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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평균율 Apr 07. 2023

Sibelius, Again

Batiashvilli, Vähälä, Vänskä, 그리고 서울시향


지난여름 "고잉홈 프로젝트"가 지휘자 없이 연주한 The Rite of Spring 격동 이후로 한동안 음악당을 못 가다가, 지난 한 달여 사이, 노부스 사중중단의 베토벤 전곡 시리즈 마지막 공연, 정명훈과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의 브람스, 그리고 서울시향의 시벨리우스 시리즈를 쫓아다니는 기염을 토하였다. 내 인생, 연주회를 이리 열심히 다닌 적이 있었나 싶다. 자주 접하지 못하는 대형 작품들 한꺼번에 몰리다 보니, 이런저런 새로운 것들이 보이고 들리는 것도 즐거웠고, 심심치 않게 마주하는 실수들도 나름 생동감을 더해 주곤 했다.


노부스는 마지막 작품으로 선택한 Op. 130 작곡자의 원래 의도대로 마지막 악장으로 Gross Fugue를 사용하였는데, 무언가 이 한 작품에 올인을 한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지만, 그래도 워낙 오랜만에 현장에서 듣는 작품인지라 무척 감사다. 정명훈과 드레스덴에게는 약간은 실망한 편이지만, 워낙 거대한 명성을 감안하면 그렇다는 이야기이고, 특히 브람스 3번, 4번인데 더 이상 무슨 할 말이 있으랴. 그리고 3번의 연주에 대해서는 별다른 불만이 없기도 다.




가장 최근 두 공연은 둘 다 벤스케(Osmo Vänskä) 이끄는 서울시향의 시벨리우스 공연이었는데, 특이하게도 바이올린 협주곡을 첫 공연에서는 통상적으로 듣는 1905년 버전을, 그리고 두 번째 공연에서는 1904년 초연에 올려졌었다는 오리지널 버전을 한 주를 사이에 두고 연달아 연주하는 구성이었다. 오리지널 버전을 공연할 수 있도록 30여 년 전에 시벨리우스 재단을 설득한 것이 애초에 벤스케였다고 하니, 이번을 마지막으로 서울시향을 떠나는 그에게 그만큼 더 의미 있는 기획이었던 것 같다.


롯데 콘서트홀에서의 첫 공연에서는 이번에 처음 내한했다는 바티아슈빌리(Lisa Batiashvili)의 바이올린이었으니 3년 반 만의 해외 출장 직전이라 마음의 여유가 없었음에도 안 가볼 수 없었다. 예술의 전당에서의 두 번째 공연에서 베할라(Elina Vähälä)라는 핀란드의 대표적인 바이올리니스트가 연주하는 들어본 적 없는 오리지널 버전 인데다가, 심지어 후반부는 심포니 No. 2 이였으니 이 역시 어찌 그냥 넘어가겠나. 출장에서 돌아오는 일정이 다행히 이른 오후라, 집에 도착해서 짐 풀고 대충 허기만 달래고 음악당으로 날아갔다.  


이 두 공연을 연달아 볼 수 있어 여러모로 좋았던 것이, 공연장도 다르고 솔로이스트도 다르지만, 작곡가와 지휘자와 악단이 동일하고 특히 같은 콘체르토의 두 다른 버전을 연주하는 계획이다 보니, 양쪽을 비교하는 것이 상당히 흥미로왔다. 


일단, 처음 들어본 오리지널 버전의 연주를 시벨리우스 가문에서 왜 극도로 허락해 주지 않는지 금방 이해가 되었다. 1904년 초연이 성공적이지 않았던 것이, 이도 문제에다 솔로이스트를 잘못 구한 것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있었는데, 이보다는 오케스트레이션이 상대적으로 설 익은 것에 가까웠다 싶다. 1905년 버전에서는 솔로의 난이도를 조절했다는 말 역시 솔로 파트가 과하게 두드러지는 것을 수정하면서 생긴 곁가지에 불과한 이야기로 보인다. 이상적인 협주곡의 모습이 아닌 솔로에 협력하는 관현악 반주에 가까웠다는, 그리고 더구나 그 관현악 파트 자체가 너무 성글었다는 더 근원적인 문제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시벨리우스가 1년에 걸쳐 수정하여 만들어낸 것이 1905년에 발표한 지금의 버전이고, 이렇게 완성된 형태의 협주곡은 솔로와 오케스트라의 균형이 엄청 잘 잡힌, 그래서 베토벤이나 브람스의 콘체르토에서나 들리는 그런 깊은 조화가 있는 곡이. 이제 와서 굳이 1904년 버전의 연주를 제한적으로 허락을 하는 것은, 그 역사를 보존하기 위해서, 특히 이 명작의 탄생이 어떤 과정을 통해 이루어졌는지를 궁금해할 덕후들을 위한 팬 서비스에 가까운 듯하다. 그래서 아주 소수의 핀란드 음악가 혹은 교향악단들에게만 허용을 하는 모양이다.


