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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핼리 Halley Dec 14. 2023

시각장애인이 모이는 행사를 혼자 준비해보라고?

2023 케이드 대축제

지난 12월 8일 시각장애인 선생님 100명과 인사담당자를 함께 모시는 대축제 행사를 진행했습니다. 


왜 뜬금없이 시각장애인을 위한 행사인가?

제가 현재 근무하고 있는 회사는 B2B로 기업에게 어학 서비스를 제공하는 회사인데요. 여타 서비스와 다르게 조금 특별합니다. 바로 시각장애인 선생님들께서 해외법인 혹은 외국인 임직원들에게 한국어 교육을 해주신다는 점입니다.


저희 선생님들께서는 주로 재택으로 근무하시다 보니 대면으로 소통할 일이 별로 없으신데요. 회사에서는 1년에 한 번씩 연말에 '대축제'를 개최하여 선생님들의 노고를 위하고 격려하는 자리를 갖고 있습니다.


제가 입사하자마자 받은 첫 프로젝트가 바로 이 '대축제'였습니다. 사실 저는 이 회사에 입사하기 전까지 광고대행사를 전전하는 평범한 마케터였고, 여타 평범한 직장인들과 마찬가지로 현생이 바쁘다 보니 '장애인'에 대해 깊이 생각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대축제를 준비할 때에도 큰 뜻을 품고 장애인 선생님들의 인식 개선을 위해 이 한 몸 바쳐 최선을 다하겠단 포부 보다는 그냥 어쩌다보니 이 회사에 입사하게 되었고 이왕 맡은거 최선을 다해보자는 다소 김빠지는 태도로 임했던거 같습니다.


대축제를 기획함에 있어 행사 장소를 고르는 것에서부터 큰 난관이 봉착했습니다. 150명 규모의 오프라인 행사장을 빌리는 것은 생애 처음일 뿐더러, 시각 장애인 선생님들을 모실 수 있는 행사장을 찾는 것은 일반 행사보다 훨씬 더 많은 요소를 고려해야만 했습니다. (행사 준비 전 래퍼런스를 찾아보고 참고하고 싶었지만, 기업 인사담당자+시각장애인강사의 조합은... 전무후무했습니다.)


우선 안내견과 휠체어가 입장 가능해야 했습니다. 전화로 안내견 입장 가능 여부를 여쭤보면 담당자 분들이 대부분 당황해 하는 기색이 보였습니다. 애완동물 출입은 불가한데, 안내견은 한 번 알아봐야 한다거나 가이드를 확인해보겠단 대답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안내견'에 대한 문의를 할땐 친절하게 응대해주시는 경우가 많았는데, 기분탓일진 모르겠지만 '휠체어'에 대한 문의를 할땐 다소 냉대한 반응이었습니다. 아무래도 손이 많이 가는 사람보다는 충성스럽고 귀여운 강아지에게 조금 더 마음이 가는 탓일까요? 행사장을 알아보며 수많은 거절을 당하다 보니 장애인 분들의 애환에 대해 조금... 아주 조금은 이해해볼 수 있었습니다.)


더욱 까다로운 것은 휠체어가 통행하기 위해 행사장 내부에 턱이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행사장 내부 뿐만 아니라 행사장 외부에서 안쪽까지 이어지는데 턱도 있으면 안되었습니다. 화장실은 당연히 장애인 화장실이 구비되어 있어야 했고요.


그러는 동시에 고객사 인사담당자와 장애인고용공단 인사들을 모시는 자리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격식을 차릴 수 있어야 했습니다. 작년에 진행된 1회 대축제 같은 경우 공연장 같은 곳을 빌려 장애인 선생님들께서 장기자랑도 하시고, 마음껏 노실 수 있는 장을 마련했었습니다. 이런 곳은 구립센터나 동사무소만 봐도 다목적실 같은거 하나 빌리면 가능했습니다만 올해는 작년과 다르게 공(公)적인 목적이 크기 때문에 행사장의 퀄리티도 선정 요인 중 하나였습니다.


과연 이런 행사장이 존재할까?란 의심을 갖고 이런 저런 필터들을 하나씩 거치며 서울 시내 200개 이상의 행사장을 알아보며 지쳐있던 찰나, 찾았습니다. 비용도 적당하고, 휠체어도 이동 가능하며, 안내견도 입장 가능하고, 나름 격식을 차릴 수 있는. 바로 그런 곳!


