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학교에 가지 않는 일요일이다. 학교에 가지 않는다는 것은 달콤한 늦잠을 잘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올봄부터 나도 소학교 학생이 됐다. 생각만 해도 신나는 공주사립소학교 1학년이다. 아버지는 딸이 무슨 공부냐고 마땅찮아했지만 할머니는 아들 다니는 학교에 딸은 왜 못 다니냐, 앞으로 올 세상에는 딸도 아들하고 똑같이 공부해야 한다며 아버지를 설득해 나를 학교에 보냈다.
오늘이 학교 가지 않는 날인 것은 분명하지만 아주아주 실망스럽게도 늦잠을 잘 수는 없다. 할머니와 가야 할 곳이 있기 때문이다. 할머니 덕에 소학교에 가게 됐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날아갈 것 같았다. 원래도 내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사람이 우리 할머니였지만 그때만큼은 매일 할머니를 업고 공산성을 오르라고 해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할머니의 소원 한 가지는 무조건 들어준다고 손가락을 걸었다. 할머니의 단 한 가지 소원은 주일마다 손녀딸과 함께 성당에 가는 거였다.
여기에 성당이 생긴 지는 몇 해 안됐다. 그 전에는 미사를 드리려면 공소를 찾아 유구의 요골이란 데까지 가야 했다. 아버지가 그렇게 말려도 할머니는 일요일마다 날이 채 밝기도 전에 혼자 집을 나섰다. 주님을 만나고 할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길이라 하나도 힘이 안 든다고 했다.
아버지 어머니는 할아버지 얘기를 잘해주지 않는다. 할머니한테 묻기도 좀 그렇다. 할아버지 얘기를 꺼내면 할머니가 너무 슬퍼할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내가 아는 것은 할아버지가 천주교 신자였고 젊었을 때 건너편 황새바위에서 돌아가셨다는 게 전부다. 할머니는 어린 자식들, 그러니까 우리 아버지와 고모 때문에 간신히 살아남았다고 했다. 몇 년 전 오빠한테 들은 얘긴데 오빠가 아는 것도 그게 전부다.
성당은 언덕 끝에 있다. 초여름이라 아직 해가 머리 꼭대기까지 올라오지 않았는데도 목덜미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다. 기와집 성당에 딸린 초가집 사제관에 사는 신부님은 머리가 노랗고 눈알이 파랗다. 처음엔 서양 도깨비 같아 무서웠지만 자주 보니 이젠 그런대로 익숙하다. 무엇보다 두루마기보다 더 치렁치렁한 검은 신부 옷 주머니에서 꺼내 주는 눈깔사탕은 파란 눈알의 무서움도 초여름 더위도 단번에 날릴 정도로 달콤하다.
신부님 주머니 속 사탕을 얻어먹으려면 미사 시간에 졸지 않아야 하는데... 오늘은 제발 성공할 수 있을까?
1901년 6월 어느 날
딱 일 년이 걸렸다. 작년 공주로 이사하고 얼마 있다가 중동성당을 찾아왔었다. 교적을 옮기고 자주 미사에 참례해야 하는데 왠지 동네에 있는 성당보다 중동성당으로 오고 싶었다. 성당의 분위기도 궁금하고 그때 당시 한참 어지러운 마음을 기도로 달랠 겸 성전에 들어가려고 했는데 문이 굳게 닫혀있었다. 아무리 코로나 시국이라고 해도 신자들이 조용히 기도하는 것까지 막는 성당은 없는 걸로 알고 있는데 이곳은 그렇지 않았다. 왠지 뭔가 받아들여지지 않는것 같아 마음 상해 돌아왔다.
그리고 일 년 만에 중동성당에 다시 왔다. 미사 시간에 맞춰 도착한 성당은 여전히 고즈넉하고 아름다웠다. 그런데 난감한 일이 벌어졌다. 날이 덥기도 하고 급하게 나오느라 별생각 없이 양말을 신지 않았는데 성당 바닥이 마룻바닥이 아닌가. 성전 입구에서 신발을 벗고 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양말도 신지 않은 맨발인데 성전 안으로 들어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잠깐이지만 큰 고민을 했다. 공주는 유난히 보수적인 지역이다. 미사 시간에 미사보를 쓰지 않은 자매들은 손가락으로 꼽는다.(나는 꿋꿋하게 쓰지 않고 있지만...) 그런데 맨발까지? 미사보도 쓰지 않은 맨발의 자매를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는가.
하지만 사람들을 보러 온 게 아니라 미사를 드리러 왔는데 그게 무슨 대수랴. 맨 뒤에 조용히 앉아 무사히 미사를 마쳤다.
서울 약현 성당을 모델로 만들었다는 중동성당은 성당 건축의 기본을 제대로 보여준다. 국고개 문화거리에서 성전으로 올라가는 높은 돌계단과 인근 어디서도 한눈에 들어오는 뾰족하고 높은 종탑. 십자가 모양의 성전과 독립된 건물로 따로 만든 사제관, 주변의 조경 하나하나가 고풍스럽기 그지없다. 성전 건축에 쓰인 붉은 벽돌은 1935년 당시 중국에서 데려온 현지인 기술자가 직접 구워 만든 것이란다. 공주 지역에 성당이 처음 만들어진 1897년에는 기와집 성당과 초가집 사제관이던 것이 1936년 지금의 모습으로 완공됐다.
지금은 종을 치지 않지만 새벽마다 종을 치던 예전에는 언덕 꼭대기, 그곳에서도 높디높은 종탑에서 울리는 중동성당 종소리가 공주 도심 곳곳에 울려 퍼졌을 것이다. 인근에 있는 황새바위 순교성지에도 틀림없이 들렸겠지. 황새바위에서 가족을 잃고 교우를 잃은 사람들은 중동성당의 첫 종소리를 들으며 어떤 기도를 올렸을까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