이번에 알게 된 베할라의 연주는 전혀 나무랄 데 없이 훌륭했는데, 물론 간간히 들어 있는 뜬금없는 솔로 아크로바틱에 현타가 밀려오기도 했지만, 이거야 미완성에 가까웠던 1904년 버전의 문제일 뿐이다. 그의 완성본 연주가 오히려 기대되어 유튜브에서 찾아보니, 벤스케 지휘로 연주된 도쿄 실황이 있긴 한데, 음질이 많이 소심하다. 이번 시벨리우스 시리즈가 서울 시향에서의 벤스케의 사실상 마지막 임무였던 것이 그래서 더욱 아쉽다. 


바티아슈빌리의 경우 삑사리를 포함하여 여러 차례 묘한 소리들이 들려서, 긴 항공 여행으로 컨디션 난조인가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다만, 그의 거침없는 스타일은 CD에서 듣던 것보다 훨씬 더 매력적이었고, 특히 그의 1739년 과르네리(Guarneri del Gesu)와 베할라의 1780년 과다니니(Giovanni Battista Guadagnini) 두 바이올린은 그 소리의 질감 차이가 명료했는데, 언제나 그렇듯 깊고 어두운 소리를 내는 과르네리가 시벨리우스에는 적격이라는 생각을 다시 한번 하게 된다. 베할라의 손에 과르네리가 주어지면, 어떤 소리가 들릴지도 매우 궁금해진다.


관현악곡을 직관하는 것은 단순히 현장의 소리에서 느낄 수 있는 생동감 때문 만은 아다. 이런 대편성 곡들의 경우 작가처럼 평범한 청각을 가진 사람들이 듣기만 해서는 쉽게 놓치는 것들을 준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의 적절한 용례가 아님에도 "문"의 의미를 조금만 왜곡하면 그지없이 찰떡이다.


심포니 2번 2악장 도입부에서 베이스와 첼로가 차례로 들어오며 피지카토로 목관들의 테마를 끌어는 것을 왜 이번에는 특히 그리 눈에 띄었는지 모르겠다. 그러다 보니, 바이올린 섹션의 상대적인 한가함이 계속 눈에 들어오고, 시벨리우스의 어둡고 동시에 피를 끓게 하는 그 리듬이 어디서 나오는지가 눈에 보다. 관현악을 직관하며 가장 많은 정보를 얻게 되는 것이 목관들이다. 시벨리우스 역시 브람스만큼이나 목관의 사용에 능란했다고 생각되는데, 역시 심포니 2번 2악장에서 테마를 끌고 나오는 오보에의 처연함이 돋보였다. 원래 두 대의 바순에 의해 시작되고 나중에 오보에가 이어받는 테마인데, 왜 그런지 기억에는 오보에만 남아 있다. 일정에 밀려 급하게 음악당을 찾아간 후유증인가? 하여튼 커튼콜에서 우레와 같은 환호를 받은 그 오보에 연주자가 궁금해진다.




