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백목련 Feb 01. 2019

어쩌다 UX 디자이너.

시작.

미국에서 살아야겠다거나 특히 시애틀에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은 딱히 없었다. 2012년 앱 개발을 하던 한 친구가 wwdc 갔다가 우리 공통 친구들이 있는 실리콘 밸리에서 몇 주 더 놀고 올 거라고 했다. 당시 대학에서 봄학기 강의를 하던 나는 학기 끝나면 합류하라는 그 친구의 계속되는 꼬심에 넘어가 2주짜리 비행기 왕복권을 끊고 종강 후 샌프란시스코로 떠났다.


나름 국내 최초로 ux 디자인 교육 과정이 잘 갖추어져 있던 학부를 다닌 덕에 의도치 않았지만 일찍부터 ux라는 단어를 접했고, 2000년대 초반 대기업의 ux팀은 전부 우리 과 선배들이 이끄는 것 같았다. 그런데 나는 그래픽 디자이너가 되고 싶었다. 8년에 걸쳐 천천히 학부 4년 과정을 마치는 동안 작은 내 브랜드를 만들어 장사를 해 보고, 교환 학생 프로그램을 다녀오고, 그래픽 수업을 들으러 다른 학교에 가 보고, 딴짓을 꾸준히 하면서 내가 잘하는 것 그리고 좋아하는 것이 그래픽 디자인이라고 생각했다. rgb가 아닌 cmyk를 가지고 놀거야 하는 꽤나 거만한 다짐을 담아 mkc - mokryun baik communication - 라는 개인사업자를 냈다. (cmyk에서 black의 k를 따듯 나도 baik의 k를 따와 끼워 맞췄다.) 학부 3학년 여름방학 때 ktf (현 kt) 모바일 ui팀에서 인턴을 하면서 나는 취직을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한 뒤 어쩐지 당연한 듯 취업 생각은 한 번도 하지 않았다.


나를 실리콘 밸리 여행에 합류시킨 그 친구는 rgb에 별 흥미도 없고 아이폰을 전화기로만 사용하던 나에게 앱을 만들어보자, 재미있는 걸 만들어보자, 이 앱을 깔아봐라, 코딩을 배워라 하고 부추겼다. 죽이 잘 맞는 오래된 친구이기도 했지만 나에게는 신문물 전도사이기도 했다. 예를 들어 트렐로에 아이디어 보드를 만들어 날 초대한 덕분에 나는 덩달아 트렐로 초기 유저가 되었다. y 100%의 샛노란 배경에 새까만 텍스트로 채운 내 포트폴리오 웹사이트를 당시 본인이 일하던 회사 사장에게 보여주고 나를 디자이너로 채용하자고 추천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건재한 회사의 창업자이자 사장인 그 사람은 역시나 충분히 똑똑하고 사람 보는 눈이 정확했는지 내가 디지털 프로덕트 디자이너가 아니라 아티스트에 가깝다고, 본인의 회사에 적합하지 않다고 거절했다.


2012년 6월 22일, 별생각 없이 샌프란시스코 공항에 도착했고 nasa에서 인턴을 하던 과 선배가 마중을 나왔다. 우리는 먼저 wwdc로 떠났던 그 친구와 구글에서 일하던 다른 친구, 오라클에서 일하던 또 다른 친구, 링크드인에서 일하던 또 다른 친구, 그리고 그중 한 친구 회사 직원 할인을 받아 미리 주문해둔 내 인생 첫 맥북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구글 캠퍼스로 향했다.



문득 뒤를 돌아볼 때면 내가 어쩌다 여기까지 오게 된 시작은 그 친구가 분명하다는 생각에 실없는 웃음이 난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