한없이 부족함을 느꼈다. 틈틈이 경제지를 읽고 가지 않던 도서관을 퇴근하고 들려 책도 몇 권 빌렸다. 매일 운동도 빼먹지 않았다. 게을러질 때마다 스스로를 타이른 노력 때문인지 이제는 동작을 시작하기까지 주저함이 없다. 그냥 한다. 

이렇게 살고 있는 내게 갑자기 왜 저런 생각이 끼어든 걸까. 예전에는 바닷속에서 허우적이는 걸 즐겼다. 길을 잃는 것을 낭만적이라고 생각했다. 삶을 한 발치 멀리서 떨어져 바라볼 때면 생이 언젠가는 끝난다는 사실이 보다 명확해졌다. 이런 인식에 이르면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 따위는 한 없이 작아 보인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머물러도 된다. 어떤 것도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우리는 우주 속의 먼지가 된다.

하지만 지금은 뭔가 다르다. 이미 스스로 부유할 만큼 부유했다는 걸까. 내가 원하는 바가 조금 더 뚜렷해졌다. 내가 해야할 일도 명확하다. 그 일을 하지 않음이 나의 목적에 위배된다는 보다 엄격한 자세로 스스로를 통제한다. 그럼에도 이런 계시가 찾아오는 건 즐겁다. 마치 내 안에 또 다른 내가 있어서 한 차원 더 깊이 생각해보라고 쿡 찌르는 듯하다. 목표 지향성의 반대급부로 인식이 어떤 흐름 속에 빨려 들어가 느긋히 부유한다. 잠시 쉬고 싶다는 또 다른 나의 부드러운 저항이다. 부유하는 자아가 목표에 수렴하고자 하는 내 의지에 경계심을 느껴 잠시 고개를 빼꼼하고 들었다.


인생이 비어있다고 느낀 적이 많았다. 처음에는 고통을 이겨내기 위해 감정을 무화시켰다. 자유를 얻기 전까지 나는 다만 자유를 얻기 위한 행동을 수행하는 비어있는 존재였다. 자유를 얻고 천재일우로 사랑도 뒤따랐다. 시들었던 나무에 다시 봄이 찾아왔다. 푸릇푸릇한 잎사귀도 피고 꽃도 망울졌더랬다. 하지만 사랑은 떠났고 다시 공허함이 찾아왔다. 공허 속에 다시 스스로를 마주했을 때는 산 꼭대기에서 굴러떨어진 돌을 바닥에서 다시 밀기 시작하는 시지프스가 된 것만 같았다. 왜. 왜 살아야 하는가. 죽음은 경험해 볼 수 없기에 그 효용을 삶에 대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삶이 허무해질 때면 죽음이 달콤해져 갔다.

지금의 나는 어떻게 다를까. 삶의 목적을 사랑이라고 말해왔다. 사랑이 연인, 친구, 가족, 그 외 타인으로 구성된다면 연인의 포트폴리오 비중은 삶이 지날수록 낮아져왔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었다고 말하고 싶다. 하지만 연이은 관계 속에서 마모되어갔던 것도 지나고 보면 내 선택이지 않았나. 지나고 유심히 보면 모든 게 내 의지의 결과다. 이제는 연인의 사랑 없이도 삶이 지속 가능한 상태에 이르렀다. 마침내.

나에게 과분한 친구들을 만나고 가족의 무조건적인 사랑 속에 머물 수 있다는 건 축복이다. 내가 일터에서 동료들을 존중하고 존중받으며 일할 수 있다는 것도 행운이다. 나라는 개체가 크게 상처 난 곳 없이 생존해 있다는 것 자체가 감사할 일이다. 그럼에도 궁극적으로 내가 지향하는 바는 한 사람과의 한 없이 깊은 관계다. 내가 상대방을 통해서 무한히 확장하듯 상대방도 나를 통해서 우주가 될 수 있는 그런 관계 말이다.

이제 더 이상 의미 없는 관계 속에 머물고 싶지 않다. 모든 순간이 의미일 수 있겠냐만은 어떤 순간에서도 의미를 찾아내는 강인한 인간이 되고 싶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신이 없다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라고 했다. 그 결과 어떤 것도 의미를 가질 수도, 가질 수 없을 수도 있게 되었다. 개인이 자신만의 세계관을, 종교를 창시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평생 스스로를 모른다. 끊임없이 변해온 자신을 가끔 자각하면 깜짝 놀라곤 한다. 다시 오컴의 면도날이다. 가장 단순한 형태로 자신을 지어나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붕괴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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