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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재민 Jul 27. 2019

하노이 밤길을 걸으면

그들이 왜 '지'를 발음하지 않는지 궁금해질지도 모른다

새로 방을 옮겼다. 동다(Dong Da)라는 동네다. 하노이 방문자의 중심인 호안끼엠 호수와 구시가에서 서쪽 5km 정도 떨어졌다. 외국인 여행객 수, 영어 메뉴판, 물가가 동반 하락한다. 구시가에서 8만 동짜리 소고기야채볶음밥이 새 숙소 앞 식당에서 4만 동이다. 소위 로컬이다. 여전히 나는 튀는 외국인이다. 로컬 안에 들어왔다고 나 혼자 자위할 뿐이다.


해가 저문다. 오토바이 뒤에 앉아 10분 정도 달린다. 구시가 단골 펍이 행선지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던데 반대로 셔터가 굳게 내려져 있다. 젊은 매니저가 항상 나를 반겨주던 곳에는 노상에서 담배를 파는 아줌마만 앉아 있다. 지난주에 분명히 “연중 무휴”라고 해서 내가 “오마이갓, 쉬는 날도 있어야지”라며 맞장구 쳤는데. 다음에 만나면 따져야지.


근처 펍에 들어간다. 라마단은 아니겠지만 라마단처럼 한산하다. 혼자인 주제에 4인용 테이블을 차지하곤 똥폼을 잡는다. 호가든 생맥주 한 잔, 스텔라 한 병을 마시고 7500원을 낸다. 그러고 보니 베트남에서 일본 맥주를 거의 보지 못했다. 일식당에서나 일본 맥주를 취급한다. 일식당은 내 취향이 아니니까 패스한다. 뜻밖의 일본불매운동 참가.


새 숙소까지 걸어가자. 구글지도를 보니 4.6km, 도보 46분 소요. 가뜩이나 요즘 1일 1만 보를 채우지 못해서 조바심이 생긴다. 오늘 1만 보 1배 한 번 해보자. 숙소에 들어가면 저절로 철푸덕 하니까 1배다. 


한밤중 홀로 걷는 외국인 남자는 호객꾼들의 주요 타깃이다. 오토바이가 옆으로 다가온다. 음흉한 톤으로 “레디 맛싸?”라고 말을 붙인다. 못 들은 척하고 갈 길을 간다. 오토바이가 금세 쫓아와서 “레디 맛싸, 붐붐, 뷰티풀”이라고 좀 길게 말한다. 대꾸는 없다. 그냥 계속 걷는다.


‘레디 맛싸, 붐붐, 뷰티풀’의 직역은 ‘예쁜 여자가 섹스도 해주는 마사지 할래?’다. 의역은 다음과 같다. ‘너는 지금 외롭다. 그렇지 않다고 주장해도 소용없다. 나를 따라와 베트남 아가씨의 섹스 서비스를 받으라. 너의 조국보다는 쌀 것이다. 오호, 더 비쌀 수도 있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무서운 곳에서 우리가 너를 겁박해서 눈탱이를 칠 거니까."


첫째, 왜 ‘지’까지 발음하지 않을까? 베트남에서 ‘마사지’는 왜 ‘맛싸’가 되는 걸까? ‘지’ 발음이 어렵지 않을 텐데. 그래서 더 궁금해진다. 일반 마사지숍 앞에서 말을 거는 친구들도 예외 없이 ‘맛싸’다. 괜히 신기하다. 마, 사, 지. 이거 절대 어려운 발음이 아니다. 


둘째, 저런 호객에 넘어가는 여행자가 있을까? 이 시간에 오토바이를 타고 따라가는 일이 위험천만할 게 뻔하다. 대한민국에서 왔든, 네덜란드에서 왔든, 러시아, 미국, 마케도니아, 마다가스카르 여행자든 그 정도 본능은 다들 갖고 태어난다. 술에 취했다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참견이 생기기도 한다.


구시가를 벗어나는 내내 여러 호객꾼들이 달라 붙는다. 내 머리 위에 “지금 나 섹스하고 싶다”라고 쓰인 네온사인이라도 반짝거리고 있나? 아줌마 호객꾼도 등장했다. 베트남 홍보 브로셔에서나 볼 법한 미소(부처님 눈매, 살짝 올라간 입꼬리, 자연스럽게 솟은 양 볼)를 보내면서 아줌마는 “웨어 아 유 고잉?”이라고 묻는다. 모르는 척, 또 걷는다. 부르릉~ 다행이다. 최소한 아줌마가 무모한 사내 호객꾼들보다 눈치가 빠르다.


숙소까지 거의 절반 이상 걸었다. 저쪽에 젊은이들이 탄 오토바이 다섯 대가 몰려 있다. 행색을 보아 하니 대학생들이다. 남녀가 섞여있었지만 사랑보다 우애가 분명해 보인다. 갑자기 내 옆을 빠르게 지나친다. 그러더니 길가에서 자고 있던 할머니를 에워싼다. 한 여학생이 내려서 할머니를 깨우곤 음식을 준다. 할머니는 연신 고맙다고 인사를 한다. 젊은 오토바이 다섯 대는 일사분란하게 또 어딘가로 사라진다.


베트남의 1인당 국민소득은 7,030달러다. 대한민국은 4만 달러를 돌파했다. 단순 계산해서 평균적으로 우리보다 5분의 1 이하로 번다는 뜻이다. 대졸 신입사원 월급이 30만원 정도라고 한다. 호객꾼들이 “레디 맛싸?”라고 확률 떨어지는 낚시를 무한 반복하는 이유도 비슷할 것이다. 그들은 한푼이라도 벌어야 할 거다.


그런 국가의 수도 하노이. 열대야의 찝찝함과 도보 이동의 후들거림이 마구 교차하는 와중에 베트남 청년들이 노숙자들에게 자비를 베풀고 있다. 그런 얘기 있지 않은가. 없는 사람이 더 없는 사람을 돕는 이야기. 약한 사람이 더 약한 사람을 지키는 이야기. 작고 숨은 영웅.


젊은 오토바이들의 후미등을 보고서야 ‘음식 사는 데 보태라고 돈 좀 줄 걸’이라는 생각이 든다. 호가든과 스텔라 값만 줘도 저 친구들이 훨씬 값지게 써줄 텐데. 외국인 자선가가 될 기회는 민첩하지 못한 두뇌 탓에 순식간에 사라진다. 구글지도를 보니 아직 1km 넘게 더 걸어가야 한다.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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