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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패셔니스타 Nov 03. 2023

어쩔 수 없구나

 남편과 나는 야외활동을 좋아하지 않는다. 한창 연애할 때 우리는 주로 앉아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커피숍이나 영화관, 학교 도서관에서 만났다. 가끔 버스나 기차를 타고 근교에 바람을 쐬러 가기도 했지만 겨우 손에 꼽을 정도였다.

 취업 후에 출퇴근용으로 차를 사면서부터 야외로 나가 데이트를 했다. 말이 야외에서 데이트였지 실상은 차 안에 가만히 앉아 목적지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일정이었다. 아무리 수려한 풍경이 배경이라도 주차장에차 세워 놓고 후딱 둘러보고 부리나케 다시 차를 타고 돌아왔다.


 신혼 때도 마찬가지였다. 아침 일찍 출근해서 일하고 하루걸러 한 번씩 회식하면 만사가 귀찮았다. 쇼핑이나 여행 같은 발품 파는 취미는 애초에 우리 둘 다 관심밖이어서 퇴근 후나 주말엔 침대에 가만히 누워 TV만 봤다. 친정이나 시댁에 갈 때도 ‘조금만 더, 조금만 더’하며 꼼지락거리며 게으름을 피우다가 더 이상 미룰 수 없을 때 겨우 일어나 준비를 시작했다. 그래서 우리 가족 앨범에는 남편과 둘만 찍은 사진이 별로 없다. 아니, 어디든 나가야 사진이라도 찍을 것 아닌가!

 그저 아무 일 없는 고요한 일상이 좋았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었다. 아이가 태어나니 남편도 나도 주말이면 밖으로 나가야 한다는 강박증이 생겼다. 백일도 안 지난 아이를 데리고 공원으로 수목원으로 자연을 접할 수 있는 장소라면 어디든 주말마다 돌아다니기 시작한 것이다. 갓 태어난 아기가 우리의 일상 패턴을 완전히 흔들어 놓았다.


 아기를 데리고 나서는 외출은 엄청난 시간과 에너지가 필요했다. 우선 짐을 바리바리 꾸려야 했다. 트렁크에 유모차와 돗자리를 접어서 싣고, 혹시나 추울지 싶어 포대기와 겉옷도 단단히 챙겼다. 심심할지 모르니 딸랑이 장난감에, 기저귀와 손수건, 갈아입을 옷도 준비했다. 그나마 모유 수유할 때는 안고 바로 젖을 물리면 되었는데 젖을 떼고 나니 분유통과 보온병까지 짐이 더 늘어났다. 이고 지고 걷는 걸 그렇게나 싫어했던 우리 부부는 아이가 신나서 방긋 웃는 모습을 한번 보겠다고 일찍 일어나 짐을 챙겨 주말마다 바깥나들이를 감행했다.


 생후 15개월이 되었지만 서영이는 아직 혼자 걷지 못했다. 난간이나 벽을 붙잡고 한발 한발 옮기거나 누군가 붙잡아줘야 겨우 걸었다. 여름휴가 때 아이를 데리고 근처 공원을 다녀오려다 날씨가 너무 더워서 도저히 돌아다닐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런데 두류수영장이라는  어마어마한 선택지가 있었다.

 대구시에서 여름에만 한시적으로 운영하는 저렴한 물놀이장이었는데 서둘렀는데도 인파로 미어터졌다. 노랑 병아리 수영복으로 갈아입히고 어른 무릎 깊이의유아용 풀장 안에 들어가 튜브를 태워 물에 둥둥 띄워 놨더니 서영이 입이 귀에 걸렸다.

 얕은 물 속에서 작고 통통한 팔다리로 파닥파닥 물장구를 치며 놀다가 튜브를 끌어내기라도 하면 나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부렸다. 수영장을 점검하는 30분 휴식 시간에도 연신 수영장을 가리키며 얼른 들어가자며 손짓 몸짓을 했다. 물에서 노는 건 정말 고단한 일이다. 나도 남편도 다리가 풀리고 어깨와 팔이 천근만근이 되어 집에 오면 말 그대로 뻗어버렸다.

