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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작나무숲 Aug 21. 2022

[도시 기행2] 태백 - 한강과 낙동강 물줄기가 시작


태백 여행



- 매년 10월 3일 태백산 천제단에서 천제를 올려

- 한 때는 인구 13만 명을 자랑하는 도시, 지금의 소멸의 위험에 처해 


태백은 그 이름만으로 어쩐지 신비스럽고 신령스러운 도시라는 느낌이 드는 도시다.


‘태백’이라는 지명은 우리나라 단군신화와 연관이 있다.

태초에 하늘나라 하느님(환인)의 아들인 환웅천왕이 우리 민족의 터전을 잡은 곳이 바로 ‘태백산 신단수 아래’였다. 사람들은 태백산은 곧 하늘과 바로 통하고 하늘로 올라가는 통로라고 생각했으며 신단수 아래서는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신비롭고 성스러운 산으로 여겼다.

사람들은 원래의 태백산(백두산)과 백두산과 가장 비슷한 산을 찾아 ‘태백산’으로 부르고 옛 풍습대로 제사를 지내기 시작했는데 그곳이 바로 태백시 태백산 (해발 1,567m)이다. 2016년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태백산 정상에는 천제단이 있어 매년 개천절인 10월 3일 천제를 올린다.


태백산 외에도 연화산, 함백산, 매봉산, 대덕산 등에 둘러싸여 있는 태백시는 원래는 삼척군 장성읍, 황지읍이었다. 장성이라는 지명은 장생에서 유래한 것으로 태백산 천제단으로 향하는 길목에 장생,(장승)이 많아 붙여진 이름이다.


1981년 7월 1일 인구 과밀 해소와 국토 균형 발전 정책에 따라 장성읍과 황지읍을 삼척군에서 분리해 태백시로 승격시켰다.


한때 태백시는 지나가는 강아지도 1만 원짜리 지폐를 입에 물고 다닌다고 할 정도로 호황을 구가했었다.

장성에 탄광촌이 생성되기 시작한 것은 1930년대 초반부터이다. 그전에는 화전을 일구고 산골 마을로 콩이나 옥수수 등을 재배하던 화전민촌이었다.


1960년대 이후 산업화로 인해 석탄 산업이 호황을 누리던 시기 태백에는 검은 돈이 몰리는 활기찬 도시였다. 장성과 황지 인근에 크고 작은 석탄 광산이 마흔다섯 개나 있었고 탄광 일대에서 영업하던 유흥업소가 500개가 넘었을 정도였다. 시로 승격한 1981년 도시 인구는 13만 명에 육박했다.


그러나 태백시가 호황을 누렸던 시간은 불과 10여 년 남짓에 불과하다. 80년대로 접어들면서 석탄산업은 사양길로 접어들었고, 문을 닫는 탄광이 늘기 시작했다. 급기야 1989년 비경제적인 탄광은 정리하고 경제적인 탄광만 집중 육성한다는 내용의 ‘석탄산업합리화 정책’이 발표되었고 그와 동시에 태백, 정선, 영월, 삼척이 폐광 지역으로 결정되었다.


이후 이들 도시들은 급격한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80년대 한 때 13만에 달했던 태백시 인구는 급격히 줄어 2022년 6월 말 기준 4만 85명에 불과하다. 마흔다섯 개에 달했던 탄광은 모두 폐광되고 장성광업소, 태백광업소만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게다가 장성광업소마저 2024년 폐광될 예정이라 지역 경제에 심각한 타격이 우려되는 상황이다.


태백 황지연못


모든 유기체가 생성에서 소멸에 이르는 발전 과정을 거치듯 도시도 예외일 수는 없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어떤 도시에 대한 사람들의 관념은 도시의 발전 과정과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많은 듯하다. 태백이라는 도시도 그중의 하나이다.

60년대 이후 생성된 ‘탄광 도시’라는 관념은 2020년대에 접어든 지금까지도 오래된 상품의 태그처럼 태백시를 따라다닌다. ‘탄광도시’라는 태그는 너무도 강렬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태백시의 아름다운 자연과 문화유산을 들여다볼 생각조차 하지 않게 만들었다. 적어도 필자에게는 그랬다.


