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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신애 Nov 01. 2022

생명과 자유, 누가 지킬 것인가

-이태원의 안타까움에 반성하면서-

#맹신과맹목의위험성 #의심하는인간 #스스로책임지는삶 #법과제도는사회질서를유지하기위한약속일뿐 #생명은국가가어쩌지못한다


어릴 적 나는 학교와 선생님, 책에서 본 내용들을 철저하게 믿었다. 타고난 내 고지식함이다.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은 하늘이 두 쪽이 나도 따라야 했다. 극성맞은 딸 덕에 어머니께서 고생을 많이 하셨다. 학교에서 하라고 한 것은 무조건 다 지켜야 했으니 말이다.


좀 더 자라고 나서 학교와 선생님의 말씀, 책의 내용이 현실과 좀 거리가 있다는 것을 조금씩 알게 되었지만 그래도 나는 철저하게 믿었다. 그대로 따르면 꽤 잘 산다고 생각했다. 어떤 체제와 원칙에 대한 강한 믿음이 있었던 것 같다.


성인이 되고 첫 직장 생활을 하면서 입사 만 2년이 되지 않았을 때 난 체제의 전복을 경험했다. 재단이 주인이 하루 아침에 바뀌었다. 내가 살던 세상이 뒤집어지는 경험이었다. 사람들은 새롭게 만들어진 권력에 재빠르게 순응했다. 옳고 바르다고 믿던 것들이 하루 아침에 저주받은 악행이 되어버렸다.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 전복된 질서를 받아들이느라 내 심령이 죽을 뻔했다. 그렇게 내가 알던 세계를 벗어나 더 큰 세계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우습게도 몇 년 후에 나는 다시 두 번째 세계의 전복을 경험했다. 두번째 경험은 인간의 삶과 죽음에 맞닿아 있었다. 옳고 그름은 권력과 힘의 크기에 달린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에게 철저하게 짖밟혔다. 나 자신을 맡길만한 곳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고, 인간은 도무지 믿을 것이 못 된다는 것을 철저히 배웠다. 권력에 대한 그들의 신념에 나는 동의하지 않았지만, 적어도 이 세상은 내 순진한 믿음이 통하지 않는 곳임을 뼛속까지 받아들였다. 이후 나는 내가 알던 모든 것들을 의심하기 시작했고, 철저하게 스스로 고민해서 동의가 되지 않는 것들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기로 했다. 내 삶을 내가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의 말도 안되는 원칙들에 맡겨야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느꼈다.


나는 다르게 살기로 했다. 그래서 안전하다고 믿었던 직장을 떠났고 더 불안한 세상 속으로 계속 나아갔다. 지금도 그렇다. 나를 단단하게 만드는 것만이 나를 지키는 것이다. 칸트의 정언명령을 나는 현실에서 배웠다.

"네 의지의 준칙이 항상 주관적인 동시에 보편적인 법칙 수립이라는 원리로서 타당하도록 행위하라. "


이후에도 나는 계속 인간이 만든 제도와 체제가 얼마나 먼지 같고, 부질없고 엉성한지를 날마다 목격하고 확인한다. 그런 부조리를 비난하는 것이 얼마나 멍청한지를 알면서도, 이 사회에 살아간다는 것이 한없이 슬프고 부아가 치밀어오르고 투털거리는 나 자신을 보면 난 어쩔 수 없는 인간임이 틀림없다.    


결국 언젠가부터 나는 내 삶을 이 부조리한 현실에 내맡기지 않기로 했다. 아무에게도 내 삶을 지키고 책임지라고 말하지 않기로 했다. 내 삶은 내 것이고 이 세상에 좌우되지 않는다. 하지만 내 삶의 근원이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되었고, 그 분만이 내 삶의 안전장치임을 안다. 그런 이유로 하나님 말씀이 내 삶의 절대 기준이 되어 어쩌면 이 세상에 대해서는 초월적일수도 있는 더 큰 세상의 원칙을 따라 살기로 했다. 세상이 나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세상에 책임을 지키는 사람이 될 것을 선택한 것이다. 물론 나는 힘이 없다. 하지만 내가 가진 것으로 내 가정과, 내 자녀와, 내 동료와 내 일터를 스스로의 힘과 노력과 기도로 지키고자 한다. 그래서 바른 원칙과 주의를 주고자 노력한다. 그래서 매일 나는 잔소리를 늘어놓는 꼰대의 삶을 산다.


만약 국가가 내 생명을 지켜줄테니 더 많은 권한을 갖겠다고 말하면, 나는 믿지도 않을 뿐더러 그 약속을 믿고 내 자유를 포기할 것에 대해 동의하지 못하겠다. 갈수록 많은 이들이 국가의 책임을 키우고 있고 그래서 국가와 제도의 틀이 더 견고해지고 있다. 잘못된 법들이 난무한다. 그만큼 개인들의 자유는 침해 당한다. 생명을 국가가 지킨다고? 천만에! 생명은 아무도 못지킨다. 부모도 자식을, 자식도 부모를, 누가 누구를 어쩌지 못한다. 날마다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들이 셀 수 없이 많다.


그렇다고 이태원의 안타까움이 원래 죽을 운명이었다는 말이 아니다. 그들을 지켜주지 못해 너무 서럽고, 너무 아프고, 너무 속상하다. 단지 그들에 대한 책임이 남의 탓이 아니라 내게 있음을 통감할 뿐이다. 왜 나는 어른으로서 아이들에게 더 깊은 주의와 스스로 자기를 지킬 힘을 키워주지 못했을까. 왜 우리 사회가 건강한 개인들로 성장하도록 하는 일에 나는 더 노력하지 못했을까..나는 그 책임이 국가에만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결국 내 책임이다. 국민이 신뢰하지 않는 정부와 국가는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 우리는 신뢰를 주지도 않는 정부에 대고 너무 큰 책임을 묻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 못 믿을 정부, 무능한 국가한테 결코 지키지 못할 약속을 놓고 자유를 거래할 것인가.


감정에 휩쓸리지 말고 잘 생각해 보아야 한다. 안타까운 죽음을 헛되게 만들지 않으려면 우리는 화를 낼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마음을 다해 슬퍼하고,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 위해 우리 각자가 어떤 반성과 실천을 해야할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철저한 자기 반성 없이 그들의 죽음을 빌미삼아 누군가에게 책임을 묻고 원망하는 것만큼 그 죽음을 헛되게 만드는 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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