저는 유레카를 외치며 기쁨에 찬 나머지 다른 요인들을 알아보지 않고 바로 예약을 걸었습니다. 하지만 초보 마케터에게 모든 것이 한 번에 충족되면 어딘가 빵꾸가 났다는 것을 알았어야 했는데...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고야 말았습니다. 시각 장애인 선생님들이기 때문에 뷔페 식사는 불가했고, 대신 손으로 먹을 수 있는 피자를 먹으면 되겠단 판단에, 음식물 반입 여부를 고려하지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룰루랄라 행사 열흘 전에 어떤 피자로 할지 고민하며 알아보던 중 행사장에서 '외부 음식 반입 불가'라는 가장 기본적인 상식을 깨닫게 되었고, 저는 큰 혼란에 빠졌습니다. 행사장 측에서는 도시락도 준비되어 있고, 여의치 않으면 샌드위치를 준비해줄 수 있다고 얘기해 주었지만 저는 전국에서 오랜만에 서울 나들이를 기대하며 아침부터 기차 타고 오시는 선생님들께 차가운 샌드위치를 드리는 것이 너무나 죄송스러웠습니다. 저는 평소에는 환불도 잘 안하고, 음식점에서 머리카락 정도가 나와도 그냥 넘어갈 정도로 무던한 성격이지만, 이번 만큼은 행사장 담당자님께 염치 불구하고 이런 사정을 설명드렸습니다. 결과는 당연히 규정 상 안된다는 답변을 받았습니다.


삼고초려의 마음으로 전화, 대면, 문자로 세 번 부탁을 드렸지만, 대답은 항상 같았습니다. 모두에게 죄송했습니다. 행사 담당자, 대표님, 그리고 먼 길을 오시는 선생님들께. 죄송스러운 마음에 선생님들에게 선물을 챙겨드리고 싶은 마음에 협찬을 마구 받아왔습니다. 총 4개의 기업에서 920만원 상당의 현물 협찬을 받아오며 협찬을 받을때마다 팀원들이 박수를 쳐줬지만 사죄의 마음이 담겨서인지 저에겐 그리 기쁘지만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저희 행사의 취지에 공감해주시고 흔쾌히 도움을 주신 대표님들께 진심으로 감사했습니다.


행사 전 마지막 2주는 굉장히 바빴습니다. 회사 사명을 바꾸는 리브랜딩 작업을 외주사와 함께 하고 있었는데, 바뀐 사명을 대축제에서 발표하기 위해 일정을 조율해야 했습니다. 가까스로 새로운 사명을 박아 넣은 굿즈는 하루 전날에 도착했고, 가로배너, 세로배너, 팜플렛, 포스터의 디자인 및 제작에도 서둘렀습니다. 행사 전체 대본을 작성하고, 행사 발표 자료를 준비하고, 자리를 배치하고, 이름표를 만들고, 레크레이션을 기획했습니다.


행사 당일, 길 안내 팀은 선생님들과 미리 약속해 놓은 역으로 가 선생님들을 안전하게 데려왔고, 행사장 팀은 행사장 세팅과 리허설을 준비했습니다. 선생님들과 기업 인사담당자님들을 맞이하고, 연사분들과 오케스트라 팀의 일정을 확인하고, 봉사자 업무를 배분하다 보니 시작된 행사는 사소한 문제들이 한 두 개 있긴 했지만 나름 성공적으로 마무리 할 수 있었습니다.


행사가 다 끝나면 어떤 기분일지에 대해 행사 준비를 하며 종종 생각해보곤 했습니다. 뿌듯한 마음일까? 아니면 행사를 망쳐서 좌절에 빠져있을까? 행사가 끝나니 성취와 절망은 뒤섞여 복잡했습니다. 끝났다는 안도와 동시에, 아쉬운 점들이 보였고, 행사 당일 팀원들에게 예민했던 부분이 복합적으로 뒤얽혀 있었습니다.


그 여파가 회식이 끝나고 주말까지도 이어져왔지만, 대축제에 참여하신 선생님들께서 '산타 같은 잔치'였다, 내년에 또 참가하고 싶다, 너무 감사하단 얘기를 들으니 조금씩 피어나는 뿌듯함이 공허한 느낌을 지우고 그 자리를 매꿨습니다.


월요일에 복귀해 결과보고서를 작성하고, 협찬해주신 대표님들께 감사인사를 드리고, 보도자료를 뿌리다 보니 또 하루가 정신없이 흘러갔습니다. 아직도 많이 부족한 초보 B2B 마케터이지만, 난이도 극상인(제 기준으로는) 이번 행사를 진행하며 행사를 운영함에 있어서 필요한 경험들을 해볼 수 있었습니다. 


저희가 그들의 삶에 한줄기 희망이 되어줄 수 있을까요? 우선 힘닿는데까지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https://www.tnews.kr/news/articleView.html?idxno=11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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