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유의 시공간을 창조하는 슬에게,
"기타를 챙겨도 될까. 들려주고 싶은 노래가 있는데." "좋아. 우선 아무데나 가보자." 네가 들려주겠다는 곡은 입문자들의 대표곡. 해변에나 어울릴법한 동요를 틀린 가사로 꼭꼭 불러내는 너는 어찌나 사랑스러운 사람인지. 나는 줄 한 번 튕기지 않을 우쿨렐레를 챙겨갔다. 곁에 두면 감성을 한 스푼 더해줄 수 있겠거니 해서. 음악을 듣고, 연주하고, 부르고, 춤을 추고, 눈을 붙이고, 이야기를 하고, 솔나무가 흔들리는 것을 보고, 그 옆으로 천천히 해는 내려가고 있었다. 잊지 못하겠지. 우리가 머문 곳은 주소 한 줄 간신히 있는 성벽. 모르는 이에게 설명할 수도 없는 언덕. 이런 것들만이 우리의 취향이 될 수 있었다.
나는 주소뿐인 작은 언덕을 사랑해,라고 생각했다. 언젠가 친구와 쉬어갔던 부안의 호수와, 임실의 샛길에서도 내 취향을 확신했었다. 오늘에 와 생각해보니 그때의 행복은 조금 다른 이름을 가졌더랬다. 나는 사랑하는 이들과 보내는 말없는 시간을 사랑해. 너와 함께여서 이 곳이 이름 없이도 좋아졌어. 이것이 보다 명확한 나의 취향. 최고의 카페는 우리 동네 갓길에 세워둔 차 안이잖아. 그렇지?
아가, 취업의 다음 단계가 사랑이라면 사랑의 다음 단계는 어디가 될까. 끝이 있는 고민일까. 언제까지 성취만이 행복이 돼야만 할까. 우리는 이 수레바퀴 밖으로 벗어나는 노력을 해야 한단다. 네가 좋은 직업을 가졌고, 내가 오랜 애인이 있다는 것이 모두 관문 밖의 일이어야 해. 우리는 다만 우리의 속도대로, 우리의 온도와 색깔대로. 그렇게 고집스럽게 살아가야 해. 그래야만 끝까지 행복할 수 있어. 나는 너와의 풍류를 위해 필사적으로 이 작은 평화를 지켜낼 거야. 우울을 몰아내고 기운을 차릴 거라고. 이번 인생은 그 정도로도 충분하니까. 아가, 오늘 하루를 두고두고 기억해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