 아이가 물을 이렇게나 좋아하니 여름이 되면 물놀이를 데려갔고 데려갈 여력이 안 되는 날은 어머니께서 커다란 고무대야를 꺼내오셔서 안에 물을 가득 받아주셨다. 누가 볼 사람도 없으니 팬티만 달랑 입고 대야 안에서 시원한 물을 끼얹으며 하루가 다 가도록 놀았다. 서영이의 물놀이 사랑은 그 후로도 매년 여름마다 의식처럼 거행되었다.


 우리 가족은 ‘여름방학 두 번의 규칙’을 만들었다. 여름방학이 되면 무슨 일이 있어도 물놀이 두 번은 꼭 가자는 것이다. 그런데 서영이가 고등학생이 되니 여름방학이 짧아도 너무 짧았다. 오전에는 특수 교육원에서 진행하는 수업에도 참여해야 해서 내 휴가 기간에 물놀이장 다녀오려니 시간을 맞추기 힘들었다. 게다가겨우 함께 갈 수 있는 시간을 맞춰놨더니 물놀이 가기로 약속한 바로 전날 학교 교문 내리막길에서 넘어지는 바람에 발목을 다쳤다. 전날 서영이가 잠들어 있을 때 퇴근하여 나는 아이가 발목을 다친 것도 몰랐다.


서영이 나름대로는 발목을 다쳤다고 하면 수영장에 데려가지 않을까 봐 일부러 말을 삼킨 듯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수영복과 필요한 짐을 챙기고 간식을 준비하고 있는데 서영이가 다리를 절룩거리며 방에서 나왔다.

“서영아, 다리는 왜 절어? 어디 다쳤어?”

“아니에요. 학교에서 뛰어 내려오다가 넘어졌어요.”

다리를 저만큼 절룩거리는 걸 보니 꽤 심하게 넘어진 것 같았다. 얼른 아이를 소파 위에 앉혀 다리를 들어 자세히 살펴보았다. 다리 이곳저곳이 긁혀 있었고 발목은 심하게 부어올랐다. 워낙 조심성 많은 아이라 넘어지는 일이 잘 없는데, 뭐가 그리 급했을까.

 ‘어제 늦게라도 알았으면 찜질이라도 해 줬을 텐데. 아프단 말도 못 하고 혼자서 얼마나 쓰라렸을까’

 속상함도 잠시, 아이에게 미안한 마음만 차올랐다. 야외수영장 간다고 방학 전부터 들떠서 수영복을 새로 사고 워터슈즈도 며칠 전에 배송받았는데 수영장은 못 가고 병원에 가게 생겼다. 서영이는 병원에 가야 한다는 말에 사색이 되어서 계속 괜찮다고 말했다.

“엄마, 안 아파요. 수영장 갈 수 있어요.”

“그러면 일단 병원에 가서 의사 선생님께 약 바르고 붕대 감아달라고 하자. 그런데 서영아, 어쩌면 의사 선생님께서 오늘은 수영장에 가지 말고 발목이 좀 나으면 가라고 하실 수도 있어. 그러면 오늘은 엄마랑 집에서 맛있는 거 먹고 수영장엔 다음에 가도 될까?”

 얼굴에 속상한 기색이 역력했다.


 약 바르고 붕대 감는다고 하자 서영이는 겁을 먹고는 병원으로 가는 동안 계속 울상이었다.

“주사 맞아요?”

“아니, 의사 선생님이 발목이 어떻게 되었나 사진 찍어보고 약 바르고 붕대 감아주실 거야.”

차를 타고 가며 살살 달래서 동네 정형외과에 갔더니 다행히 뼈에는 이상이 없었다. 의사 선생님께서 발목을 살짝 삐끗했다며 약을 바르고 붕대를 단단하게 감아주셨다. 약속은 철석같이 지켜야 하는 아이라 아파도 수영장 가겠다고 우길까 싶어 걱정이 슬슬 되었다. 아예 서영이가 듣는 데서 의사 선생님께서 안 된다고 하시면 아이가 좀 설득될 것 같아서 오늘 수영장에 못 간다고 말해 달라는 쪽지를 슬쩍 건네며 도움을 요청했다.


