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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Tea Jan 28. 2024

부드럽게 제때 꺾여야 끝까지 살아서 간다

[오늘도 나는 감탄 사寫] 11

2022년. 12월 3일. 카타르 월드컵 조별 리그 3차전. '위쑝 빠레'의 시작이 된 20년 전의 짜릿한 승리의 기억을 가지고 있지만 넘보기 쉽지 않은 강팀 포르투갈이 상대였다. 누구나 대상이 너무 거대하면 마음을 아예 내려놓게 된다. 최선을 다해보는 방법밖에 없으니까. 바다로부터 끊임없이 스며드는 수많은 이물질 자체를 막을 수는 없지만 자기 살을 살리려 감싸고, 감싸느라 최선을 다해 만들어 낸 탄산칼슘이 운 좋게 진주가 되듯이.   


진주 같은 마음은 수많은 실패의 아픔이 아니라 '가장 좋았던 기억'만을 떠올리게 한다. 진주가 되지는 않더라도, 자기 살은 살려낼 수 있다는 믿음. 밑져도 본전 이상인 마음이다. 그러다 보면 오히려 편안해진 정신에서 엔도르핀에 범벅이 된 근육들이 자기 기능을 120퍼센트 이상 발휘하게 된다. 그렇게 그 마음은 의외의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결국, 덤으로 주어진 시간에 가장 좋았던 기억만 생각했던 덕에 멋지게 역전골을 넣어 '해보니 되네'하는 좋은 기억 하나를 추가하게 된다. 그때 e-스포츠 '롤드컵' 팬일 가능성이 큰 키 크고 잘생긴 역전골의 젊은 주인공이 태극기에 '중요한 건 꺾이지 않은 마음'이라는 메시지로 세리머니를 한 후 우리는 또 한 번, 괜찮아, 괜찮아를 외치며, 결과 따위에 연연하지 않는 사람들로 무의식적으로 성숙해져야 했다. 


2024년 1월 25일. 역시 카타르에서 개최 중인 아시안컵 우리나라 조별 리그 마지막 경기. 참가팀 중 홍콩 다음으로 최약체인 말레이시아 선수들 역시 우리나라 선수들을 보면서 불과 6년 전의 짜릿한 역전승이 있었다는 가장 좋은 기억만을 떠올리려 부단히 애썼을 거다. 결국, 그들도 우리처럼 해냈고, 진주 같은 마음을 한가득 안고 금의환향을 했다. 


매년 거봉을 주렁주렁 매달던 포도나무 밑 평상에서 가만히 누워 있으면 달짝한 향기가 들숨 때마다 한가득이던 마당. 수십 년 동안 아내 삼 남매가 자랐던 그 마당 너른 집이 지금은 재건축 중이다(어머님은 아파트 브랜드를 빗대어 더 편한 세상으로 변신 중이라고 하신다). 그 덕에 부모님들은 근처 빌라로 옮겨 잠깐(두 분 모두 잠깐이라고 표현했지만, 최소 3년이다. 벌써 두 번째 겨울을 나고 계신다) 거주하고 계신다. 


지난주 어느 날. 며칠을 영하 십몇 도가 연사흘 이어지던 때. 안부 통화를 하는 중간에 장인어른옆에서 수화기 너머 어머님 목소리가 다급하게 들렸다. 어디서 새어 나오는지 모르는 물이 안방 바닥에 이미 흥건해지고 있다고. 그 추위에 거실에 전기장판 하나 켜놓으시고, 안방 보일러를 잠그신 지 한 달이 넘으셨단다. 순간 수도관이나 보일러 동파구나 했다. 


하던 일을 미룬 채 가장 먼저 차를 움직일 수 있었던 내가 달렸다. 1시간 20분 조금 넘는 거리를 자전거로 동네 한 바퀴 얼른 돌아와야지 하는 다급한 마음으로. 다행히, 수도관이나 보일러 동파가 아니었다. 5층에서 1층을 지나 하수구로 빠져나가는 세탁기 배수물이 1층 부모님 댁에서 막혀 역류한 것이었다. 십몇센티 턱을 다 채우고 넘어 들어 안방으로 흘러 들어온 물을 내가 달려가는 사이 여든이 넘은 두 분이서 퍼담아 버리셨단다.


다시금 훈훈해지는 안방 바닥에서는 세제 냄새가 스믈거렸다. 베란다 배수관 입구에서는 비누 거품이 아가미처럼 뻐끔거렸다. 바깥으로 나가 봤다. 필로티 구조상 2층 같은 1층 부모님 댁 아래는 주차장이었다. 그 입구 위쪽 콘크리트 아치 뒤로 엘자 모양의 플라스틱 배관이 40-50cm쯤 노출되어 있었다. 다른 부분은 다 콘크리트 안에 매립되어 있는데, 그 부분만. 아마 배관 막힘이 생기면 공사용으로 그렇게 노출시켰지 싶었다. 


그 부분이 의심이 갔다. 그래서 주방에서 가지고 나간 식탁 의자 위에 주차장 안쪽 바닥에 오래전에 버려진 듯한 한 칸짜리 미니 냉장고 문을 아래쪽으로 하고 올렸다. 어머님의 하나밖에 없는 (역시 아주 오래되어 소리까지 덜덜거리는) 드라이기를 배관의 엘자 부분에 데고 뜨거운 바람을 불었다. 그러면서 다른 손 주먹으로 이어진 부분을 톡톡 쳤다. 눈에 보이지 않는 얼음 덩어리에게 노크를 하고 싶은 마음으로.


