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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작나무숲 Sep 16. 2022

[도시 기행 3] 강원 동해시

동해 여행


동해시는 1980년 명주군의 묵호읍과 삼척군의 북평읍이 합쳐져 시가 되었다. 동으로는 푸른 바다와 접하고 서쪽으로는 태백산맥과 접하고 있어 바다와 산, 계곡, 천연동굴 등 수려한 자연환경을 자랑한다.


1936년부터 무연탄을 실어 나르던 작은 항구에 불과했던 묵호항은 1941년 국제 무역항으로 개항되면서 급속한 성장을 이루게 된다. 석탄 하역시설과 부두, 방파제 등의 보강이 이루어졌고 쉼 없이 석탄과 무연탄, 수산물 등을 실어 날랐다. 석탄이 주요한 땔감이었던 시절, 묵호항은 석탄을 실어 나르는 배들과 선원들로 항상 붐비고 활기찼다. 그러나 석탄 산업의 쇠퇴와 함께 묵호항도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항만 기능은 노후되고 사람들은 떠나갔다.


묵호 출신의 작가 심상대는 ‘묵호를 아는가’에서 묵호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2017년 묵호 논골담길 풍경, 겨울 

“예전의 목호는 전국에서 몰려든 사람들로 흥청거렸다. 산꼭대기까지 다닥다닥 판잣집이 이어졌고, 아랫도리를 드러낸 아이들은 오징어 다리를 물고 뛰어다녔다. 그리고 붉은 언덕은 오징어 손수레가 흘린 바닷물로 언제나 질퍽하였다. 그때가 참다운 묵호였다.


가까운 바다에서도 풍성한 어획고를 올렸고 밤이면 오징어배의 불빛으로 묵호의 바다는 유월의 꽃밭처럼 현란하였다. 아낙네들은 오만 가지 사투리로 욕설을 해대며 오징어 가랑이에 겨릅대를 끼웠고 아이들은 수없이 끊어지는 백열전구를 사러 산등성이를 오르내렸다.


비린내, 묵호에 살았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상한 오징어와 조미공장에서 흘러나온 오징어 다리를 빨아야 하였다. 지독하게도 물고기를 먹어대던 시절이었다. 어느 집 빨랫줄에나 한 축이 넘거나 두 축에서 조금 빠지는 오징어가 만국기처럼 널려 있었고, 집집에서 피워 올린 꽁치 비늘 타는 냄새가 묵호의 하늘을 뒤덮었다. 후미진 구석마다 쌓여 있던 생선 내장의 악취, 비 온 다음 날의 시뻘겋게 상한 오징어, 건조한 바닥에서 떨고 있던 개, 양동이로 머리를 후려치며 싸우던 공동 수도의 아낙네들, 욕설과 부패, 묵호의 모든 것이 그랬다.”


묵호항 뒤편으로 산등성이를 따라 꼬불꼬불 이어지는 좁은 골목길을 오르면 작가가 묘사했던 묵호를 만날 수 있다.


#묵호 논골담길


2014년 겨울 처음 묵호를 찾았던 때 묵호에서는 소설 속 풍경처럼 비린내가 났다. 어쩌면 진짜 비린내가 아닌 내 마음속에 깊이 각인된 비린내였을지도 모르겠다. 묵호의 검푸른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논골마을의 비좁은 골목들은 막다른 골목인 듯싶다가도 또 다른 골목으로 이어졌다. 골목 끝에는 어김없이 꽁꽁 닫힌 대문이 있다. 절대로 다시는 열릴 것 같지 않은 대문이지만 놀랍게도 그 문에서 사람이 나왔다.


묵호의 논골담길의 비좁은 골목의 계단마다 절망과 퇴락이 켜켜이 쌓여 있는 듯했다. 빈곤과 고단함과 비린내가 뒤섞인 삶의 우울한 풍경이었다. 피난민들과 전국에서 몰려온 가난한 사람들이 언덕배기에 하나둘씩 다닥다닥 집을 짓고 살면서부터 만들어진 풍경이었다.


2018년 두 번째 찾은 묵호는 첫 방문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4년이라는 시간이 무색할 정도로 말이다. 여전히 논골담길을 구경 삼아 어슬렁거리는 일은 불편했다. 비린내 진동하는 짐 보따리를 들고 힘겹게 오르는 할머니 옆을 카메라를 들고 벽화가 그려진 가난한 집들을 기웃거리며 지나거나 카페에 앉아 차를 마시는 일은 생각보다 곤혹스러웠다.

