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5:16
‘코로나 시대에 크리스천으로 산다는 것’이라 제목을 달아놓으니 무언가 대단한 결심이나 비장한 삶의 태도에 관한 글 같아 보이지만 전혀 아니다. 지금은 코로나 19 바이러스가 창궐하는 시대이고, 나의 정체성은 크리스천(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니 그 둘을 합쳐 제목을 정했을 뿐이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있다 하여 내가 넌(non)크리스천이 되는 게 아니고, 내가 크리스천이라 해 코로나 바이러스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니 어쩔 수 없이(?) 같이 갈 수밖에 없단 의미에서다. 쓸데없이 제목에 대한 변이 긴 것 같지만 꼭 그렇다고 말할 수만은 없는 게 앞으로 내가 쓰게 될 글들은 대단한 종교인의 각오라기 보단 일상 속 작은 실천들에 대한 내용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제목에서 받을 수 있는 쓸데없는 비장함에 대한 해명이 필요했다.
요즘은 어디 가서 ‘나 예수 믿어요’라고 말하기 참 민망하다. 업무 차 들른 교장실에서 관리자로부터 ‘교회 다니세요? 방역 수칙은 잘 지키면서 다니시는 거죠?’라는 질문을 받았다. 전혀 공격적이지 않은, 젠틀하기까지 한 말투였는데 공격당한 것처럼 느꼈다. ‘크리스천=방역수칙 브레이커’란 등식이 사람들 머릿속에 이미 꽉 들어차 버린 걸까? 모든 크리스천은 모이지 말라고 말라고~ 하는데도 기어이 교회에 나가고, 마스크를 벗어던지고 찬송을 불러댄다고 생각하는 걸까?
“하나님 꼼짝 마. 까불면 나한테 죽어”라는 말이 ‘목사’라고 불리는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걸 보면서, 그리고 그 앞에서 ‘아멘’이라 반응하는 사람들을 보며 내가 느낀 감정은 뭐라 형용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그들은 참 하나님을 믿는 게 아니라고’, ‘정말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아는 사람들의 행동은 저럴 수 없다고’라고 선을 긋기엔 또 께름칙했다. 나와 아주 가까운 누군가가 그 무리에 속했을 땐 그렇게 단언하기가 쉽지 않다. 또한 누군가의 신앙을 그들의 잘못된 지식과 선택만으로 단정하여 판단하는 것이 옳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물론 전목사의 대한 나의 생각과 태도는 확고하나, 여기서 말하는 ‘그들’은 전목사 세력을 따르는 크리스천을 의미한다) 그러나 선긋기의 께름칙함은 무엇보다도 외부의 시선을 의식하는 것에서 기인한다. 기독교 ‘내부'의 분열과 다툼, 선을 긋는 행위가 외부의 입장에서는 얼마나 웃기게 보일지 가늠이 가기 때문이다. 꼭 이번 코로나 19를 겪으며 한국교회가 보인 모습 때문이라곤 할 수 없다. 이미 한국 교회는 개독교라는 비판을 끊임없이 들어왔음을 부정하기 힘들다.
혹 크리스천인 분이 이 글을 읽다가, ‘코로나 19 때 방역 수칙을 잘 지키고, 이웃 사랑 실천에 앞장선 교회들도 많은데 일부 교회의 몰상식을 너무 일반화시켜서 한국교회 전체에 대해 비판하는 게 아닌가?’라는 불편함을 느낄 수 있다. 그런 일반의 시각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 아니, 다른 누구보다도 내가, 그렇게 항변하고 싶은 마음이다. 그럼에도 지금과 같은 시기에 그러한 구별이 하나님의 영광을 회복하는데 어떤 ‘효용’이 있는지 모르겠다. 물론 복음을 왜곡시키는 것처럼 보이는 특정 교회들의 문제점을 비판하고 자정해나가려는 노력은 ‘사랑 안에서’ 계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과는 다른 ‘진짜’ 크리스천이라 생각하는) 우리가 끊임없는 사랑의 실천을 외부에 증명해 ‘보이지’ 않는다면 그들과 무엇이, 얼마나 다르다고 할 수 있을까? 꼭 코로나 19와 관련된 문제가 아니고서도 마찬가지다. 어느 한쪽의 말이 맞다고 명쾌하게 결론 내리기 어려운 많은 문제들 앞에서 기독교인들끼리 서로가 서롤 욕하고 분열하는 모습을 많이 본다. 우리는 외부에 무엇을 전달하고 있을까? 기독교가 개독교가 된 것에 내 책임이 없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마치 짜장면-탕수육 세트처럼 코로나-교회 기사가 끊임없이 쏟아진다. 기사에 달린 댓글은 차마 옮겨 적을 수 없을 만큼 적나라하고, 교회(그리고 그들이 믿는 신)에 대한 외부의 조롱과 분노를 고스란히 반영한다. 내가 거의 평생을 속한 한국 교회가 이렇게나 싸잡아 욕을 먹는 현실 앞에서 한동안 무력했다. 그들이 그렇게도 욕하고 조롱하는, 내가 믿는 신 앞에서 무릎 꿇고 하소연하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게 없다 느꼈다. 그렇지만 코로나 19는 종식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언젠가 끝난다 해도 기독교에 대한 외부의 분노까지 함께 종식될 리 만무했다. 그럼, 이렇게 있을 수만은 없었다. 내가 평생을 믿고 따르기로 한 신의 존재를 의식한다면(어쩌면 그 믿는 행위 자체를 지속하려면) 천천히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실천을 하는 것 외에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그리고 그것들을 기록해보려 한다. 그렇게 하는 것밖에는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그렇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