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신플럼 Jul 27. 2021

냉면과 사치

나는 차가운 음식의 매력을 모른다. 한겨울에도 아이스 음료를 주문하는 이른바 얼죽아 타입의 취향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한다. 조선인의 피엔 적혈구가 모자란 것일까. 대한민국 사람들이 단체로 빈혈이라도 걸린 게 아니라면 왜 사계절에 상관없이 이토록 찬 음식을 좋아하는 것인지 추위에 약한 나로선 이해하기가 어렵다. 그중에서도 가장 취향에 맞지 않는 음식이 냉면.


냉면이 싫다. 시큼하고 차갑고 질긴 맛. 훌륭한 한 끼 식사라는 건 모름지기 먹은 뒤에 '아, 배때지 따시다.'라는 느낌이 있어야 하지 않나. 고기와 함께 곁들이는 냉면이 아니라 한 끼 식사로서의 냉면은 도무지 용납하기가 어렵다. 나와 달리 엄마는 냉면을 무척 좋아한다. 욱철이(친오빠)와 나를 임신했을 때 그렇게 냉면을 먹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가, 너희 둘 다 냉면을 좋아해."

나 냉면 안 좋아하는데. 엄마가 그리 기억하는 것은, 내가 어렸을 적엔 냉면을 잘 먹었기 때문이다. 그 냉면은 다른 냉면들과는 좀 달랐다.


어렸을 때 엄마가 자주 만들어주곤 했던 청수 냉면. 슈퍼마켓에 가면 흔히 팔았다. 청수 물냉면은 식당에서 파는 냉면과는 맛이 꽤 다른 편이다. 시큼한 맛도 덜한 데다가 조금 더 달콤 짭짤한 맛이라고 해야 할까. 질기지 않고 호로록 넘어가는 면발까지. 냉면이지만 냉면과는 다른 그 맛이 오히려 좋았다. 시간이 흘러 언젠가 식당에서 엄마와 냉면을 먹다 보니 청수 물냉면이 생각났다.

"이거 말고 청수 물냉면 먹고 싶다. 우리 왜 요즘 그거 안 먹지?"


엄마는 의아하다는 눈빛으로 나를 봤다.

"그때야 지지리 궁상으로 돈 없으니까 슈퍼에서 파는 냉면 먹은 거지. 지금 뭐하러 그걸 먹니."

이 배신감 뭐지. 나는 엄마도 청수 물냉면 특유의 감칠맛을 좋아한다고 생각했는데. 그냥 돈이 없어서 사 먹지 못한 것뿐이었다.


그래, 추억은 기억하는 사람의 마음에 달려 있지. 내가 좋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며 혼자 청수 물냉면을 만들어먹었던 스무 살의 어느 날. 나는 깨달았다. 청수 물냉면의 면발이 부드러웠던 건 엄마가 요리를 못했기 때문이구나. 청수 물냉면은 쫄깃했다. 본래 면발이 부드러운 게 아니라 면을 너무 오래 삶아 푹 퍼졌던 것뿐이었다. 그런데 면발을 차치하고서라도 그때 그 맛이 나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엄마처럼 요리를 못 할 수 있을까. 이십여 년 전 그 냉면 맛을 낼 수 있다면 기꺼이 음식을 망칠 수 있는데. 엄마의 요리 실력은 노력으론 따라갈 수 없는 악마의 재능이었다.


유례없이 더운 여름이다. 엄마는 하루가 멀다 하고 냉면을 사 온다. 냉면을 싫어한다고 이십 년도 넘게 말했는데 엄마는 저녁 식사 때가 되면 어김없이 전화를 걸어 묻는다.

"명진아, 냉면 사갈까?"

뭐 하나 빠지는 거 없는 맛. 고기 고명에 계란이랑 오이까지 올라간 완벽한 비주얼. 엄마는 이제 1인분에 8천 원짜리 냉면을 포장해온다. 글을 쓰며 찾아보니 냉면은 본래 추운 겨울 뜨거운 온돌방에 앉아 먹는 음식이라고 한다. 사치스러운 음식이 아닐 수 없지. 추운 날, 더운 곳에서 먹는 찬 음식이라니. 여전히 나는 냉면을 싫어하기에 그 알량한 사치 부럽지는 않다. 8천 원이 아니라 3만 원이래도 별로 먹고 싶은 마음은 없다. 다만 엄마를 보면 그런 게 부럽다. 지나온 시간 속을 들춰보지 않는 것. 추억이 얼마나 미화될 수 있는지 명확히 알고 있다는 것. 시간을 되돌려 반지하 단칸방에서 청수 물냉면을 먹겠냐 하면 나는 그런 거 평생 먹지 않아도 된다고 할 테니까.



 


매거진의 이전글 브리오슈와 연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