2017년 묵호 



그런데 참 이상한 것은 가끔 묵호가 궁금하고 찾아보고 싶어진다는 것이다. 2월의 꽃샘바람이 부는 날, 삶이 뒤엉켜 심하게 외로움이 느껴지는 날, 그런 날들에는 오징어 썩는 냄새가 진동한다는 묵호가 그리워지는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산등성이 논골담길 골목마다 푸근한 삶의 이야기들이 가득 남아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루의 고단한 노동을 막걸리 한 잔에 녹여내고 다시 새로운 하루를 시작하는 성실함과 바다에 나간 아버지와 자식을 기다리는 애타는 마음과 내 처지와 너의 처지가 별반 다르지 않은 사람들이 서로를 걱정해 주는 공동체의 온기가 느껴졌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2022년 여름, 묵호 논골담길 


2022년 다시 찾은 묵호에서는 삶의 비린내가 진동하는 과거의 묵호는 찾아보기 어렵다. 다만 논골담길의 벽화 속에서 과거의 묵호를 어렴풋이 만나볼 수 있을 뿐이다.


2010년 동해문화원이 주관한 ‘어르신생활문화전승사업’의 일환인 ‘논골담길’프로젝트의 결과, 지역주민들과 예술가들의 손길을 거친 논골마을의 골목들은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재탄생했다.


논골마을 탐방은 한편으로는 골목마다 진솔하고 푸근한 삶의 스토리를 만나볼 수 있는 최고의 감성여행이 될 것이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도시의 발전과정을 만나볼 수 있는 역사탐방이 될 것이다. 논골 1길에는 묵호를 밝혔던 일하는 사람들과 생업과 관련된 이미지가 풍부하며 논골 3길에는 아버지와 어머니, 사적이고 개인적인 일화를 표현한 이미지들을 만나볼 수 있다.


묵호 등대공원



묵호동 산 중턱에 위치한 논골담길을 천천히 걷다 보면 자연스럽게 발길은 묵호등대로 향하게 된다. 묵호 등대에 서면 저 멀리 푸르디푸른 동해 바다와 묵호항 일대와 묵호 마을이 한눈에 들어온다.


등대를 중심으로 조성된 ‘등대공원’에는 등대의 역할과 역사를 알 수 있는 ‘등대 홍보관’과 휴게 시설이 연중 개방되어 관광객들에게 휴식처를 제공한다. 묵호 마을의 어제와 오늘을 보여주는 상설 사진전과 전국의 아름다운 ‘등대 사진전’이 열리기도 한다.



바다가 어스름에 잠기는 여름날 저녁 묵호 등대에 올라 눈을 감고 앉아 있노라면 불어오는 바람 속에서 또 저 멀리 오징어잡이 어선들의 분주한 움직임과 불빛들 속에서 옛 묵호의 향취를 느낄 수 있다.



논골마을 아래쪽 해안가에는 루프탑을 갖춘 세련된 카페들과 묵호의 명물 ‘도깨비빵’을 판매하는 소형 빵집, 온갖 도자기 공예품을 갖춘 개성 넘치는 카페 등이 늘어서 있다. 거리는 길지 않지만 느긋하게 걸어볼 만하다.


동해 ‘도째비골 스카이밸리’와 ‘해랑전망대’


최근 동해 관광에서 가장 핫한 곳은 단연 ‘도째비골 스카이밸리’라고 할 수 있다.(* 도째비는 도깨비의 방언.) 2021년 6월에 묵호 등대와 월소택지 사이 도째비골에 설치된 ‘도째비골 스카이밸리’는 전망시설인 ‘하늘산책로’와 스카이 사이클(와이어를 따라 공중을 달리는 자전거), 대형 미끄럼틀(자이언트 슬라이드) 등 각종 익스트림 체험 시설을 갖추고 있어 전 연령층의 사랑을 받고 있다.



바다를 향해 난 ‘하늘산책로’는 주요 지점이 메쉬망과 투명 유리로 되어 있어 마치 바다를 향해 허공을 걷는 듯한 짜릿함을 만끽할 수 있다. ‘해랑전망대’는 묵호 앞바다에 설치한 해상 교량 전망대로 동해 바다 위 파도 너울을 발아래서 느껴볼 수 있다.


