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움을 견뎌본 적도 그래서 끝내 고독한 채로 지내본 적도 없는 인간에게
이사 온 방엔 인터넷이 없다. 휴대폰에 깔린 메신저와 SNS를 모두 지웠다. 여덟 권의 시집과 세 권의 소설, 두 권의 에세이를 가지고 왔다. 아침에 눈을 뜨면 물로 입을 헹구고 바나나 하나와 계란 하나를 먹는다. 창문을 조금 열고 밤사이 후덥지근해진 방 안의 공기를 밖으로 내몬다. 무릎을 꿇고 물걸레질을 한다. 거기까지 했으면 모종의 의식은 끝이 난다. 이제 나갈 준비를 하거나 다시 침대에 들어가면 된다. 그저께는 밤새 영화를 봤다. 어제는 책상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공부를 하고, 편지를 썼다. 나는 여전히 편지를 쓴다. 보낸 편지의 대부분은 답장이 오지 않았다. 애초에 보낸 적 없는 편지가 더 많다. 그런 글들은 꼭 분실물 같아 한구석에 보관해둔다. 오늘은 사람이 많은 거리까지 걸어 나왔다. 나 아닌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보기 좋은 풍경 속으로 숨고 싶었다. 카페에 들어와 커피와 샌드위치를 주문했다.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수많은 관계 중 내가 속한 곳은 없었다. 사라지기에 더없이 좋았다.
"난생처음 느껴보는 고립감"이라고 적고 혼자 웃는다. 번번이 '처음'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고 싶은 건 그게 순전 '고립-감'이라는 감정이라. 실제로 고립된 상황도 아니면서 고립-감이라니. 지금 이 공간에 나 말고 아홉의 사람들이 숨을 쉬고 글을 쓰고 책을 읽고 수다를 떠는데, 고립이라니. 소모임을 검색하면 나오는 독서모임, 영화모임, 글쓰기 모임, 친목모임, 등산 모임... 셀 수가 없이 많은데, 고립이라니. 자신의 선택을 두고 스스로의 의지가 아니었다 덧붙인다면 그야말로 자기 자신으로부터 고립된 사람의 견해겠다. 외로움은 인간을 추잡하게 만들고, 고독함은 인간을 고고하게 만드는데. 내가 외로웠는지, 고독했는지는 시간이 지나 봐야 알 수 있을 뿐이다. 이름을 달고 나온 감정은 없다. 특히 불안과 결을 같이하는 감정일수록 우리는 어떻게든 설명하고 싶은데 그게 어려우니 이름이라도 뭉뚱그려 붙여놓으려 한다. 이런 류의 감정은 아무리 겪어도 익숙해지지 않고, 매번 두렵겠지. 사실 그렇게 사랑했던 적도 없으면서 온 생을 걸었다고 말하는 애인들도 마찬가지. 이번은 정말 다르다는 항변은 모두 '첫-'이 부리는 수작이다. 그를 끌어안은 단어들은 죄다 유난스럽다.
어느새 차게 식은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켠다. 여전히 맛이 좋다. 당분간은 이렇게 있고 싶다. 언제 돌아올 거냐는 당신의 물음에 "무엇이든 시작하게 될 때"라고 답했다. 하루를 살아도 온전히 살아보고 싶다는 욕망. 여기까지 왔다. 고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