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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평균율 Jun 26. 2024

Anthony Doerr

영화와 소설 (4): All The Light We Cannot See

(그림: St Malo, c.1900 by Emil Krause, via Wikipedia)


벌써 몇 달 전에 예고한 대로 한참 전에 발행 취소를 했던 글들을 하나 둘 다시 꺼내 손보고 있습니다. 아래는 아마도 그중에 가장 나중에 쓴 글인 것 같은데, 책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절망적인 시대상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서 조금씩 보이는 한 줄기 빛들이 요즘 제게 필요한 위로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여러분들에게도 위로가 되는 책이길 바랍니다.  




한동안 영 책을 멀리하다가 최근에 다시 읽기 시작하면서 Anthony Doerr라는 작가를 발견했는데, 그의 2014년 소설 All the light we cannot see라는 작품을 통해서였다. 실 최근의 베스트셀러들 중에는 마치 할리우드 영화로 만들어질 것을 염두에 두고 쓴 듯한 경우가 적지 않아 신작들을 멀리했던 것인데, 이런 소설들은 영화 2시간의 제약이 그대로 나타나곤 한다. 전체적으로 쉽게 읽히며, 글보다는 플롯에, 그리고 특히 반전에 중점이 두어 질 수밖에 없다. 이는 인물들의 설정에 깊이를 기대할 수 없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영어라는 언어는 단순하다. 구조적으로, 문법적으로 상당히 간결하다. 라틴어와 불어 등 주변의 유럽 언어들 영향으로 많은 어휘를 자랑한다지만, 실제로 흔히 사용되는, 예를 들어 일상의 언어나 소설류에서 사용되는 단어는 특별히 많지 않다. 동사와 특히 명사에 의하여 주로 전개되는 언어인데, 처음 배울 때 가장 어려운 것 중 하나는 "do," "make," "get"등의 비교적 단순한 동사들이 서로 다른 명사들을 만나 사용되는 수많은 의미들을 익히는 일이다. 단순한 어휘들의 조합이 혹은 오묘한 의미를 표현하는 그 모습이, 문학 매체로서 영어의 매력 중 하나이다.


새로 만난 Doerr의 은 첫 몇 페이지들, 첫 몇 개의 문장들 만으로도 영어라는 언어가 순한 어휘들 만으로 어떻게 깊은 여운을 남길 수 있는지 그 최대치를 보여주는 교과서와도 같았다. Poisonwood Bible 이후 이런 경험은 처음이다. 이제 그의 많지 않은 작품들을 차례차례 찾아다닐 모양이다.




1944년 여름 노르망디 상륙으로부터 두 달여 후, 유럽을 완전히 탈환하려는 연합군의 폭격, 포격에 의하여 대부분이 파괴되는 해안 도시 Saint-Malo에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폭격기 편대가 Saint-Malo에 접근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길지 않은 두 번째 단원에서의 다음 두 표현을 보자:


- Intercoms crackle. Deliberately, almost lazily, the bombers shed altitude.


- To the bombardiers, the walled city on its granite headland, drawing ever closer, looks like an unholy tooth, something black and dangerous, a final abscess to be lanced away.


여기 어느 하나의 단어도, 특별히 어렵거나 현란하지 않다. 폭탄 투하를 위해 천천히 고도를 낮추는 폭격기가 shed altitude라는 매우 단순한 조합에 의해 표현되는 그 간결함이 놀랍지 않은가? 파괴를 작정하고 도시에 접근하는 폭격기들, 그리고 그 조종사들의 두려우면서도 결의에 찬 마음들이 역시 이처럼 생생하게 다가올 수 없다;  사실은 그들 스스로가 파괴자이지만, 파괴의 대상인 도시를 unholy tooth와 abscess라는 두 짧고 명료한 표현을 통해 자신들을 정당화한다. 이쯤 되면 책을 손에서 놓기가 불가능해진다.


물론, 그 폭격의 대상 단순히 해안가의 독일군 요새들 뿐 일리는 없다. 유럽의 흔한 도시들처럼 작은 이 도시의 전체를 폭격하는 것이 그들의 임무이고, 실제로 당시 이 도시의 90% 가까이가 파괴되었다고 한다. 그 도시 어딘가 홀로 남겨진, 눈이 보이지 않는 소녀의 모습을 바로 이어서 보여주는데,


- In a corner of the city, inside a tall, narrow house at Number 4 rue Vauborel, on the sixth and highest floor, a sightless sixteen-year-old named Marie-Laure LeBlanc kneels over a low table covered entirely with a model.