묵호항의 역사와 묵호 마을의 정취를 가득 느끼고 싶다면 묵호 마을에서 하룻밤 숙박을 권한다. 민박집으로 개조한 묵호 마을 숙소들은 전망 하나는 최고급 호텔 부럽지 않다.


무릉계곡 명승지와 두타산 베틀바위& 마천루 협곡



강원도 동해시 삼화동 남서쪽에는 두타산과 청옥산 계곡을 배경으로 수많은 기암절벽과 폭포 등이 어우러져 천혜의 절경을 이루는 일명 ‘무릉도원 명승지’가 있다. 해발 높이 1,357미터의 두타산에는 삼화사와 천은사라는 천년 고찰이 자리 잡고 있는데 특히 천은사는 고려 때 이승휴가 은거하면서 제왕운기를 집필한 곳이기도 하다.

두타산에는 태종 14년에 산세를 이용해 쌓은 두타산성의 흔적이 지금도 남아 있다. 


두타산성 아랫길을 따라 쌍폭포와 용추폭포를 지나 넘는 박달재는 옛사람들이 임계, 정선을 거쳐 서울로 가는 고갯길이었다. 그 길에는 호랑이바위, 베틀바위, 학소대 등 무수한 절경들이 기다리고 있다.

특히 지난 수백 년 동안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았던 베틀바위와 마천루 협곡 구간이 2020년과 2021년 차례로 개방되어 탐방객들의 행렬이 끊이지 않는다.


두타산에는 ‘눈누난나 힐링 코스, 야경일품산책코스, 베틀바위 산성길, 두타산 오름길 코스’ 등 다양한 트레킹 길이 조성되어 있어 자신의 체력에 맞게 선택할 수 있다.

베틀바위와 마천루 협곡을 탐방하려면 최근에 개방된 ‘베틀바위 산성길’을 선택하면 된다. 목적지와 소요 시간을 고려하여 A, B, C 구간별로 탐방에 나설 수도 있다.


A구간 : 관리사무소 - 베틀바위 전망대(1.5 km/편도 1시간 30분)// B구간: 관리사무소 - 베틀바위 전망대 - 미륵바위 - 두타산성-(2.7km/편도 2시간 30분)// C구간: 관리사무소 - 베틀바위 전망대 - 두타산성 - 두타산 협곡 마천루 - 용추폭포(4.7km/편도 3시간)


관리사무소를 지나 계곡을 건너면 길은 베틀바위 산성길과 용추폭포길 두 갈래로 나뉜다. 베틀바위 산성길은 줄곧 오르막과 가파른 돌계단길이다. 30분 정도 오르면 서서히 첫 시야가 트이면서 산 아래 리조트와 주차장이 보이기 시작한다. 


잠시 숨을 고르고 다시 컴컴한 산길을 오르다 보면 어느새 두 눈앞에 커다란 소 엉덩이처럼 푸짐한 산세에 털이 벗겨진 듯한 바위들이 곳곳에서 얼굴을 내밀기 시작한다. 뱀이 기어가듯 구불구불 계곡도 보인다. 허연 바위가 드러난 산들은 얼핏 보아도 거칠고 방문객에게 쉽게 곁을 내어 줄 것 같지 않다. 바람 부는 대로 이리저리 휘어진 소나무를 지나고 회양목 군락지도 지난다. 산세는 점점 더 험악해지고 도저히 더 이상 갈 수 없다고 느껴질 즈음 눈앞에 뾰족 바위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드디어 베틀바위 전망대이다. 전망대에서 바라본 베틀바위는 그야말로 절경이다. 수정처럼 날카롭게 깎인 바위들이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고, 푸른 나무들이 바위의 허리를 휘감고 있는 모습이 기이할 정도다.


해발 550미터에 위치한 이 뾰족 바위들은 베틀처럼 생겨서 ‘베틀바위’라고 불린다. 산악인들 사이에서는 '베틀 릿지', '장가계', '소금강'으로도 통한다. 베틀바위에는 하늘나라 선녀가 벌을 받아 인간 세상으로 쫓겨나 비단 세 필을 짜고 개과하여 하늘로 올라갔다는 전설이 깃들어 있다.


