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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떠돌이 Aug 29. 2019

컬링 하는 멋진 오빠

슬프지만 그래도 희망차게 그들의 행운을 빌며

KBS 드라마스페셜 마지막 회 '닿을 듯 말 듯'- 막아도 들리는 기억, 숨겨도 터져 나오는 진심


이 청춘 멜로 같은 드라마는 내게 너무 많은 추억을 떠올리고, 또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달달한 줄 알았지만 짠맛도 나는 소금콘 소프트 아이스크림처럼. 알고 보니 쓴맛도 나는 오미자처럼. 둘의 이야기는 그랬다.




유독 상대의 스톤을 부딪혀 밀어내 자리를 잡게 하는 '테이크' 동작을 못해 팀에 결정적인 피해를 입히게 된 영주는 그 길로 쫓겨나듯 고향 의성으로 내려온다. 남들에겐 숨겼지만 고쳐지지 않는 불치병 이명과 함께.

고향을 떠난 지 3년 만이었다.

그녀를 받아준 고향의 코치님은 새로 생긴 남녀 혼성팀 '믹스더블'에 영주를 배치한다. 파트너는 영주가 고등학생 시절 미행까지 하며 파이팅을 외쳐 줄 정도로 팬이었던 성찬 선배! 그런데 선배를 대하는 영주의 행동은 예상과 다르게 알 수가 없다. 차갑고, 삐딱하고, 좋은 듯하면서 결정적인 순간엔 그의 뒤통수를 날리는 식이다.


영주는 경기 도중 결정적인 순간에, 더 정확히 말하자면 상대 스톤과 부딪히는 테이크를 해야 하는 시점에 경기력이 떨어지고, 스톤이 부딪히는 소리를 듣는 순간이면 강한 이명 현상을 겪는다. 선발전을 치르던 중 이명 증상이 심해진 그녀는 경기장에서 쓰러지고 마는데, 병문안을 온 성찬 선배에게 삐딱할 뿐이다. 마주친 상대팀 친구에게도 하루 더 쉬어야겠다며 재경기 보이콧을 선언하곤 경기 자체를 포기해버린다. 팀 망하게 하려는 망삘로 직진하는 영주이지만 그럼에도 성찬은 그녀에게 끝없이 다가간다. 파트너 영주의 변덕을 받아주고, 잘해주고, 배려해주고, 자꾸만 도망가려는 그녀를 터미널까지 쫓아가 잡아 데려오고.


자전거가 고장 나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논두렁에 앉아 졸고 있던 영주를 하루 종일 찾아 헤맨 성찬 이건만, 고맙단 말을 듣긴 커녕 자신의 스쿠터를 바쳐가며 영주의 무사 귀가를 도울 뿐이다. 며칠 후 고장 난 자전거를 고쳐 벗겨진 도색까지 예쁘게 다시 칠 해 갖다 주지만 그걸 도랑으로 발로 차 버리는 영주를 보며 성찬은 폭발한다.


도대체 잘해보려 해도 왜 이러냐고, 못해먹겠다고. 선발전 포기하겠다고. 나 병신 취급하는 거 못 견디겠다고.


그 순간 영주가 발악하듯 말한다.

닌 그 말 할 자격 없다. 파토 내도 내가 할끼다. 니도 3년 전에 우리 아빠 병신 취급했잖아! 니가 우리 아빠 개 패듯 끌고 갔다고!

그리고 시작되는 이명, 비명을 지르는 영주의 손에 잡힌 의자, 그대로 창으로 날아가 깨지는 유리창.




3년이란 시간은 짧기도, 길기도 하다.

성찬이 졸업을 하고 군대에 복무 중이던 동안 나갔을 수많은 집회 현장에서, 진압을 하던 중 흥분한 성찬이 곤봉으로 내리쳐 두들기며 때린 사람은 영주 아빠였다. 멀리 서있던 영주의 눈에 아빠를 무자비하게 내리치 경찰의 보호헬멧이 날아가 보인 얼굴은 그토록 좋아했던 선배, 성찬의 얼굴이었다. 영주가 목격한 그 장면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아 그녀의 병을 악화시켰다.  그 날 이후 퍽, 하는 소리가 들리면 강한 이명이 시작되거나 그 장면이 오버랩되면서, 그녀를 서울팀에 들어가게 할 정도로 좋았던 실력까지 망가지게 만들었다. 모든 불행의 시작은 '좋아하던 선배가 아빠를 무자비하게 때렸던 모습'이라고 믿는 영주.


