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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주일장춘몽 Jun 27. 2022

유구에서 떠올려 본 옛날이야기

낯선 눈으로 보고 쓰는 공주

     

우리 공장 사장님은 이북에서 내려온 피난민 출신이다. 평안도 연변인가가 고향인데 6·25 전쟁 통에 부산까지 내려갔다가 알음알음 이곳 공주 유구까지 찾아왔다고 한다.     


사장님이 유구로 온 까닭은 이곳에 예전부터 옷감 짜는 공장이 모여 있었기 때문이다. 사장님네는 이북에서 직물공장을 제법 크게 운영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전쟁이 터지는 바람에 다 두고 쫓겨 내려와 갖은 고생을 하다가 우연한 기회에 유구에 옷감 공장이 모여 있다는 얘기를 듣고 이곳을 찾아왔다는 것이다. 유구에 있는 옷감 공장 중에는 우리 사장님처럼 이북에서 내려온 사람들이 하는 공장이 제법 많다.     


우리 사장님은 다른 공장 사장님들과는 다르다. 본인이 죽을 고생을 해봐서 그런지 고생하는 직원들의 마음을 잘 알아준다. 나처럼 먼 곳에서 유구로 일 하러 온 직원들의 사정을 잘 헤아려 준다. 시골집에 급히 돈이 필요해 어렵게 가불을 신청하면 한 번도 거절하는 적이 없다. 대신 다른 용도로 가불을 신청하면 얄짤없다. 며칠 동안 끝도 없이 이어지는 잔소리 폭탄을 맞지 않으면 그나마 다행이다.      


같이 일하는 사모님은 가끔 김치를 퍼다 줄 때도 있다. 시어 빠진 김치지만 그만큼 만만한 반찬이 또 있을까. 명절 때면 고향에 가지 않은 직원들을 불러 밥을 먹여주기도 한다. 내가 사는 하숙집 할머니도 인정하셨다. 유구 공장 사장 중에 너희 사장 내외가 최고 좋은 사람들이라고. 괜히 헛바람 들어 다른 데 갈 생각 말고 거기 붙어서 착실하게 일하다가 좋은 총각 만나 시집이나 가라고.     


내 동생이자 우리 집 장남 호철이 공부시키고 나면 나도 공부가 하고 싶은데...          



                                                                                                           1967년 3월 어느 날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수국을 보면 떠오르는 말이다. 작은 꽃 한 송이 한 송이는 별 매력이 없지만 그 작은 송이들이 소담하게 뭉쳐서 완성되는 수국은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매년 초여름이 되면 전국의 수국 군락지에 관광객들이 모여든다. 유구도 그런 곳 가운데 하나다. 그래서 나도 수국을 보려고 유구에 갔다.     


길고 지루한 코로나 시국을 보내고 유구는 올해 첫 공식 수국 축제를 개최했다. ‘제1회 공주 유구색동 수국정원 꽃축제’. 축제 때는 사람들이 많이 모일 것 같아 일부러 축제가 끝나고 방문했다. 그런데 사람이 문제가 아니라 축제가 끝났는데도 꽃이 다 피질 않은 게 더 문제였다. 수국 군락지의 면적도 기대보다 작았다. 자연이 하는 일을 사람이 어쩔 수 없으니 서운해하는 것 말고는 할 게 없지만 지천으로 만개한 수국의 모습을 보지 못해서 아쉬웠다.     


대신 눈길을 끈 모습들이 있었다. 수국을 관리하고 행사를 운영하는 어르신들의 모습이었다. 내가 갔을 때만 해도 몹시 가물고 뜨거울 때였는데 시간 맞춰 수국 정원 곳곳에 물길을 열어주고 인생 샷을 남기기 위해 정원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는 관광객들을 호루라기 소리와 손짓 한 방으로 제지하고 조형물들을 정리하는 일을 모두 지역 어르신들이 하고 계셨다. 몇 년 전부터 이곳에 수국을 심기 시작한 것도 모두 이 지역 주민들이라고 했다. 비록 규모는 소박하지만 유구 수국 축제야말로 지역 주민들이 주인이 되어 만들고 운영하는 진정한 지역 행사라는 생각이 들었다.     






유구가 방직업으로 유명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유구는 한국전쟁 이후 1950년대부터 방직업이 성행하기 시작했단다. 전쟁을 피해 남쪽으로 내려온 평안도와 황해도에서 직물업 종사자들이 유구에 모여 방직업을 이어간 것이 그 기초를 이뤘다. 내수는 물론이고 수출까지 한몫할 정도로 유구의 섬유산업은 한 때 승승장구했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자카드 기법을 도입해 천을 짜기 시작한 곳도 유구라고 한다. 시대가 변하면서 유구의 방직업도 쇠락의 길을 걸어왔지만 지금도 유구에는 3대, 4대째 이어오는 방직회사들이 남아있다. 이 회사에서 만들어내는 천이 패션의 본고장 이탈리아로 수출되고 있다니 놀랍고 대견한 일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은 진리다. 공주로 오기 전에는 전혀 알지 못했던 것들을 이곳으로 오면서 알게 된 것들이 제법 많다. 제대로 보고 오래 봐야 그 가치를 알게 되는 것처럼 다 같은 시골인 줄만 알았던 유구도 사곡도 정안도 알고 보니 제대로 보니 오래 보니 아롱다롱 각각의 특성을 가진 지역이었다.      


진짜 문제는 보지 못하는 게 아니라 보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다.                    



유구 섬유역사전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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