베틀바위 전망대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마천루 협곡으로 향한다. 마천루 협곡까지 오르막과 내리막을 반복하는 약 2 km 구간에는 미륵바위와 12폭포 등이 기다리고 있다 드디어 도착한 마천루 협곡은 가히 ‘한국의 장가계’라고 할 만하다. 바위산들이 이중삼중으로 주름처럼 겹쳐 있고 짙은 안개가 산허리를 감싸며 피어오르는 모습은 순간 인간계가 아닌 선계에 들어온 듯하다. 주변은 천 길 낭떠러지 절벽이요, 하늘과 경계를 이룬 듯 서 있는 병풍바위가 앞을 가로막고 서 있다. 계곡에서 뿜어져 나오는 신비로운 기운에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다. 갑자기 계곡에서 긴 수염을 기른 신선이 나타나 ‘웬 놈이냐?’라고 호통이라도 칠 것 같다.


정신을 차리고 바위 끝에 매달린 잔도길을 내려오면 쌍폭포의 끝자락이 보인다. 쌍폭포는 두타산 정상과 박달계곡, 청옥산과 고적대 물이 한곳으로 모여 형성된 폭포이다. 쌍폭포에서 50미터 위쪽에 용추폭포가 있다. 신선봉 아래 3단으로 떨어지는 용추폭포는 주변의 반석과 어우러져 천하 절경을 빚어낸다. 한여름에는 무더위를 식히기 위해 가벼운 차림으로 용추폭포를 찾는 사람들이 줄을 잇는다. 쌍폭포에서 삼화사 방향으로 내려오면 이번에는 ‘학소대’가 모습을 드러낸다. 청옥산에서 흘러나온 물줄기가 너른 바위를 따라 시원스럽게 쏟아지는 곳에 학이 둥지를 틀고 살았다고 해서 '학소대'라 부른다.


#두타산 삼화사와 무릉반석


두타산 무릉계곡 초입에는 ‘삼화사’라는 천년 고찰이 자리하고 있다. 일주문과 천왕문을 지나 경내로 들어서면 두타산과 청옥산의 울창한 숲과 기암괴석에 둘러 싸인 삼화사가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진다. 삼화사의 "서쪽 봉우리는 봉황이 춤추고 학이 서 있는 것과 같은 형상이며 남쪽 기슭은 용이 어리고 호랑이가 웅크린 형세"다.


신라 선덕여왕 11년(642) 자장 율사가 창건한 삼화사는 경문왕 4년에 구산선문의 하나인 사굴산파의 개조인 범일국사가 중창하여 삼공암이라고 하였다. 고려 태조 원년에 삼창되면서 세 나라를 하나로 화합한 영험한 절이라는 뜻으로 삼화사라 부르기 시작했다. 임진왜란 때 완전히 전소되어 효종 때 몇 차례에 걸쳐 중건되었다.

현재 삼화사는 적광전을 비롯해 약사전, 극락전, 삼성각, 비로전, 범종각 등의 전각과 두타선원, 적묵당 등의 당우로 가람을 이루고 있다. 문화재로는 신라 말 혹은 고려 초에 제작된 '철조노사나불(보물 제1292)과 통일신라시대에 제작된 삼화사 삼층석탑(보물 제1277호)이 있다.


삼화사에서는 10월이면 국행수륙제가 열린다. 수륙제는 고혼(정처 없이 떠도는 영혼)의 천도를 위한 의식을 말하는데, 삼화사 수륙제는 조선 전기의 국행수륙제의 전통을 잇는 것으로 국가무형문화제 제125호로 지정되어 있다.


삼화사 계곡에는 거대한 무릉반석이 펼쳐진다. 약 5천 제곱미터(약 1,500평)에 달하는 반석은 그 자체로 절경이다. 그게 다가 아니다. 반석마다 어떤 생명체들이 꿈틀거리는 듯 수많은 묵객들이 새겨 놓은 글과 이름들이 빼곡하다. 돌에 새긴 글자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또렷하고 정갈한 글씨체들이 더욱 감탄을 자아낸다. 그중에는 조선 전기 4대 명필가로 꼽히는 양사언이 초서체로 쓴 ‘무릉선원 중대천석 두타동천’이라는 글귀가 단연 눈에 띈다. 또 단종의 폐위 이후 천하를 떠돌던 매월 김시습의 글도 있다. 그런가 하면 수많은 이름들이 또렷하게 새겨져 있는데, 그 이름들 속에는 조선시대 산속으로 숨어들었던 이들을 잡으러 나선 토포사들의 이름도 상당수라고 한다. 신해 3년 또는 계미 3년 등 연도와 이름을 새겨 넣은 식이다.


