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교단 일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조제 Sep 20. 2020

시험감독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학생들이 시험을 치르는 50분간 감독교사는 가만히 서서 아무 것도 못한다(물론 감독은 한다). 일반 직장인과 비교했을 때 교사의 시험감독 업무는 일종의 꿀업무로 보일 수 있겠다만, 개인적으론 차라리 수업을 하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조용히 그리고 가만히 서있는다는 게 생각만큼 쉽지가 않다. 우선 다리와 허리가 너무 욱신거리고, 또 학생들만 바라보며 멍하니 서있으려니 심심하다. 학생이 OMR카드를 교체한다거나 수정테이프 등을 빌려달라고 손을 들면 반갑기까지 한 이유이다. 하여 시험 감독교사로 들어가면 나는 그들의 애먼 정수리만 쳐다보고 또 쳐다본다. 가르마가 참 반듯하네. 공부하느라 고데기 한 번 안 했을까? 머릿결 참 좋다. 괜히 부스스한 내 머리칼을 손으로 한 번 쓸어내린다. 오늘은 기필코 미용실에 들러 상한 머리카락을 잘라내야겠다고 다짐한다.


 교실을 쭈욱 둘러보니 수능이 끝났다고 남학생, 여학생 할 것 없이 머리를 많이도 볶아왔다. 과도하게 탱글탱글한 컬이 아직 어색하면서도 나름 귀엽다고 생각했다. 평소 거울도 잘 안 볼 것 같은 남학생들이 파마를 하고 앉은 걸 보면 그들의 외모에 대한 관심을 훔쳐보는 것 같아 특히 재밌다.

  머리 구경도 잠시, 내 인생에 50분이라는 시간이 이렇게나 길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퇴근하고 나서는 샤워하고 잠시 숨 돌리려고 보면 두 시간은 지나있던데, 참 이상한 일이다. 무엇을 해야 절대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이 시간이 갈지 생각한다.


  안경 쓴 학생을 세기 시작했다. 스물네 명 중 정확히 반인 열두 명이나 안경을 쓰고 있다. 생각보다 눈 나쁜 사람이 많구나. 이게 다 스마트폰의 영향인가? 시계를 보니 시간이 채 일분도 흐르지 않았다. 왼손으로 문제를 풀고 있는 학생들을 세기 시작했다. 스물네 명 중에 세 명이 왼손잡이이다. 한 반의 1/8이 왼손잡이인 셈이다. 생각보다 많지는 않네. 자연스레 왼손잡이인 남동생을 떠올렸다. 나는 오른손잡이여서 남동생 왼쪽에 앉아 밥을 먹을 때마다 되게 걸리적거렸는데. 의미 없는 상념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역시나 일분도 흐르지 않았다. 아니, 안경 쓴 사람도 세고, 왼손잡이도 찾아내는데 채 이 분도 안 걸린다고? 내가 원래 이렇게 빠릿빠릿한 사람이던가?

  무엇을 해야 시간이 빨리 갈까 생각하다 보니 어느새 나도 모르게 지나간 인연들을 생각하고 있다. 쓰고 나니 지나간 인연이라는 표현이 마음에 든다. 인연도 지나갈 수 있는 거다. 인연이기 때문에 절대로 지나 보낼 수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무언가 틀어지기 시작하는 것 같다. 지나간 인연도 있고, 아직 곁에 머무르는 인연도 있고, 다가올 인연도 있고 뭐 그런 거 아닐까. 인연이면 다시 만날 거다, 라는 말을 흔히들 하는데 앞선 이유로 나는 인연이라고 꼭 다시 만날 필욘 없다고 본다. 인연이라면 다시 만나겠지, 란 말을 함으로써 지나 보낸 인연을 부정하고 싶진 않다.

  확실히 왼손잡이에 대해 생각할 때보다는 시간이 빨리 갔다. 지루한 시간 좀 견뎌보겠다고 평소 애써 덮어두었던 기억까지 들춰내는 걸 보면 시험 감독의 시간이란 무서운 것 같다. 어쨌거나 앞으로 내가 학생들 가르치는 일을 계속하게 된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을 시험감독을 하면서 보내야 할까. 그렇다면 그 시간들은 의미 있는 시간일까, 의미 없는 시간일까? 이 지루한 시간들을 견디려면 지나간 인연들을 더 많이 만들어야 할까? 참 멍청한 생각이다.


(2018년 11월 29일 교단 일기)



예전에 블로그에 썼던 일기인데 그 밑에 달린 친구의 댓글.


난 실습 갔을 때 내 옆에 있는 학생 눈썹을 관찰했지... 너무 잘 그렸더라...


사람 사는 거 다 똑같다.


매거진의 이전글 메탈 시계 차는 법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