태백 여행을 계획하는 동안에도 태백에 대한 선입견을 버리지 못했음을 인정한다. 동시에 태백시에 들어서는 순간 태백시에 대한 필자의 관념들이 얼마나 낡고 잘못된 것이었는지를 깨닫는 데에 수 초도 걸리지 않았음을.

길동무가 되어준 수려한 풍광의 산세와 맑은 공기는 얼토당토하지 않게 ‘알프스 기슭의 아름다운 관광 산악도시’를 떠올리게 한다. 그 느낌은 ‘황지’ 근처에 오게 되면 더 강렬해진다.


숙소에 짐을 풀고 제일 먼저 찾아 나선 황지연못은 낙동강의 발원지란 거대한 수식어에 비해 너무도 소박했다. 차를 가지고 갈까 하는 고민조차도 필요 없을 정도로 숙소에서 지척이다. 태백역이나 버스터미널에서도 5분 거리이다.

크고 작은 연못이 있고 연못을 중심으로 조성된 공원은 도심의 근린공원보다도 규모가 작다. 공원을 산책하고, 벤치에 앉아 대화를 하고, 아이들은 황지천에서 물놀이를 한다. 너무도 평화로운 시골 마을의 저녁나절의 풍경이다.


황지 입구에 세워진 ‘낙동강 천삼백 리 예서부터 시작되다.’라고 쓰인 거석만이 이곳이 낙동강의 발원지임을 알리고 있다.황지 연못은 상지, 중지, 하지 등 크기가 제각기 다른 연못 3개로 구성되어 있다. 가장 큰 상지의 경우 둘레 100미터, 중지의 경우 50m, 하지는 약 30m 남짓의 아담한 연못이다.


상지의 남쪽에 깊이를 알 수 없는 수굴이 있고, 이 수굴에서는 하루 5천 톤 이상의 맑고 차가운 물이 솟아난다. 이 물은 황지천을 이루고 낙동강과 합류하여 경상남북도와 부산을 거쳐 남해로 흘러든다.

동국여지승람과 대동지지 등 옛 문헌에 황지가 낙동강의 근원지로 기록되어 있으며, 특히 동국여지승람에는 “황지가 낙동강의 근원지로서 관아에서 제전을 두어 가뭄이 들면 기우제를 올렸다.”라는 기록이 있다. 매년 7월에 낙동강 발원제가 열린다.


황지 연못에는 ‘황부자의 전설’이 전한다.

마을에 매우 인색하고 괴팍한 황씨 성을 가진 부자가 있었다. 하루는 한 노승이 황부자 집을 찾아와 시주를 청했다. 황부자는 시주 대신 쇠똥을 주었다. 이를 본 황부자의 며느리는 노승에게 대신 사죄하고 몸에 묻은 쇠똥을 닦아 준 후 쌀 한 바가지를 시주하였다.



노승은 “이 집의 운이 다하여 곧 큰 변고가 있을 것이니 살고 싶거든 나를 따라 오시오. 그러나 절대 뒤를 돌아봐서는 안 되오.”라고 일렀다. 며느리는 노승을 따라나섰다. 이들이 삼척군 도계읍 구사리에 이르렀을 때 뇌성벽력이 치며 황부자의 집이 땅속으로 꺼져 들어갔다. 그런데 며느리가 노승의 말을 어기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 순간 황부자는 이무기로 변했고 며느리는 바위로 변해버렸다.


이후 황부자의 집터는 황지가 되었고 며느리는 삼척시 도계읍 구사리에 미륵바위가 되었다고 한다. 연못의 한 귀퉁이에 황부자 집터라는 푯말이 보인다.


황지연못 옆으로는 복원된 황지천이 흐르고 천변의 태백 중앙로 상점가에서는 매주 금요일과 토요일 ‘황부자 며느리 야시장’과 프리마켓이 열린다. 청년들이 운영하는 야시장에서 태백시 물닭갈비, 수제 버거, 태백 한우 등을 맛볼 수 있다.

바람을 타고 오는 음식 냄새가 코끝을 자극하고 매장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소리와 파도처럼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사람들의 움직임이 한 여름밤을 기분 좋게 수놓는다.


그런가 하면 한편에서는 작은 음악회가 열리기도 한다. 해발 900미터의 고원에서 울려 퍼지는 바이올린 선율은 마법처럼 태백을 천상의 도시로 만들어 놓는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한 여름에도 가을처럼 선선하다.