토포사는 조선 후기 도적이나 화적들을 토벌하기 위해 특정 수령이나 진영장이 겸했던 특수 관직으로 명종 때 임꺽정의 무리를 토벌하는 남치근이 이 직책에 임시로 임명된 적이 있다. 토포사가 제도화된 것은 인조 16년(1638)년 이후이다. 토포사들의 추적의 대상은 화적이나 도적뿐만이 아니라 탐관오리나 양반들의 폭정을 견딜 수 없어 달아난 선량한 백성들도 있었다. 이름들의 정체를 알고 나니 무릉도원은 한순간 으스스 한 귀곡산장 같은 느낌으로 다가선다.


실제로 두타산 무릉계곡은 임진왜란 때는 수천수만의 화살이 강물에 떠 흘러 ‘화살내’를 이루었고 수많은 사람들의 피가 고여 ‘피쏘(피로 물든 연못)’가 생겨났던 곳이다. 한국 전쟁 당시에는 대량학살이 일어나 7개의 커다란 피범벅 구덩이가 있었고 5천 명이 한날한시에 총살당했다고 한다.


1980년대 초 무릉계곡을 방문한 시인 김지하는 이곳에서 임진왜란과 한국전쟁을 거치며 죽어간 수많은 생명들의 피비린내 나는 아우성을 들었다고 한다. 그가 들었던 피와 고통의 소리는 시집 ‘검은 산 하얀 방’에 고스란히 실려 있다. 그중에 ‘너럭바위’의 일부를 소개해 본다.


한 노인을 만났는데 가라사대

사람은 손을 손으로 저울질할 일이다라고 하더라

두타산은 일곱 개의 피복창이 있었다고 하더라

오십 개의 우물 터가 있었다고 하더라

오천 명이 한날한시에 총 맞아 죽었다고 하더라

사멧골 제사는 모두 한날한시라고 하더라

피쏘 한복판에 물 못 들어가는 큰 구멍 하나 있다 하더라

그 구멍 속에 한 여자가 발 거꾸로 해 지금도 떠있다 하더라

돌아오는 길에

피쏘 너럭바위 위에

아로새겨진

토포사! 토포사! 토포사!


<김지하 ‘너럭바위’>


번득이는 것이

왜 빛뿐일까요

번득이는 것이

왜 눈뿐일까요

번득이는 것이

왜 절벽에 부딪쳐 부서지는 햇빛뿐일까요

하늘에 가득 찬 총알 총알 총알

그 구리의 빛은

찢어진 왼쪽 다리 끌며 당신 찾는데(......)가물거리는

마지막 생각

가물거리는 마지막 눈

그 속에 타고 있는

삼화사 촛불

마지막 들리는

삼화사 독경소리

마지막 보이는

삼화사 쇠 부처님

아 아

물방울.


<김지하 ‘피쏘’ 중.>


무릉계곡 반석 초입에는 ‘금란정’이라는 정자가 서 있다. 금란정은 1947년 삼척 유림들이 북평동에 건립한 정자인데 1958년 이곳으로 옮겨왔다.


일제 강점기 일제는 삼척 유림들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삼척 향교'를 폐지해 버렸다. 이에 유림들은 금란계라는 모임을 만들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정자를 건립하려 했으나 일제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해방 후인 1947년 '금란정'을 건립했다. 정자의 12기둥에는 '양사언이 붓을 휘두른 곳이고 '이승휴가 불경을 열파한 곳이다'와 같은 주련들이 새겨져 있다.


금란정 앞쪽에 초서체로 쓰인 '무릉선원 중대천석 두타동천'글자가 선명한 대형 암각 반석이 놓여 있다. 무릉반석에 새겨져 있던 글자들이 희미해지고 마모되자 1995년에 모형을 제작해 이곳에 두었다. 이 글씨는 양사언이 강릉부사 재직 시 (1571~1576) 무릉계곡을 방문했을 때 쓴 글씨라고도 하고 옥호자 정하언이 삼척 부사 재직(1750~1752) 중에 썼다는 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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