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잉홈 프로젝트는 외국 유수의 교향악단에서 활동하는 한국인 연주자들의 여름 비수기 귀향이 주축이 되는, 그래서 1년에 단 며칠만 공연이 가능한 그런 구조의 악단이다. 어쩌다 늦게 발견한 작년과는 달리 올해는 충분히 미리 찾아보다 보니 1층 R석을 일지감치 구할 수 있었는데, 그렇게 무대와평행한 시선에서 보는, 90명에 가까운 연주자들이 빼곡하게 운집한 무대는 더욱 장관이었다.
작가와는 적게도 20년 가까운 세월의 차이를 둔 이들, 고전 음악의 본산인 서구의 땅에서 수석으로, 악장으로, 그리고 더없이 외로울 독주자로서, 개척자의 삶을 살고 있는 이들이 잠깐이나마 고향에 돌아와 들려주는 그 소리들이 감격스러워 주책맞게 잠시 울컥하기까지 했다. 젊은 시절, 가장 많은 것이 불투명했던 그 시기에 역시 10년 넘게 외국 생활을 했던 내게, 그들 하나하나가 가지고 있을 이야기들이 들리는 듯했던 모양이다.
이 관현악단은 대개 지휘자를 세우지 않고 연주를 하는데, 그러다 보니 모든 연주자들이 작품의 Score 즉 모든 파트가 다 표시된 총보를 숙지할 수밖에 없다. 물론 수석들의 역할이 중요하겠지만, 그나마 전체 인원의 절반정도를 차지하는 현 섹션들의 이야기이다. 관악기, 타악기들의 경우 길건 짧건 혼자 끌고 가야 하는 경우가 적지 않아, 결국 개개인이 책임지는 모든 부분이 완벽히 유기적으로 움직이지 않으면 불가능한 방식이다.
그럼에도 이들은 관악기, 타악기들이 총동원되는 그런 작품을 고르는데 주저함이 없다. 아니 어쩌면 모든 파트가 도드라지는 그런 곡들을 일부러 선곡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볼레로 더 갈라"라는 공연이 둘째 날 있었다. 여러 콘체르토들을 한 악장 씩 10여 곡 연달아 연주하면서 악기의 수를 늘려나가는, 볼레로에서 반복된 테마 속에 악기를 쌓아가듯이 하는 공연인데, 협연 솔로는 단원 중 하나가 그 자리에서 일어나서 하는 형식이다. 이 "볼레로 더 갈라" 이야기를 하면서 손열음 씨가 말한 “단원 하나하나가 얼마나 잘하는지 보여주려면 이 방법 밖에 없었다”가 어쩌면 다른 선곡에서도 유효한 게 아닐까 한다.
작년 "봄의 제전"을 목관과 팀파니 뒤편, 오른편 윙에서 내려다보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얼마나 많은 종류의 목관들이 줄지어 이어받는지였다. 당시까지만 해도 있는지도 모르던 몇몇 목관들의 소리를 처음으로 인지하게 된 계기이기도 하다. 올해의 선곡 역시 개개의 연주자들을 최대한 자랑하자는 원칙을 고수하면서 정한 게 아닌가 싶다.
사실 교향악단을 흔히 관현악단이라고도 부르지만, 고전주의 작품들에서는 "현"이 끌고 가는 테마에 목관, 금관, 그리고 팀파니가 양념을 뿌려주는 정도로 들어오는 경우가 적지 않은데, 작년에 이어 이번에도 이 악단은 마치 관악기 연주자들을 자랑하러 나온 듯하다. 이 악단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2018년도 대관령 음악제의 평창 페스티벌 오케스트라 당시에도 음악 감독 손열음이 유독 목관과 금관에 대한 특별한 자부심을 보인 기억이 있다.
작년 초연에서 20세기 초반 러시아의 소리를 가져왔다면, 이번엔 미국의 소리 그리고 그 신세계에서 향수병에 걸린 보헤미안의 소리를 몰고 왔다.
첫 공연첫 곡 Bernstein의 Symphonic Dances는 사실 처음으로 완곡을 한 경험이었는데, 주로 지휘자로만 알던 그의 작곡가로서의 진가가 다 드러난 작품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영화로 보았던, 그리고 그다지 공감을 못했던 뮤지컬 West Side Story가 20여분의 관현악으로 응축된 작품인데, Mambo에서 "Mambo"를 외치며 웃음을 감추지 못하는 연주자들의 모습이 활력 그 자체였다. 곡의 짜임새 역시 봄의 제전을 연상시킬 정도로 가득 찬 모습이었는데, 위에 이야기했듯이 어느 한 파트도 방관하지 않는, 말 그대로의 관현악곡이다. 금관들과 드럼을 포함한 온갖 타악기들의 활약이 두드러지는데, 이 악단이 아니었다면 국내에서는 현장에서 듣는 게 쉽지 않겠다 싶었다.
