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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주일장춘몽 Oct 01. 2022

감영길에서 떠올려 본 옛날이야기

낯선 눈으로 보고 쓰는 공주

오늘은 감영에서 잔치가 벌어지는 날이다. 엄니는 이웃집 두리 엄니를 따라 새벽같이 잔치음식을 만들러 감영에 갔다. 솜씨가 좋은 엄니는 감영에 잔치가 있을 때마다 불려 간다. 새벽 댓바람부터 일 나가느라 엄니는 변변한 아침 거리를 준비하지 못한 모양이다. 부엌에는 어젯밤에 먹다 남은 콩깻묵 죽 사발이 놓여 있다. 그릇의 절반도 채 되지 않는 양이다. 그나마도 엄니는 죽 한 술 못 뜬 헛헛한 속으로 새벽길을 나섰을게 뻔하다.     


지금쯤 온 동네 배고픈 개들이 감영 근처에 몰려 낑낑대고 있겠지. 아침부터 기름 냄새가 감영 주변에 좍 퍼졌을 테니 왜 안 그렇겠는가. 개들뿐이랴. 노상 저잣거리에 한 자리 차지하고 앉아있는 거지들도 감영 앞으로 몰려가 자투리로 버려지는 음식 없나, 던져주는 음식 없나 눈에 불을 켜고 곯은 배를 움켜쥔 채 기름 냄새만 들이키고 있을테지.    


지금까지 딱 한 번 감영 잔치 준비를 직접 본 적이 있다. 두어해 전이던가 그때도 엄니가 잔치 준비로 감영에 가는데 일을 하려면 아직 젖먹이였던 순임이를 데리고 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때를 맞춰 내가 순임이를 업고 일하는 니한테 가서 젖을 먹이고 데려와야 했다. 자꾸만 흘러내리는 순임이를 추어 업고 감영까지 가는 길은 너무 멀고 힘들었지만 감영길 어귀부터 퍼지는 고소한 기름 냄새를 맡으니 절로 침이 고였다. 엄니가 순임이에게 젖을 물리는 동안 행주치마에 몰래 싸다 준 생선전 두 점을 받아먹었다. 따끈하고 입에서 살살 녹던 생선전의 고소한 냄새와 맛은 지금도 자려고 누우면 언뜻언뜻 생각날 정도로 기가 막혔다. 그 생선전이 지금 기름 위에서 지글지글 익고 있을 텐데...     


감영 근처에는 절대 얼씬도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지만 오늘만큼은 불쌍한 엄니 말 잘 듣는 착한 딸 노릇을 하지 못할 것 같다. 어떤 핑계를 대야 감영에서 일하고 있는 엄니를 만나러 갈 수 있을까? 순임이가 잠에서 깨면 무서운 얘기를 해서 울려볼까? 아직 걸음이 여물지 못한 순임이를 슬쩍 밀어 무르팍을 조금만 깨뜨려볼까?          



                                                                                                185810월 어느 날               






감영(監營) 조선시대 각 지역의 관찰사가 업무를 보던 관청. 조선의 감영은 모두 8곳에 있었으며 오늘날의 도청에 해당한다.     


충청도의 감영은 원래 충주에 있던 것이 1602년 선조 대에 공주로 이전됐다. 한마디로 조선 후기 공주는 충청의 중심지였다는 뜻이다. 일제강점기였던 1932년 대전으로 도청이 이전된 후  충청의 중심이 공주에서 대전으로 이동했지만 공주는 330년간 명실상부한 충청의 핵심이었다.     


관청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감영은 대부분의 건물이 철거되어 사라졌다. 포정사 문루와 선화당, 동헌이 국립공주박물관 충청감영복원지에 남아있다.     


감영은 사라졌지만 감영길은 남았다.

감영길은 공주 원도심의 중심이라 해도 손색이 없다. 감영길을 중심으로 요즘 공주에서 가장 핫하다는 장소가 모여 있다. 다양한 콘셉트의 카페, 공주를 검색하면 가장 앞쪽에 뜨는 작고 개성 있는 상점, 족히 몇십 년은 너끈히 그 자리에서 버텼을 노포 등등 신구를 아우르는 감영길만의 독특한 분위기가 분명히 있다.     




감영길의 중심을 잡아주는 것은 뭐니 뭐니 해도 공주대학교 사범대학 부설고등학교의 정문이다. ‘저게 중·고등학교 정문이라고?’ 옛 공주 감영의 정문 격인 포정사 문루를 재현해서 만든 공주사대부중고의 정문은 사전 정보가 없다면 일반 학교의 출입문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공주사대부고는 전국단위 자율고라 전국에서 모인 학생들이 기숙사에서 생활한다. 반적인 등하교 시간에 (고둥)학생들을 볼 수 없어서 더 학교 정문인 줄 몰랐다.




‘가가상점’, ‘Cream of X'’, ‘반죽동 247’ 등 요즘 공주와 관련된 SNS에 가장 많이 언급되는 장소들이 대부분 감영길에 위치한다. 어찌 보면 칙칙하다 느낄 수 있는 원도심의 분위기를 밝고 세련되게 바꿔주는 곳들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다 보니 휴일이면 공주를 찾아온 여행객들을 가장 많이 만나는 장소이기도 하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더 애정이 가고 눈길을 사로잡는 곳은 이런 곳들이 아니다. 참고서·잡지·단행본 등을 파는 오래된 서점, 민화·손글씨·국악기 등을 가르치고 작업하는 공방, 학생백화점, 작은 미술관 등등 대도시에는 사라져 버린 추억 속의 장소들이 이곳에 남아있다. 어릴 때 엄마 손잡고 다녔던 인사동, 종로, 삼청동의 모습을 다시 만나는 느낌이라고 할까.      






감영길은 길 자체가 하나의 문화 공간이라는 느낌이 든다. 꼭 멋지고 세련된 것만 문화가 아니니까. 작고 오래됐어도 이야기가 있고 의미가 있으면 그게 바로 문화가 아닌가. 감영길 인근은 간판도 담벼락도 재미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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