개인적으로는 이번 시벨리우스 공연 관람의 최대 수확은 사실 서울시향을 발견한 것이다. 이렇게 오래된 악단을 발견했다는 말 자체가 나의 게으름을 고백하는 것 이겠지만, 정명훈 씨가 음악감독을 하던 당시엔 삶이 바빠 기회가 없었고,  이후에는 그의 사임을 둘러싼 잡음이 불쾌해 관심을 두기 어려웠다. 근엔 가까운 예술의 전당이 주무대인 KBS관현악단을 위주로 다녔고, 롯데 콘서트홀이 주무대인 서울시향을 만날 기회가 없었다. 정명훈 씨가 떠난 이후 한동안 객원 시스템으로 끌고 오다 보니 음색이 조금 무너졌다는 말도 들리긴 했고, 벤스케의 부임 직후 코로나가 터지는 통에 제대로 활동을 못하다가 이제 본격적으로 연주를 시작한 지 1년여.... 그나마 벤스케의 낙상으로 지난겨울부터 원활하지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번에 직관한 서울 시향은 내게는 국내 어느 대형 관현악단보다 훨씬 더 역동적이고 기본에 충실한 모습으로 다가왔다. 벤스케의 열정적인 지휘 못지않게 눈에 띄게 이에 즉각 반응해 주는 악단의 모습을 엿볼 수 있었고, 몇몇 멤버들의 몰입과 열정이 느껴질 정도였다. 더구나 이번에 반 베덴(Jaap van Zweden)이라는 거물을 음악 감독으로 유치하는 데 성공한 이면에는 그동안 부침이 많았던 이 악단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이 다시 시작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정명훈 씨가 물러나던 과정에서 들리던 "혈세"이야기 역시 결국은 그가 한국인(출신)이기 때문에 조금 더 소란스러웠던 것으로 추측하는데, 아마도 언론의 시대착오적인 시각으로 인해 작은 문제가 뻥튀기가 된 것은 사실이 아닐까 한다. 서울은 이제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세계에서도 손꼽힐 만한 그런 도시가 되어 있고, 그 도시의 이름을 걸고 활동하는 제대로 된 악단이 하나쯤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다행히 반 츠베덴의 경우 뉴욕필의 음악감독이라는 누가 보기에도 대단한 역할을, 그것도 성공적으로 끝내고 오는 상황이니 한동안은 "혈세" 이야기는 나오지 않을 것으로 기대해 본다. 요즘은 국내리그 야구선수도 연봉 수십억이 되는 시대이니...


(당시 송사에 휘말린 양측의 인물들이 지난 몇 년 사이에 거의 대부분 불기소 혹은 무죄가 된 것 역시, 이런 고풍스러운 기관에 있는 분들조차 고소와 고발, 그리고 언론에의 제보를 분쟁의 도구로 사용하는 흔한 모습을 보여준 것이 아닐까? 물론 그 근저에는 사회의 상층부에 있다는 인물들이 스스로 부끄러워하는 것을 찾아볼 수 없다는 면도 없지 않았으리라. 최소한의 규범을 논하는 재판에서 지지 않으면 그것이 곧 면죄부라고 생각하는, 아주 나쁜 의미로 "법치 국가"가 되어가고 있는 이 사회의 모습이 과연 고쳐질 수 있을지...)


벤스케의 낙상으로 인해 반 츠베덴의 도착이 사실상 반년정도 앞당겨지는 모양이다. 작가의 최애 심포니인 베토벤 7번에 크게 즐기지 않는 차이코프스키의 4번으로 7월에 포문을 여는 모양인데, 이미 거의 완판이라 내 인생 처음으로 R석을 사야 하나 고민 중이다.   




한편, 브람스 공연을 듣던 자리가 어쩌다 보니 3층 좌측 구석의 난간 바로 앞 좌석이었는데, 드레스덴이 원래 그런 것인지 특이하게 지휘자 기준으로 좌측에 위치한 첼로/베이스 섹션 와 일부 목관, 우측 바이올린 파트도 절반 이상, 그리고 당연히 지휘자까지 통째로 보이지 않는 상황이었다. 이런 곳엔 시야방해석이라는 이름을 붙여 예매 시에 미리 친절하게 경고를 주는 타 공연장과 대비되는 것도 좀 아쉬웠는데, 전반부에 지휘자까지 만이라도 보겠다는 일념으로 늙고 굳은 척추를 세웠다가, 자리 안내하는 젊은 양반에게 지적을 당하는 수모를 격기까지...


나중에 그곳 홈페이지를 찾아보다가 등받이에 "반드시" 등을 붙이고 관람을 하라는 안내가 떡하니 게시되어 있어 심히 당황하긴 했다. 연주 중에 돌아다니지 말라거나, 핸드폰 쓰지 말라고 친절하게 써 놓은 사이 어딘가에... 뒷자리 시야 문제란다. (음... 어... 제 시야는요?) 안전 문제도 아닌데 앉는 자세까지 강제할 일인가 싶기도 하고, 특히 아직도 청중들을 "예절"을 가르쳐야 할 대상으로 생각하는 게 아닐까 싶어 씁쓸했다. 근데, 뭐 어쩌겠나. 방한하는 유럽의 유명 관현악단이라면 당연한 그 자리 값에 쫄아서, 몇 남지 않은 C석을 산 내 잘못이지. 하지만, 이젠 굳이 이런 비싼 관현악단 들으러 안 다녀도 되겠다. 앞으로 내게는 서울시향도 있을 터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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