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로 만드는 에세이
*5억 년 버튼
한 때 커뮤니티에서 5억 년 버튼이라는 만화 속의 철학적 논제가 유행을 했던 적이 있다. 이 논제는 간단하다. 만약 당신의 눈앞에 누르기만 하면 천만 원을 얻을 수 있는 버튼이 생긴다. 하지만 버튼을 누르는 순간 당신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시공간으로 이동해 5억 년의 시간을 꼼짝없이 의식이 있는 채로 존재해야 한다. 그러나 5억 년이 지나고 나면 당신은 다시 원래의 시공간으로 돌아온다. 기억은 지워지고 당신은 아주 찰나의 시간이 지난 것을 느낀 뒤 천만 원을 얻는다. 누르겠는가? 이때 중요한 것은 이미 당신의 눈앞에서 누군가가 이 버튼을 열심히 누르며 천만 원의 이득을 얻고 있다는 사실이다.
나는 이 질문에 이렇게 대답하기로 했다. '내가 이 버튼을 눌렀을 때 5억 년의 고통을 겪을 나를 이 질문에서 이미 알게 되었으니 기억이 사라진다 해도 그것은 나의 고통과 다를 것이 없다. 그것이 가상이라 하더라도 나-1의 고통을 나와 분리할 수 없다. 그러니 나는 버튼을 누르지 않겠다.'
그런데 만약 누군가가 이 버튼을 내게 소개하며 그냥 버튼만 누르면 천만 원을 얻는다는 감언이설을 했다면 어떨까? 그리고 버튼을 백 번이나 누른 뒤에 사실은 이 버튼은 5억 년 버튼이었다.라고 말해준다면? 나는 고통을 겪은 것일까? 아닌 것일까?
*노을이 지는 것은 왜 슬픈가?
과거 방송에서 배우 윤여정 선생님은 저물어 가는 노을과 석양의 슬픔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 과거에 나는 그 이야기에 깊게 공감하지 못했다. 그냥 아, 그렇구나 정도의 공감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나이가 되고 시간이 지나고 나니 나는 그 말에 깊게 공감하기 시작했다. 한여름의 저녁 빛이 저무는 한 켠의 하늘을 보고 있자면 나는 지키고 싶은 것들과 놓기 싫은 것들이 떠오른다. 그리고 하염없이 슬픔이 밀려온다. 이처럼 노을이 지는 것은 왜 슬픈 것인가? 우리가 어린아이일 때 이것을 공감하지 못하는 것은 노을이 진다는 이미지와 텍스트 안에 담긴 수많은 감정과 이야기를 알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삶의 굴레는 어제와 같이 오늘도 어김없이 돌아가고 그 안에는 수많은 생과 죽음이 뒤섞인다. 결정적으로 주체인 '나'의 입장에서 저무는 태양은 나의 과거를 의미하며 가까워지는 죽음을 상기시킨다. 지켜내지 못한 약속과 하염없이 슬퍼질 수밖에 없는 무언가를 그리며 우리는 지난한 하루를 끝낸다.
*고타마 싯다르타
여기까지의 이야기에 다르고 나니 그렇다면 인간의 고통, 슬픔은 아는 것에서 시작되는가?라는 질문을 하게 될 수 밖에 없다. 이제 고통에 대해 가장 심도 있게 이야기한 인간, 고타마 싯다르타의 이야기를 해보자. 고타마 싯다르타의 탄생과 생애는 대부분의 영웅 서사시와 다를 게 없다. 마야 부인의 겨드랑이에서 태어나 천상천하 유아독존을 외치며 일곱 걸음을 걷는 아기 고타마 싯다르타는 마치 아킬레우스처럼 나와는 완전히 다른 인간처럼 느껴진다. 그의 탄생을 알게 된 예언가가 싯다르타의 아버지 정반왕을 찾아가 싯다르타는 출가하지 않으면 세계를 호령하는 왕이 될 것이고 출가하면 인류를 구원하는 구원자가 될 것이라 말한다. 아버지 정반왕은 싯다르타가 당연히 왕이 되길 바랬고 그를 애지중지 키운다. 하지만 싯다르타는 싹부터 달랐는지 여러 가지 경험에서 자꾸만 존재자의 고통과 번민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왕은 태자 싯다르타가 여름성과 겨울성을 옮겨 다니고 음식과 여색을 즐길 수 있도록 준비하고 성 안을 아주 호사스럽게 만들어둔다. 하지만 스물아홉이 된 싯다르타는 성 밖을 나가게 되고 성 밖에서 인간의 생로병사를 목격한다. 그리고 그는 출가를 결심한다.
*트루먼 버뱅크
전 세계에 자신의 삶을 노출하는 트루먼은 어느 날부터 자기 삶에 하나 둘 균열이 가는 것을 느끼게 된다. 모든 것들이 트루먼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세트장 속에서 아이러니하게도 트루먼은 삶의 주인공이 되고 싶어 한다. 거울을 보며 연기를 하고 유명해지고 싶어 했던 트루먼은 여러 가지 트라우마를 이겨내지 못하고 좁은 섬 씨 헤이븐에 갇혀 아주 단순한 인생을 강제적으로 연기하며 살아가고 있다. 재미있게도 트루먼이 과거에 겪었던 일들은 현재의 트루먼이 자기 삶의 주인공으로 인식하고 의심토록 만든다. 일련의 파편화된 사건들이 하나둘씩 모이기 시작하다가 마침내 임계점을 넘어 버린다. 30여 년의 세월 동안 자기 삶 속에 쌓여있던 의심의 물방울들이 하나 둘 모여 양동이를 가득 채워 버린 것이다. 서른 살의 생일이 가까워지던 그는 마침내 자신의 모든 것들이 쇼이자 가짜였으며 누군가에 의해 꾸며진 것임을 자기 손으로 직접 알게 된다. 크리스토퍼가 만든 세계의 성 벽의 문을 여는 트루먼은 크리스토퍼의 말을 듣지 않고 자신만의 인사로 끝을 남긴 후 사라진다.
