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받지 못할 글들의 조그만 어휘집>(유경, 2020) - 독해독 #4
*독해독이란?
'독립출판을 한 해준이 (독립출판의 편견에서 벗어나) 독립서점에서 만난 책 읽기'의 줄임말입니다.
남김
책을 다 읽지 않고 후기를 남기는 편이 아니지만, <이해받지 못할 글들의 조그만 어휘집>은 (이하 <이해받지>)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일러두기에서 유경은 원하는 어휘를 선택해 목차에 표시하여 읽어보라고 권유하기 때문이다. ‘생일’은 내 생일에, 바다 앞에서 ‘바다’와 ‘물결’을 읽을 것이다.
힌트
이 책에는 글 한 페이지를 채우는 마침표가 하나인 글 (‘ㄹ’)이 있고, 글 속에 글을 겹쳐놓기도 (‘거짓말’) 하며, 토론 녹취록(‘비판’), 희곡 지문(‘죽음’), 시(‘시간’) 등 각양각색의 글이 담겨있다. 어휘를 연결해 읽으면 재미있다. ‘데이트’를 읽었다면 다음에는 ‘폭력’과 같이 사회현상을 떠올리기도 하고, ‘타이밍’을 읽었다면 연애세포를 자극할 수도 있다. ‘청춘’ 다음 ‘늙어버린’과 같이 반대되는 단어를 읽거나 ‘어둠’ ‘죽음’을 읽으며 감정을 파고들 수도 있다. 그리고 ‘따뜻함’과 ‘온기’와 같이 조각난 어휘를 모으면 그사이에 숨겨진 의미가 드러나는 등, 어휘집의 단어는 각각 떨어져 있으면서도 연결되어있다.
공존
R과 L사이 발음에 관한 이야기 ‘ㄹ’에서는 ‘이해할 수 없음의 영역’에 속한 자신을 세상이 이해하는지 궁금해하는 듯했다. ‘사랑’에는 바벨탑 이야기가 나오는데, 벤야민의 번역론과 순수언어를 공부하면서 바벨탑 이야기를 접했기에 반가웠다. 유경은 쪼개진 언어의 파편을 붙여야 하는 인간의 숙명을 ‘사랑’이라는 절대적인 단어와 연관시켰다. 반면 ‘헤어짐’에서는 “다른 언어로 자신을 발음해 내는”(p.146), 연인과 이별 후 흩어진 단어를 말한다. 어휘집에서 내가 발견한 것은 단절이 아닌 ‘연결’이며 “미워하면서도 안도했다”(p.104)처럼 양립보다는 ‘공존’이다. ‘어둠’을 읽으면서 밝기를 느꼈고, ‘온기’를 읽으면서 차가움을 느꼈다.
말걸기
유경은 독자에게 말을 걸기도 한다. 첫 번째 어휘 ‘거짓말’을 읽을 때 그랬다. 본문(검은색 글) 뒤에 숨어있는 잿빛 글씨가 눈에 들어오자 이 글을 그만 쓸까 고민했다. 그동안 이해하지 못한 소설을 다 읽고 ‘작품해설’이라는 그럴싸한 해석을 접한 후 그 소설을 이해한 척하고, ‘작품해설 읽기’가 문학 독서에 필요한 방법이라며 가르쳐 온 지난 시간을 떠올리면서.
꼬리
‘사랑’을 읽으면서 김현식의 <사랑사랑사랑>을 들었다. ‘사랑’ 안에 기쁨과 우울함 어둠과 밝음, 황금색과 파란색이 김현식 목소리와 섞였다.
누구나 한번쯤은 사랑에 울고
누구나 한번쯤은 사랑에 웃고
그것이 바로 사랑 사랑 사랑이야
철부지 어렸을 땐 사랑을 몰라
세월이 흘러가면 사랑을 알지
그 흔한 사랑 한번 못해본 사람
그 흔한 사랑 너무 많이 한 사람
그것이 바로 사랑 사랑 사랑이야
사랑에 마음 아파 사랑에 울고
사랑에 기분 좋아 사랑에 웃고
- 김현식 <사랑사랑사랑> 중에서
<이해하지>를 잠시 옆에 놓고 레이먼드 카버 단편 <풋내기들 Beginners>를 읽었다. 그 흔한 사랑 너무 많이 한 듯 보이는 네 사람이 모여 사랑을 이야기한다. 단편 속 네 사람 모두 사랑을 안다고 말하지만, 내가 보기엔 모두 사랑을 모르는 것 같다. 유경의 글과 김현식 노래 카버의 소설이 엉켜 사랑은 더 불가사의하게 다가왔다.