이 첫 곡을 뒤에서 있는 듯 없는 듯 반주해 주던 손열음 씨가 다음 Gershwin의 Rhapsody in Blue를 위해 쭈빗쭈빗 앞으로 나와 피아노 앞에 자리 잡으면, 클라리넷이 선전 포고를 하는 듯 한 그 유명한 도입부가 여기는 뉴욕이라고 외친다. 건반 위를 날아다니는 손열음은 이젠 워낙 익숙한 모습이지만, 조금 과하다 싶을 정도의, 무대를 씹어 먹고야 말겠다고 나선 클라리넷이 피아노와 맞짱을 뜨는 그 모습은 청중으로서 그저 즐거울 뿐이었다. 평소 같았다면피아노가 멱살 잡고 끌고 갔을 그 곡, 게다가 그 피아노가 손열음인데도 불고하고, 이날 연주에서 뉴욕필의 수석인 조인혁의 존재감은 그렇게 남달랐다.
랩소디 인 블루에서도, 마지막 Dvorak 9번 교향곡에서도 이 첫날의 백미는 역시 단연 목관들이었다. 9번 2악장 Largo의 테마를 이끄는 잉글리시 호른 역시 언제나 그렇듯이 잊을 수 없다.Kleiber의브람스 4번 연주 이야기를 하면서, 그만큼 관악기를 제대로 쓴 고전주의 작곡가가 별로 없는 것 같다고 쓴 적이 있지만, 어쩌면 드보르작의 일부 후기 작품들은 이런 의미에선 브람스의 상위호환이 아닐까? 그의B단조 첼로 콘체르토를 듣고 회한의 탄식을 했다는 브람스의 아쉬움은 단지 첼로라는 솔로 악기 하나에 대한 것만은 아니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하지만 이에 못지않게 이날의 세곡 모두에서 온몸을 전율하게 하는, 특히 Bernstein에서는 조금은 절제되지 않았다 싶을 정도였던 자신감 충만한 금관들의 울림 역시 흔히 듣지 못하는 경험이었다. 내겐 거의 항상 위태 위태하게 들리는, 최근 유수의 독일 악단 내한 공연에서도 삑사리를 못 피한 그 금관들이 말이다. 모 칼럼니스트가 이 첫날 공연, 특히 Bernstein에 대해서 고삐 풀린 연주라는 표현을 쓰던데, 맞는 말이다.100명에 육박하는 대편성 오케스트라에서 즉흥 연주가 일상인 재즈밴드의 향기가 날 거라고 누가 상상을 했을까 싶다.
하지만, 이게 고삐 풀린 거면 다른 악단들도 좀 배워서 가끔은 연로하신 음악감독과 지휘자 분들 쉬시게 할 일이다.어쩌면, 수직적인 구조의 악단이 가진 당연한 장점들, 믿을 수 있음, 예상 가능한 소리, 그리고 효율을 가끔은 포기하고, 이들처럼 연주자 중심의 세션을 여름에라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앙코르가 일상화된 게 국내에서의 클래식 공연들이지만 이렇게 가득 채운 관현악 프로그램에 따로 앙코르를 준비했을 수는 없을 터이다. Dvorak 2악장을 다시 연주하는 흔치 않은 선택을 하였고, Largo의 시작을 이끄는 금관들의 장엄한 도입부에 다시 한번 전율을 느끼게 하지만조용히 잠들 듯 끝나는 가장 완벽한 앙코르이기도 했다.
손열음 음악감독 체제하에서의 대관령 음악제에서도 항상 느끼던 것이었지만, 프로그램을 가득 채우고자 하는 욕심에는 그를 따라올 사람이 많지 않을 듯하다.(Rach 1~4번에다 파가니니 광시곡까지, 단 한 명의 피아니스트를 데리고 하루 저녁 공연에 다 때려 넣겠다는, 무대에서 철인 3종 경기 한번 해 보자는 국내 모악단의프로그램이 눈에 띈 것은, 음... 모르는 척 하자.) 이번에 무려 15곡으로 이루어진 "더 갈라"에서 전반부에 호른 솔로이스트가짐작이 가능한 "건강상의 이유"로 나오지 못하게 되어 해당 작품이 공연 직전에 취소가 되는 일이 있었는데, 아쉽기는 해도 청중의 그 누구도 투덜거릴 상황은 전혀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 급박한 와중에 새로운 솔로이스트를 섭외하여 후반부에 기어이 다른 클라리넷 소품을 채워 넣는,그의 굳은 의지를 볼 수 있었다. 물론, 앙코르 없이 2시간 반을 훌쩍 넘긴 것은 덤이었다.
금요일에는 대관령 음악제에 예약이 되어 있다 보니, 체력의 한계로목요일의3일 차 마지막 공연은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사흘 연속 공연하는 젊은 그들이 있긴 하지만, 나흘 연속 흥분된 저녁 만으로도 이 저질 체력의 노구는 탈진에 가까워 질게 뻔하여...올해 연초조금 갑작스러워 보였던, 손열음을 떠나보낸 대관령 음악제가 궁금해져서 폐막 전에 한 공연이라도 보려고 무리를 한 내 잘못이다. 이번에 양쪽을 다녀온 결론은 내년에는 굳이 음악제 때문에 대관령을찾지 않아도 되겠다,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