“선생님, 발목이 이렇게 아픈데 수영장 갈 수 있나요?”

“어허, 큰일 나요. 발목을 이렇게 다쳐서는 수영장은 무슨 수영장! 집에 가서 가만히 누워서 몸조리하세요!”

 전문가의 처방을 듣고 나니 서영이도 단념한 눈치였다. 다리가 낫는 동안 아이는 수영장에 가겠다고 고집부리지 않았다. 대신 하루에도 몇 번씩 “여름방학엔 엄마하고 나하고 물놀이 두 번 가기로 했어요. 두 번 남았어요.” 하며 들볶았다.


 발목이 낫기까지 2주가 걸렸다. 여름방학이 다 끝나갈무렵 드디어 물놀이를 다녀왔다. 수영을 배운 적이 없어 튜브를 허리에 꼭 끼고 물 위에서 유유자적 둥둥 떠다니며 행복해하는 서영이. 트레이드 마크인 입가 주름이 넘실거렸다.

 “엄마, 이제 물놀이 한번 남았어요.”

 집에 오는 길에 서영이가 빚쟁이처럼 말했다. 서영이가 개학하니 영원히 쨍할 것 같던 태양의 열기도 조금씩 수그러졌다. 주말에 시간을 맞춰볼 순 있었지만 이제 물에서 놀기엔 좀 추운 날씨였다. 하는 수 없이 서영이와 다시 거래했다. 이번에 못 간 한 번은 아껴뒀다 내년에 세 번으로 늘리자고. 서영이도 수긍하며 내 제안에 동의했다. 선선한 가을과 추운 겨울을 보내고 꽃 피는 봄이 되었다. 곧이어 여름이 성큼 다가왔다. 밖에서 조금만 걸어 다녀도 땀이 송글송글 맺히고 후덥지근해져 닦아 보관하던 선풍기를 꺼내 틀 무렵이었다.


“엄마, 올해는 수영장 3번 가야 해요.”

“응?”

드디어 올 것이 왔다. 기억 저편에 넣어두고 잊어버렸던 ‘여름방학 두 번의 규칙‘. 나는 모른 척 물었다.

“근데 왜 3번이야? 두 번이잖아”

“작년에 두 번 가야 했는데 한 번만 갔어요.” 저놈의 망할 기억력.

“그래서 작년에 못 갔던 한번 포함해서 세 번 가야 하는 거야?”

“네.”

 다이어리를 뚫어져라 들여다보며 언제 수영장에 갈 것인지 고민에 휩싸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올해는 두 번도 무리였다. 일단 고등학생들은 여름방학이 너무 짧다. 서영이는 이번 여름방학도 2주 동안 특수교육원에서 실시하는 프로그램에 참여해야 했으니 오전 시간은 도저히 뺄 수가 없었다. 오후에도 센터에 가거나 수업이 있어서 일정이 빡빡했다. 이렇게 몇 날 며칠을 고민하던 내게 천사 같은 친구가 손을 내밀어 주었으니 바로 공부방과 모래놀이 치료실을 운영하는 진영이었다.

진영이는 공부방 아이들과 자주 여행을 다닌다. 짧게는 반나절 밖에서 야외수업을 하거나 아이들을 데리고 소풍을 다녀오기도 하고 공부방 졸업을 앞둔 중3 아이들을 데리고 2, 3일씩 졸업여행을 다녀오기도 한다. 이번 방학에는 모래놀이 수업을 하는 아이들과 당일치기로 기차를 타고 아쿠아리움에 갈 거라고 했다. 서영이 나이가 제일 많으니 진영이를 도와 꼬마들을 함께 인솔하고 그 다음 주에는 공부방 아이들과 수영장에서 물놀이하며 하루를 보낼 건데 서영이도 보내지 않겠느냐고 물어왔다.

