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나를 마주한 날
이야기에 앞서 배경 설명을 드리자면 나는 꾸준히 일기를 써왔습니다. 일기는 주로 편지글 형식이었고, 수신인은 나 자신이었어요. '사랑하는 연아'로 시작하는 무수한 편지들은 단 한 번도 부친 적 없었지만, 마찬가지로 단 한 번 누락된 적도 없었습니다. 넋 놓고 울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드는데 막상 얼굴은 건조하기 짝이 없을 때, 나는 그럴 때 편지의 수신인이 어디선가 울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네, 나는 지난밤 꿈에서 '나'를 만났습니다. 그곳은 드넓은 공원이었어요. 군데군데 풀이 우거졌고 적당한 간격으로 벤치가 놓인 곳이에요. 현실에서도 그곳을 여러 차례 들른 적 있었습니다. 저 멀리 내가 짙푸른 원피스에 카멜색 아우터를 걸치고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선선한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칼, 오후의 햇살, 잔디와 어우러진 한 사람의 인영이 너무도 아름다웠어요. 장면을 담아 건네고 싶어 카메라를 들었습니다. 처음엔 저건 나니까 별개의 존재로 인식하지 않았고 내가 조종하고 있는 혹은 내 역할을 수행하는 한 인물 정도로 여겼습니다. 속으로 멈추라고 말하면 당연히 멈출 것이라 예상했지요. 그런데 웬일입니까. 아무리 말해도 걸음을 계속하더군요. 심지어는 넘어지는 겁니다. 아, 그때 직감적으로 깨달았어요. 저건 진짜 나다. 어떤 부분이 아니라 여태껏 내가 보냈던 편지의 수신인이다. 서둘러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어느새 그녀는 테이블과 의자가 연결된 벤치에 앉아있었어요. 핸드폰을 보고 있었습니다. 테이블 위엔 종이와 펜이 있었어요. 나는 맞은편에 앉아 가만히 그 모습을 바라보았습니다. 내가 저런 얼굴이구나, 저런 선을 가졌구나, 생각하면서요. 연은 나보다 훨씬 앳되보이기도 했다가 어느 때엔 세월이 지긋하게 묻은 노년의 여성 같기도 했습니다. 좀처럼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웠어요. 하지만 그를 둘러싼 분위기는 참 맑았습니다. 연은 휴대폰을 보다가 때때로 웃었고 나는 굳이 내게 신경 쓰지 않아도 소외감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마냥 신기했거든요. 그러다 내가 연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아마도 직전에 꾼 꿈 이야기였을 겁니다. A와 X라는 인물이 나온 사랑 이야기요. 말문을 열자 연은 그제야 핸드폰을 내려놓고 나를 바라보았습니다. 우린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생동감 있게 움직이는 연을 보면서 나는 또 속으로 여러 차례 놀랐습니다. 내가 말할 때 저런 표정을 짓는구나, 웃을 때 저렇게 웃는구나, 신기했어요. 그를 둘러싼 맑은 공기에 나까지 정화되는 기분이었습니다.
점차 꿈에서 깨어났습니다. 느리게 두 눈을 꿈뻑이며 장면을 되새겼어요. 어쩐지 나 자신을 만났다는 게 조금은 섬뜩할 수도 있었지만 꼭 그렇진 않았어요. 연은 내가 익숙한지 너무도 편안해 보였고 우리는 종종 공원에서 만난 게 틀림없습니다. 뭐였을까요. 다른 차원의 나였을까, 영혼이었을까, 신이었을까. 무엇이 되었든 육신의 나는 그의 반도 미치지 못했습니다. 나도 조금은 맑게 살아가고 싶습니다. 모쪼록 편지는 잘 도착한 것 같으니 다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