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는 타이타닉을 보고 싶지 않았다>
후천적으로 시력을 잃고, 거기에 하반신 마비라는 무거운 선고까지 받은 야코. 하루 한 번 요양 보호사가 찾아오지만, 그외 하루라는 긴 시간은 온전히 야코만의 업무다. 삶이 곧 일이 되어버린 상황. 그는 보이지 않는 집 안을 더듬 거리며 시간에 맞춰 밥을 먹고, 약을 먹고, 대마초를 피워대며 하루를 보낸다. 하지만 이렇게 짐짓 무료 하게만 보이는 그의 삶에도 최고의 휴식처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그의 연인 시르파. 비록 인터넷을 통해 만나 시작된 장거리 연애라 직접 얼굴을 맞댄 적은 없지만, 그럼에도 시르파와의 통화는 야코의 무겁기만 한 하루를 잠시나마 가볍게 만들어주는 활력소가 되어준다. 하지만 그 시르파도 몸이 아파오고... 더 이상은 안 되겠다 판단한 야코는 집 밖으로 나서 직접 시르파를 찾아가겠다 결심한다. 걱정하는 시르파에게 집에서 택시까지, 택시에서 기차역까지, 기차역에서 다시 택시까지, 그리고 그 택시에서 시르파의 집까지 몇몇 사람들의 도움만 받으면 금방일 거라고 호언장담하는 야코. 그러나 누구에게나 다 그렇듯, 인생이란 녀석은 계획대로만 되는 호락호락한 놈이 아니다.
육체적, 정신적 장애를 가진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는 영화들은 그들 삶의 불편함을 관객들에게 체현시키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한다. 그중에서도 <그 남자는 타이타닉을 보고 싶지 않았다>의 방식은 참으로 집요하게 느껴진다. 영화의 카메라는 상영시간 내내 얕은 심도를 유지한채로 주인공 야코의 몸 주위 만을 부유한다. 영화란 게 어쩔 수 없는 시각매체이다 보니, 야코가 매순간 느끼는 그 어둠으로만 런닝타임 전체를 유지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대신 영화는 정말로 집요하단 생긱이 들 정도까지, 야코의 얼굴과 손짓 정도만을 담아낸다. 야코 주위의 다른 인물들은 그 얼굴이 제대로 비춰지거나 밝혀지지도 않는다. 아닌 게 아니라 정말로 영화 내에서 가장 와이드한 쇼트 사이즈가 바스트 샷 정도임. 대개는 클로즈업과 익스트림 클로즈업으로만 구성되어 있고.
이렇게 카메라가 야코의 육체적 장애를 집약할 때, 각본의 다른 요소들은 그의 정신적 고통을 관객들에게 전이 시켜낸다. 앞서 말했듯, 영화란 시각매체다. 고로 즐기는 데에 있어 시각을 잃었을 때 가장 많은 제약을 받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물론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배리어프리 상영방식도 존재하긴 하지만... 어쨌거나 그렇기 때문에, 영화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언제나 시각을 잃는 게 가장 두려운 일처럼 여겨졌다. 그리고 영화는 여기에 야코가 영화 매니아라는 설정을 끌고 들어와 그 허전함을 관객들에게 옮긴다. 야코는 후천적으로 시각을 잃은 사람이다. 그러니까 그는 영화를 좋아했고, 또 즐겼지만 이젠 더 이상 예전처럼 그럴 순 없게 된 것이다. 그걸 상상하는 데에서 오는 답답함과 공포. 야코가 영화 매니아란 설정은 그 자체만으로도 큰 감정적 힘이 있다.
영화는 별 사건이 없는 듯 하다, 중후반부 들어 범죄 드라마의 길을 걷는다. 그렇다고 해서 장르적 테이스트가 강하다는 건 아니고, 기차에서 내린 야코가 동네 양아치들에게 끌려가 고생을 하게 되는 것. 그리고 거기에서, 야코의 설움이 터져 나온다. 겨우 여자친구 집 한 번 가고 싶었을 뿐인데,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여기까지 와 결국 너희같은 양아치들에게 말도 안 되는 협박이나 받고 있는 내 처지가 얼마나 서글픈지 알기나 하냐는 울분. 그 울분을 담은 상황과 대사는 다분히 직접적이라 오히려 더 힘을 얻는다. 야구로 치면 곧바로 꽂힌 직구 같은 느낌.
최근, 전국 장애인 차별 철폐 연대가 출근길의 지하철에서 시위를 벌였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불편함에 공감 하기도 했지만, 또 한 편으로는 왜 굳이 바쁜 평일 출근길 지하철에서 시위를 벌여 다른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치냐는 의견도 있었다. 물론, 후자의 의견에도 공감한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하루를 더 중히 여긴다. 장애인이고 뭐고 알게 뭐람, 지금 당장 내가 회사 지각하게 생겼잖아! 당연히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다. 하지만, 한 편으로는 그런 생각이 들더라. 그 장애인들이라고 해서 꼭 바쁜 평일 출근길 지하철에서 시위를 벌이고 싶었을까? 그 바쁜 평일 출근길 지하철에서 시위를 하면 다른 사람들이 피해를 볼 수 있다는 걸 장애인들이 몰랐을까? 어쩌면 알았을 것이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만약 그들이 한가한 주말 새벽 지하철에서 그런 시위를 했다면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그런 목소리들을 들을 수 있었을까? 들어주기나 했을까? 아마 그들도 그런 숱한 과정들을 거치다 결국 바쁜 평일 출근길의 지하철로 자신의 목소리들을 옮긴 것이리라. 그러니까 어쩌면 민폐를 끼친 것은 팩트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직간접적으로 크고 작은 피해들을 봤을 테니. 하지만 때때로 변화란 것은 그런 과정을 필요로 한다. 백 날 천 날 자기 방 침대에서 중얼 거리면 뭐해, 무엇이든 바꿔 나가려면 공터나 광장에서 큰 목소리로 읍소 해야지.
<그 남자는 타이타닉을 보고 싶지 않았다>를 보며 문득 최근 국내에서 있었던 그 일들이 떠올라 끄적거려 봤다. 영화 속에서 야코도 말하지 않나, 착한 사람 몇 명의 도움만 받으면 여자친구를 만나러 갈 수 있을 거라고. 하지만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 이 세상엔 착한 사람 못지 않게 나쁜 사람도 많다. 그렇담 결국 이제 그건 운의 영역으로 넘어가는 것 아닌가. 그런데 우리 공동체의 일부가 다른 대단한 일도 아니고 그저 여자친구 보러 가는 것 뿐인데도 그 과정 전체를 오직 운에만 맡겨야 된다고 한다면, 그것은 너무 가혹하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