‘불가능한’에서 유경은 데이트 어플리케이션을 소개하는 글로 ‘완벽한 연애’를 꿈꾸는 이들에게 불가능한 희망을 안겨주고, 어플리케이션에서 만난 P와 J의 이야기 ‘데이트’에서 이를 구현한다. 이 부분을 읽을 때 마침 내 귓가에 라이오넬 리치와 다이애나 로스가 부른 <Endless Love>가 흘렀다. 그렇다면 영원한 사랑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도달하는 셈인가. 오랜만에 꼬리에 꼬리를 무는, 즐거운 독서를 했다.
반론
<이해받지>를 읽은 사람들이 나누는 토론 내용을 다룬 ‘비판’에 대해 반론한다. 의도적으로 짧게 지어진 이야기를 누구나 쓸 수 없다. 그들이 아마추어라서 짧게 쓰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명확히 알고 있으며 결론을 내리지 않음이 적절한 결말임을 안다. 짧은 글이 지니는 명징함은 모호함과 열려있음으로부터 온다고 믿는다. ‘비판’에서처럼 자기반영적인 시각에서 스스로 작품을 바라볼 때 소설은 생명력을 지닌다고 본다. “아직은 응원할 단계라고 보여요”라는, 소설 다운 표현은 유경이 ‘비판’을 상처가 아닌 자라남의 언어로 재설정한다.
유희
어휘집으로 유경은 독자와 유희를 한다. ‘폭력’을 읽으면서 미로에 빠진 느낌이었다. 십자말풀이가 아니라고 유경이 강조했듯이, 빈칸에 채운 글자에 주시해야 한다. 글자는 뱀이 똬리를 틀 듯 안으로 파고든다. 마치 장난처럼 접근해 은밀히 자행되는 폭력과 같다. 글자를 따라가며 완성하는 문장에서 폭력이라는 어휘에 가려진 것이 생생히 다가온다.
‘자기소개’에서 독자는 유경과 일치하는 취향(나는 에너지, 방황, 빨강머리앤, 연극)과 그렇지 않은 것(나는 하얀 털 옷) 혹은 흥미로운 것(‘내 세상을 구하기로 했어요’, ‘거품이 아주 많아요’)은 무엇인지, 자신도 모르게 탐구할 것이다.
글 말미에 ‘22/115’가 눈에 띄었다. 총 115개의 자신을 소개하는 단어 중 22개 밖에 자기소개서에 쓰지 못한다는 의미 같았다. 취업이라는 프레임을 덧씌워놓은 자기소개서에 22개의 단어만이 적절하지만, 나머지 93개 단어가 더해져야만 진정한 자신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동시에 내가 유경처럼 취업을 준비하는 시기로 돌아간다면, 115개 만큼 나를 소개할 단어를 찾아낼 수 있을지... 당시 나는 나 자신을 정말로 몰랐으니까.
응원
유경의 ‘이해받지 못함을 이해’한다.
읽으면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았다. 하지만 이해하지 못해서 좋았다. 그런 책이 있다. 이해하지 않으려 할수록 더 좋은. 애쓰지 않아도 언젠가 갑작스레 이해할지 모르는 ‘앎’이라는 기대가 담긴 책.
여기서 이해란 ‘이해하기를 바라지 않는 이해’이다. 우리는 이해에 집착할 때가 많다. 나는 책을 읽으며 삶이 ‘오해’의 연속임을 알았고, 보르헤스를 만나면서 과거, 현재, 미래가 혼재한 미로에 갇혀 그의 말을 해석하고 다른 책의 도움으로 조금씩 보르헤스가 만든 미로 속을 움직였다. 영원히 미로에서 빠져나오지 못함을 알지만 미로 속 유희를 알았다. 무언가를 최대한 알리고 신속하게 이해를 주고받으려는 오늘날, 침묵과 미지, 그리고 뒤처짐이 있는 ‘이면의 세계’ 역시 움직임을 우리는 망각한다. 유경의 책을 읽으면서 ‘미로’에 갇힌 느낌을 받았다. 코로나로 불가해한 일상의 멈춤을 체험하고, 이해받지 못할 세계가 우리를 지배할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사로잡힌 오늘, 나는 <이해받지>로 이해받지 못함을 이해할 기회를 얻었다. 유경 작가에게 감사하며 앞으로도 이해받지 못할 글을 썼으면 좋겠다. 그것은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니다. 세상을 깊이 이해하려는 마음이 글에 담겨있기에 유경은 이해받지 못할 글을 쓴다.
팁
<부록>에 담긴 어원집은 최대한 늦게, 그 부분을 읽고 나서 펼쳐라. 여러 힌트가 자칫 이해하지 못함을 방해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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