그때 아래쪽에 춥게 서 계시던 장인어른이 슬그머니 자그마한 나무토막 하나를 내미셨다. '윤서방, 이걸로 때려봐. 힘 빼고, 부드럽게'. 그렇게 한 20여분쯤 지났을까. 오래된 빨간색 드라이기 속 모터가 마치 불그스레 변하는 듯했다. 잠깐 스위치를 오프로 내리는 손가락 끝은 압박 붕대를 칭칭 감은 것처럼 얼얼했다. 속으로 1분 정도를 세웠나 보다. 손가락, 발가락 열개씩을 여러 번 왔다 갔다 하면서. 


그러는 사이 지나가는 행인이 낯설게 올려다봤다. 뒷짐을 지고 가만히 쳐다만 보는 어르신은 꽤나 추워 보였다. 눈인사를 받아주시는 눈빛 사이 미간이 내가 더 추워 보인다는 듯 찡그려졌다. 드라이기를 다시 켰다. 위잉거리는 소리가 억지로 났다. 멈추고 싶어 하는 것 같이. 어쩌면 우리 아드님보다 그 드라이기가 어머님과 더 오래 살았겠다 싶었다. 여전히 얼얼한 손가락 끝으로 2단까지만 올렸다.  


다시 몇 분이 지났을까. 꺾인 부분에서 투둑 하고 얼음이 갈라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드라이기 소리에 톡톡톡톡 때리는 소리에 묻혔지만 분명 어딘가에 매달려 있다가 툭 떨어져 나오는 게 분명했다. 내 마음이 다 녹아내렸다. 다시 5분쯤 계속 두들겼다. 그러자 얼음 덩어리가 라데츠키 행진곡에 맞춰 행진을 하듯이 툭하고 갈라져 물에 뒤섞여 콘크리스 속으로 쿠르르 하고 미끄러져 들어가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스무 살이 되기 얼마 전 나의 겨울이 소환된 건 다시 일하러 달려가는 차 안에서였다. 핸들을 잡은 손가락 끝이 조금은 말랑해진 걸 느끼면서. 대학에 합격한 후 아버지가 일하시는 현장에서 두어 달 아르바이트를 했었다. 수없이 많은 철로, 호스, 배관들 사이사이를 자그마한 망치로 배관을 퉁퉁 치면서 돌아다니시는 아버지를 옆에서 따라다녔다.  


'이 배관 안에 들어 있는 건 물이고, 기름이고, 가스고, 공기거든. 이 배관이 여기서 이렇게 적절하게 꺾여야 처음 밀려 난 압력이 어느 정도 유지돼. 그 압력이 유지돼야 내용물이 끝까지 살아서 갈 수 있는 거거든'. 맞다. 제때 꺾여야 끝까지 살아간다는 아버지의 말씀이 조언처럼 들렸을 나이가 아니기도 했지만, 오래전 일이라 잊고 살았다. 아니, 잊었다는 사실 자체를 잊었는지도.  


그러면서 따님이 사진을 보면서 잘 생겼다, 아이돌이다 하는 장인어른의 결혼사진, 증명사진 옆에 뒷 배경이 온통 초록색인 사진 한 장이 떠올랐다. 이쪽에서 저쪽으로 끊임없이 이어진 거대한 기계들이 수영장 레일처럼 이어져 있었다. 원사를 뽑아내는 기계였다. 그 기계 앞에서 마치 현대 무용을 하듯이 두 손을 앞으로 나란히 내리고 있는 듯한 장인어른은 손바닥 위에 가느다란 하얀 실을 올려놓고 저글링 하는 것 같아 보였다.  


파도처럼 출렁거리는 것 같은 고속도로 위. 수많은 차들이 자기들의 목적지를 향해 일사 분란하게 질주한다. 그들을 강제로 갈라놓는 점선들이 서로 겹쳤다 떨어졌다 하는 듯 현기증이 일어난다. 각자가 선택한 종목이 펼쳐지는 그라운드. 그 위에 올라 선 먹고살기 선수들은 마음마저 꺾이면 안 된다고 심리적으로 내모는 이 사회 안에서 시도 때도 없이 외치는 파이팅으로, 굳게 다문 입술로 그 순간을 버티는 듯하다.    

 

하지만 지금껏 '살아남은 사람들'을 보면 꼭 그런 것만도 아니지 싶어 진다. 아버지도 장인어른도 가족을 위해 나선 어둑한 새벽에 불현듯 밀려오는 억울함도 외로움도 없진 않았을 거다, 분명. 그런데 힘을 빼고 부드럽게 그리고 제때 적절하게 꺾이면서 자기 삶의 압력을 유지하신 덕에 그런 감정들 조차 사치라고 치부하며 살아내셨을 거다.  


지금도 아무 말 없이 휴대폰 화면을 들여다보시면서 기다리시는 걸 거다. 바쁘다는 핑계로 한참만에 드린 안부 전화에도 어제 통화했던 것처럼, 조금 전에 따듯하게 안아준 것처럼 여전히 힘을 빼고, 그 생각 저 마음 다 꺾으시면서 보듬어 주시는 걸 거다. 몸으로 마음으로 잘 살라고 매번 친절하게 알려주시는 걸 거다. '어, 괜찮아, 다 좋아, 전화 줘서 고마워, 정말 고마워' 하시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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