당연히도 그녀는 unholy tooth와도, abscess와도 거리가 먼 존재이다. 그리고 이 도시에는 그녀를 찾아온, 혹은 찾아야만 하는 두 명의 독일군이 각자 도착해 있었고, 작가는 그 10년 이전으로 돌아가 왜 이들이 이 작은 해안의 휴양도시에 모이게 되었는지를, 현재와 과거를 오가, 특유의 정제되고 깊이 있는 필체로 담담하게 이야기해 준다.




사실 이 책의 내용에 대하여는 긴 이야기를 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 어떤 칭찬도, 이 찬란한 이야기에 비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냥 읽어 보아야 한다고 강권할 수밖에 없는 그런 소설이다.


굳이 무언가 이야기를 한다면, 소설의 가장 중요한 소재인 라디오에 대한 것 어떨까 한다. 초반 어딘가에 쓰여 있던, 나치가 독일을 선동하고 2차 대전까지 이끌 수 있었던 데에는 라디오의 힘이 결정적이었다는, 나치의 대표적인 선동가 Goebbels의 말에 흠칫 놀랐던 기억이 아직 생생하다. 1차 대전과 2차 대전 사이의 라디오는 지금으로 치면 인터넷이나 스마트폰만큼이나 새로운 문명의 이기였을 터인데, 이 라디오를 통한 독일 국민에의 선전 선동이 어떤 결과를 만들어 냈는지를 돌아보면서 나도 모르게 소름이 돋았던 것이다. 이 마술 같은 기계가 주는 신비감이 덧씌워지면서 나치의 선동이 증폭되고 온 나라로 퍼지는 그 상황, 그리고 그 위로 유럽 사람들 중에 특히 순진한 느낌을 주는 독일인들의 모습이 중첩되면서 당시 독일이라는 나라가 왜 그렇게까지 흘러갔는지 그 상황의 일부나마 볼 수 있었다고 할까?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생각보다 많이 순진하다. 착하다는 이야기가 아니고, 남의 이야기를 받아들이는 데 있어 꽤나 무방비 상태라는 말이다. 민족주의, 사회주의, 혹은 자본주의 등의 짧은 단어에 실려있는 묵직한 이데올로기를 큰 생각 없이 받아들이고 마치 자기 것인 양 흔히 착각한다. 이 시대의 단파 라디오인 Youtube에 넘쳐나는 국내의 정치/평론/국뽕 채널들이 각기 열심히 좌우에서 돈을 그러모으고 있는 현재 상황이 중첩되어 보이는 것이 나만의 과도한 연상일까?


하지만, 이 무도한 비극의 매개체이었던 라디오가 한편으로는 어떻게 인의 인생 깊숙이 들어와서 을 바꾸어 놓았는지 보여주는 것이 이 소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Werner가 고아원의 숙명을 탈출하게 해 준 고마운 수단이었지만, 무고한 모자를 죽게 한 원인이기도 했으며, 스스로의 죄를 씻을 수 있는 유일하게 남은 기회이기도 했다.  레지스탕스의 라디오 시그널을 찾아 Saint-Malo까지 왔지만, Etienne과 Marie-Laure의 단파 방송을 듣고 이내 자신의 목숨을 걸고서라도 생면부지의 그들을 지키기로 한다. 아마도 용기 내지 못했던 과거에 대한 참회였을 게다.




이 책을 다 읽고 인터넷 이곳저곳을 돌아보니 생각보다 많은 비판을 듣고 있는 모양이다. 가장 흔하게는 글이 너무 수사적이라는 것, 그리고 다른 한 가지는 2차 세계대전의 상황을 제대로 그려내고 평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말이 안 되는 말들이다.


첫 번째 종류의, 나름 문학적인 비판들의 경우, 이것저것 다 떼어내고 나면 결국은 "글이 너무 아름다워서 단숨에 읽기에 벅차다"는 말에 불과하지 않을까 싶다. 혹은, 한 단계 더 파고들자면 "나는 꿈에도 그렇게 쓰지 못하고, 문학 선생님께서 그렇게 안 써도 된다고 하셨는데, 너는 왜 그렇게까지 쓰냐?"는 말인 게다. 간혹 한국의 소위 장르 문학 작가들 중에는 기대하지 못한 수준 높은 글을 쓰는 작가들이 있는데, 이들 역시 일부 소비자들에게는 욕받이들이다. "나는 마징가 제트를 원했는데, 너의 글은 윤동주 같?" 수준의...  어디엔가 누군가가 써놓은 이 소설에 대한 불평 중에 기억에 남는 게 하나 있는데, 대략 종합하자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였다. 본인 스스로의 일상이 얼마나 텅 비어 있는지를 좀 돌아보고 이런 말을 했는지 모르겠다. 할리우드 스타일의 전쟁 영화나, 에르큘르 포아로가 나오는 추리소설이라도 상상하면서 이 책을 구입한 모양이다.


