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CINEKOON Jun 20. 2024

깨지고 부서지고 도랑에 빠질지언정,

<카브리올레>


스무살의 대학 시절, 가까웠던 한 동기는 마흔이 되면 자긴 죽을 거라 말했다. 딱 마흔까지만 살고 싶다고. 물론 그건 어느정도 농담 섞인 말이었을 거다. 설마 정말로 마흔 딱 되자마자 할복이라도 하겠나. 그냥 담배 태우고 술 마시는 걸로 남들 잔소리 듣기 싫어서 먼저 둔 묘수였을 테지. 물론 나나 그 동기나 아직 마흔이 안 되었기에 이미 다 끝난 이야기로만 치부할 수는 없을 테지만, 어쨌든 그 친구는 아직까지 건강하게 열심히 잘 산다. 


하지만 막상 그 죽을 날을 딱 받아두게 되면 어떨까? 물론 이는 시한부 인생을 다뤄온 참으로 많은 작품들이 지금까지 탐구해온 어쩌면 뻔한 이야기다. 때문에 당신이 헛되이 보낸 오늘은 어제 죽은 이가 그토록 갈망한 내일이라던 소포클레스의 말까지 굳이 갈 것도 없을 거다. 하지만 아무리 뻔한 이야기라고 해도 한 번쯤은 더 생각해볼 수 있지 않나, 죽을 날을 딱 받아두면 어떤 기분일지. 그리고 그런 나는 어떻게 행동할지. 


20대의 전부를 가족들 부양하고 사회에서 인정받기 위해 쓴 지아. 그러나 그런 그녀에게 남은 건 성대한 결혼이나 화끈한 승진이 아닌 뜬금없는 암 선고. 물론 다행히 말기는 아니라서, 수술 받으면 90% 이상의 확률로 완치된다고는 한다. 헌데 그럼에도 어딘가 마음이 허한 건 왜인가. 내가 고작 이런 병을 얻으려고 그동안 열심히 살아온 것이란 말인가? 그같은 의문이 자꾸 마음 속을 맴돌던 와중, 가장 친했던 친구가 스스로 죽음을 택했단 소식까지 듣게 되자 지아는 결심하기에 이른다. 적금이고 나발이고 지금 당장 깨서 멋들어진 오픈카를 하나 사는 거야. 벤츠 카브리올레, 하얀색으로다가. 그리고 떠나는 거야, 죽은 친구와 생전에 언젠가 함께 하기로 약속했던 전국 일주. 그렇게 지아는 하얀 카브리올레 옆자리에 전 애인까지 태우고 전국일주를 나선다. 


그래도 수술 받으면 완치할 수 있다던데, 제아무리 친한 친구가 죽었다곤 하지만 왜 지아는 애지중지 모았던 적금까지 깨가며 난데없이 카브리올레를 샀을까? 영화는 그 부분의 개연성을 헐겁게 만들어두었다. 그래서 처음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대체 왜? 수술 받고 다시 복귀하면 되잖아. 겨우 자리잡은 회사에서 제 역할 다 해내다가 적금 만기 되면 그 때서야 환급 받으면 되잖아. 대체 왜? 


그러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지아는 친구의 죽음 직후 이미 자신도 정신적으로 죽었다 여긴 것 아닐까?- 하는. 육체적 죽음 말고, 이미 정신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죽음에 준하게 된 상태. 어쩌면 그게 그 당시 지아의 상태였던 것은 아닐까. 거기서 <노예 12년>이 떠오르기도 했다. <노예 12년>의 주인공 솔로몬은 말했다, 자신은 생존(survive)이 아니라 삶을 살고 싶은 것(live)이라고. 솔로몬의 그 생각에 화답하기라도 했던 것인지, 지아는 <카브리올레> 후반에 이르러 내면 깊은 곳에 숨겨져 있던 삶에 대한 자신의 의지를 솟구쳐 퍼올리며 주먹을 휘두른다. 


아쉬운 부분이 없지는 않은 영화다. 중반부 살짝 전개가 늘어지는 부분이 있고, 로드 무비를 표방하고 있음에도 상영시간의 절반이 지나서야 여행이 시작되는 부분 역시 다소 당황스럽다. 하지만 다행인 건 오히려 여행을 떠나기 전까지의 그 전반부가 나름대로 속도감 있게 진행되고 있어 지루할 틈이 없었다는 점. 그리고 장르적 변환이 일어나며 반전 아닌 반전이 가동되는 후반부 역시 옅지만 제 역할은 다 해내는 편이라 재미있었다. 더불어 금새록을 비롯해 류경수, 강영석, 한예지 등의 연기도 고루 좋은 편. 


이 역시 공익광고 마냥 뻔한 수사이지만, 우리는 어떻게든 살아가야만 한다. 살아내야만 한다. <카브리올레>는 깨지고 부서지고 도랑에 빠질지언정 삶의 속도를 달려내야만 하는 그런 당신에게, 빠르든 느리든 자신만의 페이스를 찾으라고 권하는 영화다. 그리고 당신이 원했던 게 승진이든 우정이든 여행이든 아니면 하다못해 섹스였든 간에 다 패버릴 기세로 갈구하라 말하는 영화이기도 하다. 그런고로 나나 그 동기나 마흔까지든 그 넘어서든 열심히 살아내야지. 조금씩 투박해도 생기와 활력이 넘치는 영화. 영화를 보고 나오는데 괜시리 복싱을 배우고 싶어졌다. 그리고 카브리올레 말고 경운기도 몰아보고 싶어지고.


<카브리올레> / 조광진


작가의 이전글 풀냄새 가득한 이국의 순수함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