한강의 발원지인 검룡소도 태백시에 있으니 시간이 된다면 함께 둘러보기를 권한다. 시간 관계상 필자는 검룡소는 들르지 못했다.



황지자유시장


황지연못에서 100여 미터 거리에는 태백 전통시장인 황지자유시장이 있다. 1970년 4월에 개장한 황지자유시장은 해발 902미터에 위치한 우리나라 최고(最高)의 시장이다.

특별히 살 것이 없어도 느긋하게 시장을 한 바퀴 둘러보자. ‘감자 바우’들의 순박함과 정겨움이 느껴지는 시장이다. 갓 수확한 감자와 옥수수가 지천이다. 할머니들이 새벽부터 일어나 빚어 쪄낸 감자떡과 인절미도 맛볼 수 있다. 시장 안에는 각종 생활용품과 과일, 나물 등을 판매하며 태백 한우를 밤새 우려낸 소머리국밥 등 푸짐한 먹거리 상가가 있다.



구문소- 신비한 시간 여행


장성읍 구문동에 ‘구문소’라는 신비로움을 자아내는 신비한 지형이 있다. 구문소는 ’구멍’, ‘굴’의 고어인 ‘구무’와 늪을 뜻하는 ‘소’가 합해진 말로 산을 뚫고 흐르는 강의 모습을 볼 수 있다.강은 산을 넘을 수 없다고 했지만 구문소는 강이 산을 뚫고 넘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진귀한 지형이 아닐 수 있다.

구문소는 이른바 ‘도강산맥’인데, 황지에서 발원한 물이 흐르며 석회암을 녹여내고 마침내 바위까지 뚫은 것이다. 황지천과 철암천이 구문소의 단층선을 따라 침식작용을 하다가 지하에 생성되어 있던 동굴과 관통되어 황지천이 흘러들면서 기어히 산맥을 뚫고 흐르는 것이다.


세종실록지리지 등 고문헌에는 구멍이 뚫린 하천이라는 뜻의 ‘천천’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강이 산을 뚫고 흐른다 하여 “뚜루 내(뚫은 내)라고도 부른다. 구문소 남쪽에는 자개문이라는 거대한 바위문이 서 있는데 이 길을 통해 봉화, 영주 등을 오갔다고 한다.

황지천이 머물렀다 가는 구문소에는 효자 엄씨의 용궁 전설이 전하며, 예언서 ‘정감록’에는 이상향의 마을로 들어가는 석문으로 기록되어 있다.구문소 위쪽으로는 구문소 공원과 태백고생대자연사박물관 등이 조성되어 있다. 산책로를 따라 걸으며 석고혼, 생혼구조, 습곡 구조 등 황지천변의 다양한 지질 유형을 관찰할 수 있다.


구문소 일대는 하부고생대에서 상부고생대의 부정합 관계를 관찰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석회암 층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퇴적 구조와 삼엽충 등의 고생대 화석들이 잘 보존되어 있어 한반도 고생대 (약 5억 년 전~3억 년 전)의 퇴적 환경과 생물상을 알 수 있는 매우 귀중한 지역이다. 이러한 가치가 인정되어 천연기념물 제417호로 지정되어 있다.


태백 철암탄광역사촌


구문소에서 멀지 않은 곳에 시간이 멈추어 버린 마을이 있다. 철암역과 ‘철암탄광역사촌’은 옛 광부들의 생활 터전으로 광부들의 고된 삶을 엿볼 수 있는 곳이다.

태백시가 본격적인 탄광 사회가 된 것은 1936년 단일 탄광으로는 국내 최대 규모인 장성 탄전의 석탄이 ‘철암리’로 운반되기 시작하면서부터이다.


철암은 마을 북쪽의 백산과 경계 부근의 철도변에 높이 20미터, 넓이 30미터의 큰 바위가 있는데 그 바위에 쇠 성분이 많아 쇠바위라 불렀다. 마을 이름도 ‘쇠바위마을’이라 불렀다. 쇠바위마을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 ‘철암’이다.