특히 두 번째 종류들은, 모든 글이 정치적 사회적 팸플렛이기를 원하는, 그냥 번지수를 잘못 찾아온 사람들의 괴변들이다. 2차 대전이라는 시대적 배경을 가지고 있으므로 당연히 홀로코스트를 이야기에 녹아내야 한다거나, 독일군들을 보통의 사람들처럼 묘사하면  안 된다거나 하는 수준의 말들 말이다. 연합군의 융단 폭격으로 파괴된 드레스덴의 이야기를 담았던 1960년대 반전소설 "Slaughterhouse Five" 에도 쏟아졌었을 비난인데, 물론 당시에는 인터넷이 없었으니 조금 더 제한적이었을 듯하다. 개인적으로 정말 신기한 것은 이런 수준의 말들이 쏟아내는 사람들이 보란 듯이 인터넷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소설에 퓰리처 상을 준 사람들의 어쩌면 당연한 안목을 칭찬하고 싶고, 조금 시간이 지나고 이런 쓸데없는 들이 걸러지고 나면, 누군가 나서서 노벨 문학상이라고 챙겨주어야 되지 않나 하고 혼자 생각을 했다. "상"이라는 이 사회의 전통을 별나게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리고 노벨 문학상 받은 작가들의 작품 역시 대부분은 좋아하지 않지만, 내겐 단 두 권의 예외가 있었다. 까뮈의 La Peste 그리고 샐린저의 The Catcher in the Rye이다. 전혀 결이 다른 이 두 작품들에서 느낄 수 있는 한 가지 동질감이 있는데, 뭐랄까... 절망의 끝에 살아남은, 한줄기 햇살 같은 것이다. 뜬금없이 노벨상 운운한 이유는, 이들 두 권의 책에서 느꼈던 그 따스함을 또다시 느낄 수 있게 해 준 아주 오랜만의 경험이었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시대가 휴지장처럼 소비해 버린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그 안에서도 빛이 되어준 소수에 대한 아름다운 이야기이기도 하다. 두 소년 소녀의 이야기이지만, 그들이 실제로 만나는 시간은 채 반나절도 되지 않는다. 폭격이 끝나가는 그 전장 속에서 소녀는 어쩔 수 없이 절망을 고하고, 소년은 그런 소녀를 구하기 위해 찾아온다. 그리고, 다시 각자의 길을 간다. LeBlanc 건물을 빠져나오면서 한 소녀의 결정에서도, 그 의미를 알지 못하는 소년의, 30년이 지나서야 알게 된, 그의 마지막 행동에서도 희망을 보았고 따듯한 위안을 받았다.


Marie-Laure, Etienne, Werner, Volkheimer 모두 이 극한의 상황에 떠밀리면서도 스스로를 잃어버리지 않은 인물들이다. 물 밀 듯 밀려오는 감동의 쓰나미는 아니겠지만, 간혹은 처절한 비극 사이에 보이는 이런 잔잔한 위안이 더 오래 마음에 남는다.




책의 아름다운 문장들이 어떻게 옮겨졌는지, 번역본이 살~짝 궁금하긴 한데, 굳이 들여다보진 않을 것 같다. 실망이 크게 다가올 라는 입견에... 다행히도 원문은 매우 짧은 단원 들로 이루어져 있다. 대부분 서너 쪽을 넘기지 않는다. 영어를 열심히 공부하는 들이라면, 특히 글로서의 영어를 배우고 싶다면, 작정하고 하루에 한 단원씩만 소화해 보아도 많은 것을 얻을 수 있겠다.


사실, 한국의 작가 중에도 이렇게 간결한 문장과 표현만으로도 상황을 단숨에 정리하는 능력자들이 없지 않은데, 내 생각에는 "칼의 노래," "남한산성"의 김훈 작가가 특히 독보적이다. 아직 그의 책을 못 읽었다면, 요즘도 간혹 보이는 그의 신문 기고를 찾아보아도 충분하다. 영어와 그 결이 많이 다른 한국어지만, 문학의 도구로서의 가능성은 이에 못지않다고 늘 생각해 왔다. 훈민정음이 만들어진지는 600년 가깝지만, 대중이 쓰고 읽기 시작한 지는 100년에 불과하다. 쓰고 읽힌 지 500년에 가까운 영어에 비하여 아직 더 많은 시간과, 더 많은 작가와, 더 많은 독자들이 필요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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