결국 영주의 행동에 대한 진실은 드러나지만 둘은 어색하고 상처 받고 감정의 골을 너울거린다. 먼저 용기를 낸 성찬의 연락에 영주는 아빠 사진을 들고나가 보여주지만 성찬은 모르겠다고 말한다. 현장 출동할 때마다 질리게 몸싸움만 해서 일일이 기억이 안 난다고. 미안하다고. 진짜 미안하다고.

영주는 오열한다. 왜 하필 너냐고, 다른 사람도 아니고 왜 너냐고. 너처럼 되는 게 꿈이었는데 왜 하필 선배냐고.


그런 영주에게 다 내 잘못이라고 말하는 성찬.






대학생 시절 집회 현장에서 동아리 선배를 본 적이 있다. 미군부대 앞이었다. 아는 척을 하면 얼차려를 받는다는 말을 풍문으로 들어 감히 아는 척할 수가 없었고 이후에도 나는 다른 선배를 마주친 적이 있다.

집회 현장에서 서로의 젊음이 사색의 에너지와 함께 충돌로 치환될 때면 나는 늘 절망스러웠다. 이 모든 젊음의 에너지가 아까워 미칠 것만 같았다. 실제 몸싸움이라도 있는 강제대집행 같은 심각한 상황이 올 때면 나는 이런 상황을 만든 나쁜 사람들을 모두 기억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가끔 매우 흥분한 어떤 단체의 어른들은 무장을 해제한 전경을 잡아 때리거나 인질로 잡아두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학생들은 어른들을 설득해 전경들을 돌려보냈다. 우리의 싸움이 그들과의 싸움이 아니란 건 너무 명확하니까. 그들 역시 나라에 젊음을 저당 잡힌 불쌍한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이니까. 모두 귀한 사람들이니까, 그래서 상처 받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에 눈물이 찔끔찔끔 나기도 했다.



성찬이가 미안하다고 말한다. 영주에게. 국가가 불러 시키는 대로 한 행동에 대해 영주에게 사과한다.

진짜 사과해야 할 사람은 성찬이가 아니지만 성찬이는 미안하다고 말한다.

그럼,

오랜 시간 상처로 남을 영주의 트라우마와 이명은 누가 치료할 수 있을까? 누가 치료해야 할까?


또다시 도망가는 영주를 다시 한번 성찬이 따라가 붙잡는다. 영주는 이번엔 도망가지 않는다. 도망가려는 맘을 바꿔 성찬이 가자는 대로 이 버스를 타고, 함께 경기장으로 향하기로 한다.

드라마의 부제 '막아도 들리는 기억, 숨겨도 터져 나오는 진심'처럼, 아픈 기억이 있지만 그래도 진심의 힘이 더 강하니까. 마음이 가고자 하는 힘이 더 강하니까.

그래, 너희들은 행복하기만 해야지. 얼굴도 모를 나쁜 사람들이 너희들을 아프게 했다고 그 어둠 속으로 빠져버리면 손해잖아. 그래 알지, 그렇다고 해도 상처들이 쉽게 극복되지 않는다는 거. 머리로 알아도 상처 받은 감정들은 논리적으로 즉각 치료되지 않는다는 거.

그래도 행복해야지, 너희들은 이미 케미 폭발이잖아. 젊고, 이쁘고, 사랑스럽고, 그리고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잖아 서로에게. 숨겨도 터져 나오는 진심만 맘껏 표현해도 되잖아.


이 드라마를 보며 달달하고 풋풋하고 순수하기까지 한 청춘들이 너무나 예뻐 행복했고, 한편으론 왜인지 6월 어느 밤 나를 펑펑 울렸던 'SBS 스페셜 - 어디에나 있었고 어디에도 없었던 요한.씨돌.용현' 다큐멘터리가 생각나 먹먹해졌다. 더는 비상식적인 비극이 한 인간의 소중한 인생을 흔드는 일이 없기를, 순탄하지 않은 세상에서 적어도 사람이 옆사람에게 상처주지는 않기를. 이미 상처 받은 많은 이들에게 깊은 위로와 어떤 것으로도 대체되지 않겠지만, 그들이 삶을 이어갈 수 있는 '당연하지만 쉬 이루어지지 않는' 보상이 하루빨리 실현되길. 나는 맘속으로 오래오래 바라며 기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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