1940년 새뜨리 부근에 기차역이 생기면서 본래 쇠바위마을을 웃철암으로 부르고, 기차역과 그 부근을 철암, 철암역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철암역은 석탄 산업과 맥을 같이 한다. 장성에서 생산된 석탄은 전국으로 실려 나가고 광부의 꿈을 안고 전국에서 사람들이 몰려들던 시기 철암역도 전성기를 구가했다. 강릉역 역무원이 28명이던 시절 철암역 역무원은 300여 명에 달했다는 사실로 철암역의 위상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의 철암역 모습에서 당시의 모습을 떠올리기란 쉽지 않다. 한 시간 동안 철암역을 이용하는 사람은 열 손가락에 꼽을 정도였다. 매점은 개점휴업 상태로 보였다. 매점 주는 손님 응대보다는 옥수수 껍질을 벗기고 삶느라 더 분주해 보였다.


2013년부터 운행되기 시작한 ‘백두대간 협곡열차 운행’이 유일한 철암역의 희망일지도 모르겠다.


철암역에서 10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철암탄광역사촌’이 있다. 도로를 사이에 두고 한쪽에는 ‘철암역두선탄시설’이 있고, 건너편 철암천변에는 낡은 건물들이 길게 늘어서 있다. 당장 내일 허물어도 전혀 이상할 것 없는 건물들에는 단란주점, 대성사, 현덕건설, 진주성, 대성식당, 제일당, 호남 슈퍼, 제일당 등 온갖 간판들이 생기를 잃은 채 걸려 있다.

한때는 사람들이 북적거렸을 상가에는 이 거리와 어울리지 않는 차림의 이방인들이 두리번거리며 분주하게 건물들 사이를 들락날락 할 뿐이다. 이곳은 과거 탄광촌이었다. 탄광이 문을 닫으면서 사람들도 하나둘씩 떠나고 빈 건물만 남았다. 빈 건물을 두고 철거와 보존을 두고 의견들이 엇갈렸지만 결국 ‘현대사’의 한 페이지로 남겨 두기로 했다. 탄광촌이 역사촌으로 새롭게 태어난 것이다.


순대국밥과 소고기국밥을 팔던 경북식당 입구 벤치에는 광부가 혼자 앉아 있다. 갤러리가 된 호남슈퍼에서는 지역 화가의 전시회가 열린다. 그런가 하면 자료와 전시품을 통해 애잔한 파독 광부들의 삶도 접할 수 있다.채굴 작업을 마친 광부들은 기름기 많은 돼지고기와 술로 작업 중 들이 마신 탄가루를 씻어내고 다음날 또다시 수백 미터 땅속으로 들어가는 고단한 생활의 연속이었다. 그 고달픔이 그림과 전시물에서 고스란히 묻어난다. 

건물 뒤편 철암천변으로 가면 ‘까치발건물’을 볼 수 있다. 까치발건물은 바닥에 목재나 철재 지지대를 덧붙여 주거 공간을 넓힌 주거 형태를 말하는데 지지대 모양이 까치발처럼 생겼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철암 탄광촌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건물 구조이다.


철암천 건너편 산등성이에도 집들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다. 사람이 살 것 같지 않은 폐광촌 허름한 집들에서는 지금도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다. 이런저런 이유로 탄광촌을 떠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전망대로 이어지는 계단을 오르다 아흔 살이 넘었다는 할머니를 만났다. 30대에 광부 남편을 만나 평생을 이곳에서 살고 있단다. 남편은 이미 오래전에 세상을 등졌다. 왜 혼자 이곳에 남아 있냐는 필자의 질문에 할머니는 ‘떠나고 싶어도 ‘어디로 가냐?’며 오히려 나에게 물었다. 그녀에게 이곳은 육십 년 동안 뿌리를 내린 삶의 터전이다. 평생 애증이 얽힌 곳이리라. 떠나려도 떠날 수 없는. 


전망대에 오르니 장성광업소의 ‘철암역두 선탄시설’이 훤히 보인다. 선탄시설은 탄광에서 채굴한 원탄을 선별하고 가공 처리하는 시설이다. 등록 문화제 제21호로 지정되어 있다. 지금도 가동 중이다. 시티투어를 신청하면 관람이 가능하다. 2024년 가동 중단이 예고되어 있다. 장성광업소가 멈추면 태백시 지역경제와 주민들의 삶은 상당한 타격을 받을 것이다. 


철암천과 맞은편 검은색 선탄시설에 노란색 햇살이 비 오듯 쏟아진다. 근래에 만난 도시 중 가장 현실성이 느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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