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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떠돌이 Jul 07. 2020

홍콩과 민주주의, 추억의 상관관계 上

추억은 추억으로 끝나지 않는다

1. 좀이 쑤신다. 어딘가로 나가고 싶다. 때가 때이므로 참기로 한다.


2. 홍콩 시위가 계속되고 있다. JTBC 차이나는 클라스를 보며 (장정아 교수의 홍콩 편을 보고 이 프로그램의 팬이 됨) 홍콩인들이 자신들을 식민 지배했던 영국 깃발을 흔드는 이유를 이해하게 되었다. 중국과 양립 체제로 통합되기 전, 영국은 홍콩에 갑작스럽게 많은 자유를 허용하고 철수하지만 결국 중국에 의해 원상태로 돌아간다. 현재 홍콩인들은 정치체제, 선거법을 개정하지 않고는 자신들의 평화로운 일상을 지키는 것이 불가능함을 깨닫고 필사적으로 저항하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시위대를 진압하는 경찰이 보인다. 그들이 입은 경찰복..


3. 작년 홍콩 여행 중 작은 섬에 갔었다. 말 그대로 며칠을 내리 잠만 자고, 산책하고 쉬었지만 피로가 풀리지 않았다. 섬을 떠나던 날, 몸과 마음이 피로해진 상태에서 만난 귀여운 강아지 손님 덕분에 마음이 한결 몽글몽글 해졌다. 프렌치 불도그의 체형에 페키니즈가 섞인 귀염상. 주인이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요리조리 돌려가며 각도를 잡아 주었으나 사랑을 넘치게 받으며 자란 아이인지 나의 마음은 아랑곳하지 않고 시크하기 그지없는 갱얼쥐였다.

타이가 잘 어울리는 귀여운 갱얼쥐



4. 사실 마음이 몽글몽글 해진 건 다른 이유였을 것이다. 

체크아웃 시간에 맞추어 나오다 보니 선착장에 좀 일찍 나오게 되었다. 미리 나와 배를 기다리며 떠나기 전 섬의 모습을 사진에 담던 순간, 사진에 우연히 담긴 사람에게 양해를 구하기 위해 말을 걸었다.


 저는 이 섬을 여행하고 떠납니다. 마지막 풍경을 담는데 당신이 찍혔어요. 지우고 싶지 않은데 괜찮을까요?

 네, 하며 내 핸드폰의 사진을 보더니 쑥스러운지 웃는다.

 여기서 일하세요?

 저는 여기서 일하는 경찰입니다.


홍콩의 미남 공무원


Security와 Police라는 단어를 같이 사용하기에 행정, 보안 시스템이 다른가보다 막연히 생각만 했지만 총을 차고 있는 모습에 일반 사설 경찰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유창한 영어+포마드가 굉장히 잘 어울리는 말끔한 외모에, 모델 같은 분위기를 가진 훈남 of 훈남. 사실 훈남보다 미남!! 배가 오기까지는 1시간 정도가 남았고, 그도 내가 타게 될 배에 용무가 있어 기다리는 중이라 잠깐의 대화로 끝날 줄 알았던 상황이 길어졌다.


자신은 이 섬에 살지 않고 출퇴근한다며 자신이 사는 곳을 알려 주며 내게 남은 여행의 일정을 묻는다. 예상하지 못한 TMI에 당황했으나 한마디 한마디를 수줍게 건네는 홍콩 공무원의 태도는 경계를 풀게 만든다. 설 연휴 기간인데 숙소를 구했느냐는 물음에 내가 묵는 곳을 말해 주었다. 아차 싶다. 여행에선 타인에게 자신의 일정, 행선지를 말하지 않는 것이 안전의 첫 규칙이다. 나의 당황스러움을 아는지 모르는지 계속 이것저것 물어보며 대화를 이어간다. 모든 문장의 끝에 붙이는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물어봐도 될까요? 는 홍콩의 젠틀함인가.


