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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주일장춘몽 Jun 07. 2022

밤 막걸리 양조장에서 떠올려 본 옛날이야기

낯선 눈으로 보고 쓰는 공주

   

고양이 손도 빌린다는 망종이 지난 지도 며칠이 됐다. 밭에는 진작 베었어야 하는 보리가 아직 남아있고 논도 다 갈지 못했는데 모판의 모들은 하루가 다르게 쑥쑥 크고 있다. 자칫 논에 옮겨심기도 전에 웃자라기라도 하면 낭패도 그런 낭패가 없을 텐데...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보리를 다 베어야 한다.      


지금이야 살림이 조금 나아졌지만 시집오기 전까지만 해도 요맘때면 보릿고개를 넘기가 진짜 힘들었다. 쌀은 다 떨어져 가고 아직 햇보리를 수확하기 전이면 어머니는 나물을 잔뜩 뜯어다가 묵은 곡식 한 줌 넣고 푹 끓인 나물죽을 자주 했다. 보드라운 햇나물로만 끓인대도 나물만 들어간 멀건 죽은 맛있다 할 수 없을 텐데 보드랍기는커녕 질기기가 쇠심줄 같은 쇠어빠진 나물로 끓이는 나물 죽은 먹기가 영 고역이었다. 하지만 먹을 거라고는 그것밖에 없으니 어쩌랴. 군소리 없이 먹지 않으면 그나마도 언니 오빠 차지로 돌아가고 나는 한 나절 배를 곯아야 하는 것을.     


보리 베는 남편을 거들다 말고 뛰어 들어와서 점심을 준비한다. 점심이래 봐야 햇쑥이 한창일 때 만들어둔 개떡 반죽을 찌고 어제저녁에 긁어둔 누룽지와 김치, 장아찌가 전부다. 요즘같이 일이 많을 때면 새벽부터 오밤중까지 쉴 새 없이 일하는 남편 앞에 내밀기 면구스런 밥상이다.      


옆 마을 사곡에 술도가가 생겼다. 지난번 은실네 잔치 때도 사곡 술도가에서 술을 받아다 썼다고 했다. 찬꺼리도 마땅찮은데 오늘은 남편이 좋아하는 막걸리를 한 주전자 받아다 줘야겠다. 창식이 녀석을 보내면 딱 좋으련만 아침 먹고 사라진 녀석은 오늘도 저녁 어스름에야 들어올 모양이다. 이웃 형들이랑 어울려  남의 집 보리를 서리해 구워 먹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이다. 하는 수 없이 자는 아이를 둘러업고 주전자를 들고 부지런히 집을 나섰다.     


정신없이 걷다가 문득 눈길을 주니 벌써 지천으로 밤꽃이 한창이다.          



                                                                                                      1963년 6월 어느 날             







공주의 6월은 밤꽃과 함께 시작된다. 4월 연분홍 벚꽃이 피고 5월 하얗게 아카시 꽃이 피었다가 진 산에 어김없이 밤꽃이 핀다.      


뭐니 뭐니 해도 공주의 특산물은 밤이다. 공주에 오면 밤 빵, 밤 파이, 밤 라테 등 젊은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밤 가공식품을 파는 카페가 제법 있다. 그런데 어른들의 입맛을 사로잡을만한 밤 가공식품은 많지 않다. 그도 그럴 것이 뭔가를 만들기 위해 밤을 가공하려면 손이 많이 간다. 밤은 갑옷을 무려 세 겹이나 입고 있다. 따갑고 두껍고 떫은 잘 벗겨지지도 않는 세 겹의 껍데기를 다 까내야 비로소 뭔가를 만들 시도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시작도 하기 전에 지치지 않겠는가..     


지난 일요일에 모처럼 단비가 내렸다. 지독한 봄 가뭄을 완전히 해갈하기엔 부족한 양이지만 그래도 반갑기 짝이 없는 비였다. 창밖으로 제법 비 내리는 풍경을 구경하다가 ‘이런 날은 막걸리를 마셔줘야 하는데...’ 하는 얘기가 나왔고 얼결에 남편과 얘기가 맞아 공주 밤 막걸리도 살 겸 옛날 양조장 구경도 할 겸 나들이 삼아 사곡면에 있는 양조장에 다녀오기로 했다.     


남편이 이곳으로 내려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연한 기회에 들르게 됐다는 사곡 양조장. 지금은 공주의 특산물이 된 밤 막걸리가 아직 유명세를 타기 전 남편은 처음 먹어본 밤 막걸리에 완전히 반했다고 한다. 시원하고 달콤하고 고소한 밤 막걸리. 그 뒤로 한동안 남편은 허물없는 지인들에게 밤 막걸리를 즐겨 선물했다. 집에도 몇 번 가져온 적이 있었는데 막걸리를 즐기지 않던 나는 솔직히 별 기억에 남지 않았다.     


양조장 가는 길은 남편 기억 속의 그 길이었다. 하지만 양조장은 기억 속의 모습과 많이 달랐다. 십 몇 년 전보다 많이 정돈되고 세련된 모습이랄까? (내가 보기엔 전혀 그렇지 않은데...) 약간 서운해하는 듯한 뉘앙스였다. 더 서운한 것은 밤 막걸리를 사지 못했다는 점. 오리지널 밤 막걸리는 6병 단위로만 살 수 있단다. 막걸리 6병을 사서 쟁여두고 먹을 만큼 비가 올 것 같지는 않았다.     


요즘 사곡양조장의 주력상품은 막걸리보다 증류주라고 한다. 한 때 반짝했던 막걸리 붐이 사그라들면서 대부분의 지역 소규모 양조장들이 경영난을 겪을 때 이곳 사곡 양조장은 발 빠르게 증류주를 생산하기 시작한 것이다. 공주지역에서 생산되는 고마나루 쌀과 공주 밤을 50 대 50으로 섞어 만드는 밤 소주는 알코올이 40도가 넘는다. 숙성 기간과 희석 정도에 따라 3종류의 소주를 생산한다. 청주도 있다. 1997년 작고 허름한 양조장을 인수한 지금의 대표는 밤 막걸리, 밤 소주를 개발했고 막걸리와 제조 방식이 다른 증류주를 만들기 위해 제2 공장도 현대식으로 새로 만들었다. 2016년부터는 밤 소주를 수출도 한단다.       


운전대를 나에게 넘기고 이것저것 시음해본 술 좀 마셔봤다는 애주가 남편은 각각의 분명한 이유를 대면서 두 종류의 소주와 청주를 샀다. 밤 막걸리 대신 좁쌀 동동주 두 병과 함께.                    



동네 분들은 큰 통에 술을 받아가셨다.


남편이 픽한 밤술 3종


비 오는 날은 동동주에 두부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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