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그럴 때가 있지 않나, 뭔가 감동적인 것을 봤는데 그걸 놓치기가 너무 아까운 그런 때.
주변을 뒤져봐도 그 흔한 볼펜 하나 없지만 지금 느낀 감동을 어떻게라도 남기고 싶은 그런 때 말이다.
예전엔 술을 마시면서 영화나 책을 봤는데 요즘은 웹툰에 꽂혔다. 그러다 무언가 가슴속으로 확 들어올 때, 핸드폰을 집어 목소리로 녹음을 했더랬다.
오랜만에 나를 로맨스 대리만족의 세계로 폭 떨어뜨린 작품이 있는데 바로 '간 떨어지는 동거'. 와 이거 뭐야 나 왜 이제야 찾은 건가, 너무 재밌다 하며 봤는데 알고 보니 나만 모르는 유명작이었으며 팬들이 아주 과몰입하여 가상 캐스팅까지 진행된 (왠지 드라마 스토브리그가 생각난다 ㅋㅋ) 장기 연재 중인 작품이다. 남자 구미호와 당차다 못해 사이다 캐릭터 인간 여주의 로맨스가 메인이고, 못지않게 풋풋한 서브 커플이 나오는 재미가 아주아주 쏠쏠하다. 서브 여주쯤 되는 구미호는 이미 인간의 정기를 흡수하여 결국 인간이 된 '예전' 구미호. 말 그대로 이제는 여우가 아닌 인간이다. 그녀가 여주인공 이담에게 이런 말을 한다.
이담. 곰이고 호랑이고 여우고, 왜 다들 인간이 되고 싶어 하는지 알아?
인간만이 유일하게 자기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거든.
대사만 보면 자기 개발서에나 나올법한 말이지만, 그녀의 슬픈 과거를 보면 이 대사가 마음에 훅 와 닿는다. 인간의 정기를 흡수해서 인간이 되고자 하는 본능인 '식욕'과 자신에게 식욕을 불러일으키는 상대에 대한 진심으로 괴로워하다 어느 순간, 사랑하는 사람의 정기를 정신없이 흡수하여 그를 제 손으로 죽인 적이 있던 것. 그 괴로운 시간을 지나 겨우 인간이 된 그녀가 하는 말이라 쓸쓸하다.
그녀에게 아직 정기의 총량?! 을 채우지 못해 구백 년을 여우로 살아온 남주가 그녀에게 묻는다. 혹시 네가 인간과 사랑했을 때, 끝이 좋았던 적은 없었냐고. 그런 그녀가 쓸쓸히 웃으며 말한다. "아니, 다 죽었어"
인간으로 태어난 내가 이성을 놓고 한참 살다 정신이 번쩍 들 때, 내가 왜 이러고 사나 싶을 때나 아님 현타 올 때, 힘들거나 괴로운 시간이 오면 난 이 웹툰의 127화, 이 장면을 여러 번 보게 될 것 같다.
는 단행본, 드라마도 확정된 만큼 유명했고 나 역시 꼬박꼬박 유료결제의 늪에 빠져 열심히 보았다. 근현대가 주된 배경인데 단순한 그림체는 뛰어난 시대 고증으로 인해 생명력을 얻어 작품을 생생하게 살려낸다. 거기다 주인공들의 찰진 말투까지. 진짜 이 작가님 인생 N회차인 듯. 기억에 남는 베댓이 있는데 '이 작가님은 그냥 웹툰 그리시는 분이 아니라 진정한 이야기꾼 같다'라는 내용의 댓글이었다. 매 화마다 에피소드는 다르지만 인물들이 다른 화에서 유기적으로 연결되기도 하는데 주제 역시 다양하다. 무속신앙, 부모의 사랑, 여성의 삶 속에 숨겨진 애환과 한의 정서, 6.25 전쟁과 전후의 삶의 모습, 가족의 화목과 형제간의 우애, 남녀 간의 사랑, 운명을 대하는 인간의 자세 등..
내가 이 웹툰을 여행하다 만난 동생들에게 추천해 주었는데, 모두 여자라 그런지 '생굴' 편을 보고 그렇게 울었다고 했다. 20대 초반에서 많아야 후반인 친구들이 옛날 여성의 삶에 눈물 흘리는 것을 보며 변하지 않은 여성 삶의 보편적 모습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 시대상을 관통하여 그려내는 작품이 주는 감동과 더불어, 시대를 초월하는 인간의 보편적 감정이 존재함을 다시 한번 실감했다. 훌륭한 고전은, 몇 백 년이 지나 읽어도 훌륭한 작품인 것처럼.
# 아니고 ♭, 화려한 해쉬태그# 이 아니라 한 단계 낮은 ♭, 그래서 플랫 다이어리.
어쩌면 비주류 일수 있는 진짜 일상 갬성.
임현 작가의 '플랫 다이어리'
갬성, 나만 자주 쓰는 단어인 줄 알았던 이 갬성, 내가 혹시 이 웹툰의 영향을 받은 건가? 아님 웹툰 작가님과 비슷한 나이 때라 비슷한 단어들을 쓰는 건가. 무튼 진정한 갬성웹툰!!
우선, 이 웹툰을 본 많은 사람들이 나와 같은 생각을 했다. 아, 이 작가 너무 매력 있다. 나만 알고 싶은 작가로군. 이런 만화를 그리는 사람은 대체 누구야? (는 반응은 연재 종료가 알려진 후 블로그까지 찾아간 수많은 팬들을 보며 실감할 수 있었다.) 베댓 중에도 작가님 나랑 사귀어요! 를 종종 볼 수 있었으니.. 그만큼 작가의 가치관이 묻어날 수밖에 없는 일상툰 장르의 특성상 작품들을 보며 주인공=작가에게 매료된 독자들이 많았던 것. 스토리 전개를 위한 각색이야 있겠으나 넘어가도록 하자. 무튼 이 작가님도 인생 N회차 인가 싶지만 나는 왠지 그의 삶의 모습, 경험과 생각들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는데..