 염치없지만 이런 행운을 놓칠 수 있나. 서영이는 다른 친구들과 진영 이모와 놀러 간다며 기대에 가득 차서 달력에 ‘아쿠아리움과 물놀이’라고 적어두고 손꼽아 기다렸다.

 “서영아, 그러면 이번엔 아쿠아리움도 가고 이모랑 수영장 가니까 엄마랑은 안 가도 되겠지?” 혹시나 하고 물어보았다.

 “세 번 가야 해요.” 서영이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기어이 세 번을 채워야 직성에 풀릴 눈치였다. 학원에 매여 있다 보니 주말 외에는 낼 수 있는 시간이 없었고 그나마 주말도 이런저런 약속들이 이미 잡혀 있었다.

 

 며칠을 서영이 등쌀에 시달리고 있는데 특수 교육원에서 수업 안내장이 왔다. 작년까지는 수업이 1주였는데 코로나 시국이 정상화되니 수업이 2주로 조정된 건 이미 알고 있었다. 이미지 메이킹, 제과 제빵, 바리스타, 도예, 수영, 생활체육. 각각 1주씩 2개의 수업을 신청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었다. 읽어 내려가다 ’수영‘에서 눈이 번쩍 떠졌다. 서영이가 물에서 노는 걸 좋아해서 집 근처 수영장 강습에 보낼까 싶은 생각도 많이 했지만 일반인 대상 강좌들이어서 서영이한테는 힘든 수업일 것 같았다. 수영을 배웠다 해봐야 3, 4학년 때 생존수영을 일주일씩 다녀온 게 서영이 수영 이력의 전부였다. 그런데 특수학교 내에 수영장이 있다니 강습을 받을 수 있다니 너무 좋은 기회였다. 특수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수영강습을 하면 서영이도 잘 배울 수 있을 거였다.


 작년에도 프로그램에서 수영을 1차로 선택했는데 신청자가 너무 많아서 떨어지고 생활체육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올해는 혹시나 행운이 찾아올까 하는 기대로 신청을 했다. 떨어지면 떨어지는 거고 되면 좋은 거고.

 역시 올해는 행운의 여신이 서영이 편이었다. 이번엔 서영이가 원했던 수업을 모두 들을 수 있다고 통보를 받았다. 올해는 수영장에 6번 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서영이는 너무 흥분해서 일주일 전부터 남편과 나만 보면 하루에 10번 이상 스케줄을 읊어댔다.

 “화요일 저녁에 엄마가 진영 이모집에 데려다주면 이모네서 1박 해요. 아침 먹고 워터파크 갔다가 저녁에 지하철 타고 집에 와요.”

 진영 이모랑 공부방 아이들과 워터파크에 아침 일찍 출발한다고 해서 전날 밤 짐을 챙겨 미리 진영이네로 보냈다. 서영이도 모래놀이하러 자주 가는 곳이라 마치 자기 집처럼 편안하게 잘 자고 아이들과 어울려서 잘 놀고 씩씩하게 집으로 돌아왔다.

 꿈쩍 않고 가만히 있는 걸 좋아하던 우리 부부는 휴일이면 늘 집에서 보냈고 서영이가 태어난 다음에도 1박 여행은 꿈도 못 꿨다. 혹시나 여행을 가더라도 차 안에서 거의 시간을 보내던 우리 부부가 이제는 서영이 덕분에 수영장 딸린 숙소를 알아보고 여름휴가 일정을 짠다. 남편은 잠자는 장소만 바뀔 뿐인데 여행은 뭐 하러 가냐고 비아냥거리면서도 서영이가 어디 가고 싶다거나 뭘 하고 싶다고 하면 바삐 옷을 갈아입고 나갈 준비를 한다. 아이가 우리 부부를 바꿔 놓았다. 쉬고 싶어서 조용한 곳으로 여행을 와서도 서영이가 혹시 심심하진 않은지 어디를 가면 재미있어할지를 고민하는 모습에 우리는 이렇게 이야기하며 피식 웃는다.

“부모가 되니 어쩔 수 없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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