홍콩에 왜 왔어요? 어떤가요?

저는 29살이에요. 영국에서 잠깐 살았는데 다시 돌아온 홍콩은 너무 많이 바뀌었습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던 예전에 살던 집 근처도 이제는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바뀌었어요.

부모님은 은행에서 일하시고 근처에 살고 계세요. 여동생은 얼마 전에 결혼했어요. 아, 여동생도 금융권에서 일해요. 홍콩 섬에 좋은 곳이 있는데, 알려줄 테니 꼭 가봐요.




홍콩 여행은 별생각 없이 왔어요, 추억이 있거든요. 그래서 와 보고 싶었어요.

박물관을 좋아하지 않지만 가보고 싶은 박물관이 있었고, 루쉰을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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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부터 우리 대화는 편한 친구들의 그것처럼 자연스럽고 즐겁다.

문과 감성인지 루쉰에 대한 이야기부터 그의 사상, 루쉰 사상의 배경이 된 중국 역사의 특수성까지 줄줄 읊는 그를 보며 여행의 수많은 우연에 대해 생각한다. 낯선 섬에서 배를 기다리다 만난 홍콩 공무원과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될 확률과 우연. 태국 난에서 무라카미 하루키 광팬을 만난 것보다 더 예상 못한 상황이다. 이래서 여행은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인생의 축소판이다.


신나서 한참 떠드는 내게 잠시 기다리라더니 저 멀리 휘적휘적 뛰어가 사온 차가운 홍차 한 병을 사서 내밀고, 개도 안 걸리는 여름 감기에 걸린 나는 고맙게 받긴 했지만 만지작 거릴 뿐 마시지 못한다.

홍차 안 마셔요? 열어 줄까요?라고 묻기에 사실을 말하자, 다시 잠깐 기다리라며 이 섬에 유일하게 있는 카페에 가서 뜨거운 커피를 사다 준다. 우연한 만남의 마지막까지 여행자에게 호의를 베푸는 그에게 진심으로 고맙다.


사람들이 줄을 서기 시작하더니, 저 멀리 배가 들어오는 모습이 보인다. 이제 떠날 시간이고, 나는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너무 즐거운 대화였어요. 이렇게 누군가와 말해본 게 이번 여행에서 처음인데 정말, 진심으로 즐거웠어요. 저 혼자 쓰는 글이 있는데 거기에 이 에피소드 적어 보려고요, 건강하게 잘 지내요!


그가 조심스럽게 말한다.

저는 내일 모래부터 이틀 동안 쉬어요. 숙소가 제가 사는 곳과 가까운데, 한국을 떠나기 전에 만날 수 있을까요?


머뭇거리는 나와 내 폰을 번갈아 보더니, 주머니에서 꺼낸 냅킨에 자신의 번호와 메일 주소를 적어준다.


이걸 받으면 무슨 의미일까? 짧은 시간에 온갖 생각이 든다. 이상한 사람 아닐까, 낯선 여행지에서 이건 위험한 행동이다, 아냐, 그런데 어느 정도 신분 보장됐잖아 - 전형적인 여행의 의심병 증상들.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덧붙인다.

 

그냥 받아요, 별 뜻 없어요. 저도 너무 즐거웠고, 저 한국 좋아하거든요. 여행지에서 만난 친구라고 생각해 줘요.


가벼운 마음으로 냅킨에 쓰인 연락처를 받고 배에 오른다.



여행이란 참 묘하다. 

한 번이라 내기 쉬운 용기가 많은 일들과 인연을 만든다. 

여행지에서 만난 잠깐의 인연이 참 즐겁다. 괜스레 설레는 건 분명 김칫국 드링킹인데 그래도 가시지 않은 여운에 마음이 몽글몽글 해 진다. 배에  타자마자 전화번호를 저장하니, 메신저에 그의 이름이 뜬다. 이름도 이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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