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도시의 사랑법>
같은 대학을 다니던 동기 사이인 재희와 흥수. 클럽과 술, 담배를 좋아하는 취향이 너무나도 잘 맞아. 그런데 그런다고 둘이 연애하자니 재희는 흥수가 취향이 아닌 듯하고 흥수는 또 게이라 여자인 재희에게 아예 관심이 없고. 그러나 그 안에서도 명백한 니즈는 서로 맞아떨어지나니... 여자 혼자 사는 집에 자꾸만 변태들이 기웃대 재희는 불안하고, 서울이란 대도시의 어마어마한 방세에 흥수는 제대로 몸 누일 곳 찾지 못하니 이럴 거면 친구 대 친구로서 사이좋게 한 번 함께 살아보자는 거지. 그렇게 선명한 남자와 여자임에도 확실한 친구사이로, 재희와 흥수는 서로의 룸메이트가 되어준다.
함께 산 그 10여년의 세월동안, 재희와 흥수는 각자의 연애를 이어나간다. 재희가 여러 남자들을 이어 만나보는 와중, 흥수는 오직 한 남자와만 좋으면서도 불안해 흔들리는 관계를 세워나가고. 그럼 이 영화가 제목에서부터 말하고 있는 그 '사랑법'이란 대체 무엇일까? 영화는 재희로 말미암아, 두루 여러 사람 만나보고 너무 상대에게 자신을 맞추지 말라며 우리를 등 떠밀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흥수로 말미암아, 때로는 스스로의 에고를 좀 죽이고서라도 상대와 맞춰나가보라며 채근하고 있는 것인가? 제목은 <대도시의 사랑법>인데, 대체 이 영화가 알려주고 있는 바로 그 빌어먹을 '사랑법'이란 무엇이냔 말이야.
앞서 말했듯, 영화는 재희와 흥수 두 사람을 통해 여러 연애의 단면들을 보여준다. 그러나 거기엔 이 영화가 말하고픈 '사랑법'이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그 묘사들에도 영화가 저마다 말하고 싶어하는 '사랑법'들이 필시 존재한다. 다만 핵심은 그쪽이 아니라는 거다. 그저 내가 느끼기에, <대도시의 사랑법>이 우리에게 들려주고 싶어하는 '사랑법'이란 그 주체와 대상이 모두 '나'인 관계에서 비롯되는 것만 같았다.
그러니까 <대도시의 사랑법>은 결국 온전한 나 스스로를 발견해내고 또 그를 품어주는 개념으로써의 방법론적 사랑법이다. 이 영화 속 이야기에 따라, 결국 재희는 타인과의 관계 내에서 스스로를 정의하는 것이 아닌 그냥 있는 그대로서의 자신을 발견해내기에 이른다. 그리고 그건 흥수도 마찬가지다. 게이라는 자아정체성을 인정하는 걸 넘어, 그를 더는 부끄럽지 않게 여기는 일까지가 흥수 사랑법의 완성인 것이다. 그리고 그건 퀴어라는 소수자의 입장 뿐만이 아니다. 영화를 보는 우리 모두, 퀴어든 퀴어가 아니든 저마다 채 드러내고 싶어하지 않으며 인정하긴 더더욱 싫어하는 스스로의 그런 면모들이 조금씩은 다 있지 않은가.
젊다면 아직 젊은 나이이긴 하지만, 그래도 인생을 30년 넘게 살아오다보니 나로서도 스스로에 대해 조금씩 더 알아가게 되는 것 같다. 참 놀랍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기 자신이 스스로에 대해 알게 되는 데에 무려 30년도 더 걸린다니. 심지어 지금 내가 내 스스로에게 느끼고 있는 것들이 아직 전부란 생각도 들지 않는다. 아직 30대인 나조차도, 이토록 온전한 나를 채 알지 못하고 있다.
인생의 초반기에, 아직도 자기 스스로를 찾아 이 대도시를 부유하고 있는 그대들에게. <대도시의 사랑법>은 마치 말하고 있는 것 같다. 다소 뻔한 교과서적 멘트이긴 하지만, 그래도 찾아 헤매이는 게 아니라 그냥 자기 스스로를 인정하고 또 껴안아주는 게 어쩌면 인생을 살아가는 데에 있어 최고의 사랑법이 아니겠느냐. 이 넓디 넓은 도시 어딘가에 당신이 있는 게 아니다. 당신은 아주 오래 전부터 아주 당신인 상태로 바로 당신 안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