*트루먼과 싯다르타
자기 세계의 균열을 느끼던 두 인물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자기 세계의 벽을 넘게 된다. 트루먼은 자신의 가장 절친의 위로조차 연기임을 알게 되고 자신의 트라우마를 넘어 바다를 향해 항해한다. 싯다르타는 부왕에게 가 자신의 뜻을 전한다. 아버지는 싯다르타를 회유하지만 통하지 않는다. 그리고 싯다르타는 자신의 아내가 아들을 낳았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하지만 싯다르타는 우리가 익히 아는 대로 성을 떠난다. 트루먼 버뱅크는 고타마 싯다르타를 현대 서양문화의 대중들이 더 공감하기 쉬운 인물로 이식된 것처럼 느껴진다. 두 인물이 자신의 삶을 개진하게 되는 공통점은 '앎'이다. 싯다르타는 필멸자의 앞에 놓인 운명 속 고통에 대해 알게 되고 트루먼은 이 세계의 부정함, 왜곡된 진실에 대한 앎이었다. 정반왕과 크리스토퍼 두 인물 모두 자신의 아들(싯다르타, 트루먼)이 자신이 만든 규칙 세계에서 살아가길 바랬다. 그러나 그것은 허황된 꿈이었다. 부모의 규칙 세계에 갇힌 자녀는 장애를 갖게 마련이다. 자식은 언젠가 반드시 부모를 넘어서며 부모는 자식이 떠나는 뒷모습을 허무하게 바라봐야 한다. 트루먼은 마지막 인사를 남기고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세계를 향해 나아간다. 싯다르타는 밤 사이 아내와 아들을 두고 몰래 성을 빠져나간다. 그 역시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세계를 향해 나아간다. 싯다르타는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되었단 사실을 알 수 있지만 트루먼은 이야기의 불씨가 살아남아 그가 그 뒤에 어떻게 되었는가? 하는 상상력을 펼칠 수 있게 됐다. 트루먼은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나는 그가 평범한 인간으로 평범한 능력을 펼치며 평범한 사랑을 하고 어딘가에 앉아 저물어 가는 석양을 보며 슬퍼했을 거다.라는 상상을 한다.
*세계의 지평 (개인적인 사유)
그래서 아는 것은 고통인가? 극단적인 예를 설정해보자. 만약 내가 현재 백명의 노인을 알고 그들과 정말 친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해보자. 그렇다면 나는 앞으로의 10여 년 간 그들의 죽음을 기다리게 된다. 내가 그들을 모른다면 슬플 일은 없을 것이다. 이 말은 사랑을 하지 않으면 헤어질 일이 없을 것이니 사랑하지 말자라는 것과 동의가 된다. 어찌 됐던 앎은 고통이 되는 것이 맞지 않은가? 내가 버튼을 눌러 십억을 벌었지만 그 버튼이 5억 년 버튼인 줄 모른 채 평생을 살면 어쨌든 그것은 없는 일이 되지 않는가?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그러하다. 제3세계에서 벌어지는 아동학대와 아동 성매매, 그리고 매일 대두되는 장애인 인권 문제 등 이 모든 것에 무지하다면 우리는 이것에 대해 신음할 필요가 없어진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해 무지하다면 나는 우크라이나의 시민들의 죽음에 잠시라도 애도할 감정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고타마 싯다르타는 이 모든 것들을 넘어선 존재자의 필연, 앎 이상의 고통에 대해 이야기한다.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고의적으로 신음할 필요는 없다. 자신이 주어진 삶 속에 주어진 슬픔만큼만 감내하는 것이 인간의 생존 방식에 유리하다. 그 이상의 세계를 보고 구도를 걷는 것은 고타마 싯다르타와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인물들이 할 일이다. 하지만 결국 세계의 지평이 넓어지는 것은 아무도 막을 수 없다. 갓난아기처럼 인큐베이터에서 살아가지 않는 한 우리는 무슨 일을 하던 누구를 만나던 우리의 세계는 점점 더 커질 것이고 언젠가는 균열이 갈 것이다. 그때 우리는 알게 된다. 다시는 이전처럼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그때 우리는 반드시 성장하게 된다. 트루먼과 싯다르타 두 사람의 성장 이야기에서 가장 장애가 되는 것은 아마 '더 이상 균열되지 않는 세계'일 것이다.
그러니 만약 내가 5억 년 버튼을 백번을 누르고도 그 사실에 대해 까맣게 모른 채 살아갔다면 그것은 좋은 일이 아니다. 나는 그 균열을 눈치채지 못한 채 트루먼처럼 자기 삶의 일부를 누군가에게 조정당한 것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