1. 나 역시 연재 종료 소식에 그의 블로그로 달려간 한 명의 팬으로서 블로그를 둘러보면서 '읽는 책이 비슷한 사람들이 가지는 결이 있어 내가 공감할 수 있었구나'라는 생각이었고 (작가가 읽은 책을 정리해 놓은 내용이 많다)
2. 사실 우리 또래에는 그렇게 다양하고 많은 경험을 한 사람이 의외로 꽤 있다는 점이었다. 돈은, 더 솔직히 말해 돈과 시간이라는 자원의 넉넉지 않음은 무튼 몸을 굴려 어떻게든 생존을 해야 하게 만드니까. 그것이 바로 '경험' 이 되는 거니까.
어쩌면 그것들은 그저 경험으로 끝나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그 경험을 체화하고 사색하여 자신의 가치관으로 만들어 가는데 이 작가님은 경험과 사색을 통해 자신의 가치관을 직접 빚어 온 사람 같다. 경험을 토대로 담담히 풀어내는 모든 에피소드가 예사롭지 않기 때문. 뛰어난 필력은 전업 작가를 해도 될 듯싶고, 무엇보다 남들은 그냥 스쳐 갈 만한 사소한 것들에서 느낀 바를 주제의식으로 풀어낸다. 그렇다고 절대 무겁거나 한 종류의 것도 아니다. 예를 들면 이런 식. 금전적인 이유로 유럽여행을 못 가 아쉽던 차, 도보 여행을 해 보란 말 한마디에 그대로 짐을 싸서 걷기 여행을 시작하고, 자판기 커피의 미슐랭 가이드가 되기 위해 교내 자판기 커피를 다 마시는 등 실천력 갑인 인생의 궤적에서 나오는 행동들은 말 그대로 '짬에서 나오는 바이브' 랄까. 그로 인해 느끼는 점과 생각, 표현이 예사롭지 않은 것, 이것이 바로 찐 바이브 인 것이다.
도보 여행 중 로드킬 당한 동물들을 보며
'처음엔 애도하는 마음으로 숫자를 세다가 너무 많아서 그만뒀다'
'한때는 성업했을 휴게소들도 하나같이 쇠락한 모습'
'그러니까 나는, 조금 느리다는 죄로 죽어야 하는 세상을 걷고 있었다.'
라는 가슴에 박히는 표현들이 매 화 가득하다.
나는 남들과 웃음 포인트가 다른 편인데, 친구 중 '딸기'라는 별명의 얼굴을 진짜 딸기로 그린 것도 너무 웃겼고, 자신이 항상 양반임을 강조하는 친구라 옷은 또 항상 전통복장 ㅋㅋ 와중에 '딸기' 친구의 대사가 기억에 남는다. 주인공이 걷기 여행을 하다 딸기의 고향인 천안까지 가게 됐는데 이를 알고 천안까지 한달음에 내려와 딸기가 데려간 본인의 집은 아주 낡은 아파트.
"뭐야. 대궐집 사는 줄"이라는 주인공에게 딸기가 하는 말.
"요즘 양반은 아파트 살아. 글고 제 배나 불리는 것들이 양반이여? 남의 배를 불려야지."라는 아주 참된 양반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나저나 이 대사 찾으려고 다시 만화를 보는데, 딸기 얼굴 그림체 너무 웃기다. 작가님 센스 굿b 캐릭터 너무 귀엽고 사랑스럽다..)
천주교 신자들이 보면 조금 더 웃길 만화. 제목 어쩜 저리 찰떡인가, 싶어서 한번 더 웃음 포인트.
한참 웃다가 마지막 나를 울컥하게 한 마지막 말.
'그 날, 신을 믿지 않는 우리들도 알 수 있었다.
신은, 가장 낮은 곳으로 온다'
이 만화도 어쩌면 만화적 각색이 있을 수밖에 없지만, 작가의 민낯을 그대로 드러 낼 수 없는 많은 이유로 보이지 않는면도 많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웹툰과 작가님께 박수를 보내고 싶은 것은, 자신의 부끄러움과 치부를 드러내 마주하고야 마는 용기 있는 모습에 대한 존경심에 가까운 감정이다. 내부고발에 갈등하고, 결핍에 좌절하며, 또래보다 느린 것만 같은 자신의 인생 속도에 대한 불안감을 그대로 드러내는 용기.
나는 이런 웹툰들을 보면서 캐릭터들의 감정에 이입하여 그들의 인생을 함께하는 즐거움을 얻기도 하고, 때론 나와 다른 삶을 엿보고 감동함으로써스스로를 돌아볼 용기를 얻기도 한다.
자, 이제 힘을 얻어 벌써 세 달이 지난 올 한 해의 계획을 재 정비할 시간이다.
업무 스트레스로 저녁을 먹다 체하고, 잠시 든 선잠에선 온통 업무 관련된 꿈을 꾸다 겨우 깨어 잠 못 이루고 새벽에 일어나는 이 예민함 역시 어떻게든 좋은 방향으로 바꾸어야 할 때이다.
그러니까 나는 힘을 내어, 어제보다 조금은 더 나아가겠다는 뜻이다.
-메인 화면은 임현 작가님의 플랫다이어리 14화 신은 가장 낮은 곳으로 온다 중 마지막 장면을 캡처하였음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