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준비는 잘 되어가냐는 인사말에 "응 그럭저럭 잘하고 있지"라는 말로 대답을 하는 요즘이야. 정말 말 그대로 그럭저럭 잘 준비하고 있거든. 생각보다 준비할게 많다고 느껴지지도 않기도 하고, 뭔가 큼직한 무언가들 그러니까 상견례라던가, 식장을 잡는다던가, 스튜디오 촬영을 한다던가 하는 게 끝나서 그런 걸 지도 모르겠다. 여전히 해야 할 것들은 너무도 많지만 그럭저럭 잘하고 있어. 오히려 너무 시간이 질질 끌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하고.
결혼을 하게 되면, 아이를 낳게 되면 지금까지 발견하지 못했던 새로운 모습들을 발견한다고 하는데, 왜인지 나는 벌써부터 새로운 내 모습을 많이 발견하게 돼. 한 단어로 정의하자면... 내가 굉장히 '하남자'구나 싶다는 생각이야. 하남자가 무엇인지 무어라 정의하기는 어렵겠지만 괜히 그런 거 있잖아. 찌질하고, 속좁고, 이기적이고, 내로남불이고 하는 모습들. 어쩜 그렇게 하나도 빠짐없이 하남자의 요건을 잘 갖춘 사람인지. chat gpt에게 "한국에 있는 전형적인 하남자를 표현해 줘"라고 말하면 "임상묵"이라고 대답할 것 같은 그런 내 모습을 마주하게 돼.
예전 같았으면 나의 하남자스러운 스토리를 자랑스럽게 적어놓았겠지? 솔직함이라는 이름 아래에 그냥 나는 이런 사람이라고, 나 이렇게 솔직한 사람이라고 가장 가증스럽고 불쌍한 표현들을 그러모아 나를 소개했을 거야. 그리고 사람들이 "상묵이는 이렇게 솔직한 사람이고, 마주할 용기가 있는 사람이구나 멋져!"라는 말을 들으며 자위하고 싶었겠지. 지금도 어쩌면 그런 글을 쓰고 있는 게 아닐까 의심하고 또 의심하게 돼. 지우려고 해도 지워지지 않는, 흰 옷에 이미 배어버린 빨간 양념 같은 내 모습이라고 생각해. 이미 물들어진 내 모습을 조금씩 지우기 위해서, 그리고 조금이라도 내 체면을 지키고 싶어서 구태여 솔직하게 나의 하남자스러움을 나열하진 않을게.
어릴 적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고 싶었어. 어떤 남자들이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을까 항상 고심했고, 조금 커서는 내가 어떻게 해야 여자들을 꼬실수 있을까 궁금했으며, 또 어떤 날에는 왜 인간은 한 사람만을 사랑해야 하는가 하는 철학적인 질문을 던지기도 했었어. 내가 일부다처제였으면 합법적으로 여러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거 아닌가? 하는 분수에 모르는 생각을 하기도 했었고.(사실 일부다처제로 인해 지금 그나마 결혼이라도 하는 것이겠지만) 지금 와서 하는 부끄러운 소리지만 연애 못하고 있는 남자애들끼리 지하 단칸방에 모여서 "너의 장점은 이거야. 그러니 이걸로 잘 살려서 여자를 꼬셔보도록 하자"라며 되도 않는 연애 컨설팅을 서로 주고받기도 했었지. 이제야 웃으면서 하는 안주거리지만 그때는 그만큼 진심이기도 했어.
30대가 되어서야 비로소 조금은 허리를 곧추세워 살아가는 것 같아. 물론 여전히 휘청이기를 반복하지만, 적어도 하남자인 나를 마주하고, 애써 상남자가 되려고 애쓰지 않는달까. (근데 생각해 보면 남자들이 말하는 완전 상남자네!! 할 때 그 상남자. 여자한테 인기 많을 것 같진 않은데 말이야) 그저 와 나 진짜 하남자네... 생각하고 개탄스러워하면서도, 와 글 쓸 주제 생겼다 하면서 기뻐하는 정도랄까. 저 좀 봐주세요! 하는 호외를 하지도 않고, 하남자를 인정하는 하남자는 최하남자는 아닐 것이다... 하는 생각에 빠지기도 하고 그렇단 말이지. 중요한 건 내가 상남자냐, 중남자냐, 하남자냐, 최하냐 이런 맥락이 아니라 그냥 이렇게 받아들이고, 애써서 나를 포장하려 들지 않는 내 모습들이 꽤 자연스럽다는 거야. 남들이 보기에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나는 그래. 이런 모습들 꽤 자연스러워서 좋아. 아이러니하지만 슬프기도 하고.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세상의 많은 고민들과 현실의 암담함을 마주하다 보니 그런 걸까? 그러니까 여자들의 관심 따위는, 내가 상남자인지 하남자 따위는 중요하지 않은. 오로지 우리가 생각해야 할 건 커리어와 높아지는 집값 속에서 내가 어떻게 내 집마련을 할 수 있는 건가 하는 현실적인 생각을 앞세우다 보니 내가 중요하게 여겼던 그것들이 하찮아진 걸까? 아니면 그냥 이제 결혼할 사람 생겼으니 그런 고민들이 무의미하다고 느껴지는 걸까? 어느 쪽이더라도 자연스럽겠지만 또 한편으로 슬프기도 해. 과거에 타인의 관심과 사랑에 얽매이던 나. 지금이라고 크게 다르겠냐만... 그래도 그때 모습 꽤 순수한 것 같기도 하거든. 남들은 뭐라 해도, 나는 최소한 사랑받고 싶어 뜨거워져봤던 연탄이었던 것 같거든. 그래서 내 과거를 함부로 발로 차고 싶지는 않아. 지금의 나 한 번이라도 뜨거워봤냐고 하면 그건 아니니까.
이러지도 저리지도 못하는. 역설적인 내 모습을 또다시 글로 적으니까 정말 하남자스럽긴 하다. 어떻게 글을 맺어야 좋을지 생각해 봤는데 마땅히 좋은 아이디어가 없어, 내 특기를 빌려 마무리 지어볼게. 나 생각보다 삼행시 잘하거든. 언젠가 회식자리에서 상사가 장기자랑 시키면 써먹어보려고 트레이닝했던 건데, 이게 이렇게 도움이 되기도 하네
하 : 하릴없이 지나간 시간을 다시 생각해 보는 요즘이야. 나는 그 시간 영원할 줄 알았거든.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는 말을 철석같이 믿었어. 아니야 사람은 변해. 늘 좋은 모습으로 변하는 게 아니라 그렇지. 시간이 흐르고 모든 게 변한 뒤
남 : 겨진 건 나이를 먹고 심심해진 내 모습이더라고. 그렇게 우스꽝스러웠던 과거의 내 모습이 이제는 부럽기도 하단 말이야. 아 그래도 그때 참 뜨거웠지. 청춘이었지 하면서. 이제라도 그렇게 살면 되지 않냐고?
자 : 자신 없어. 뭐랄까 이제 그러고 싶지 않아지기도 했고, 그럴 용기도 없어. 그냥 이제 어른이 된 거라면서, 나 그렇게 대단한 사람 아니라면서 안주하고 있는 내 모습을 받아들이는 척할 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