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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린 Oct 27. 2021

'변신' & 착한 아이 콤플렉스

문학으로 배우는 첫 심리학 수업

 카프카의 '변신'은 그 주제가 현대의 소외와 고독으로 많이 다뤄진다. 가족 등 공동체로부터 소외되고, 자신이 하는 일로부터 소외되고, 마침내 자기 삶에서 소외된 현대인의 비극적 형상이 아주 잘 나타나 있다. 하지만 이 작품은 한편으로 가족 문제를 다루고 있기도 하다. 주인공의 삶에서 이른바 착한 아이 콤플렉스의 모습이 보이기 때문이다. 착한 아이 콤플렉스의 렌즈를 통해 '변신'을 읽어본다. 


자기는 사라지고 타인만 남아 있다


  벌레가 된 그레고르. 그는 자신이 흉측한 벌레가 되었는데도 자신에 대한 걱정보다 가족과 회사의 일이 더 걱정이었다. 어째서 그는 자기 생각은 하지 않고 남들만 걱정하는 것일까?

  그레고르는 지난 5년 동안 오로지 가족만을 위해 일했다. 일 자체에 대한 보람이나 성취, 만족감은 거의 없었다. 새벽에 일어나서 멀리 출장을 다녀야했고 낯선 싸구려 호텔에서 피곤한 잠을 청해야 했다. 늘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까닭에 여자 친구는 물론, 깊은 교제를 나눌 친구 하나 없다. 힘든 일이지만 그레고르는 성실하게 일했고 가족들이 안락한 집에서 편안하게 생활하도록 해주었다. 그는 착한 아이 콤플렉스가 덧씌워진 채 더 없이 착한 아들, 착한 오빠로 살아왔던 것이다. 


  본래 착하다는 것은 자기중심적이 아니라 타인중심적으로, 그리고 이타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을 일컫는다. 그런데 이 개념이 극단으로 치달을 경우, 모든 생각과 행동 속에서 자기는 사라지고 타인만 남게 된다. 이처럼 자기는 없고 오로지 다른 사람의 기준만 남아 있는 상태를 착한 아이 콤플렉스라고 한다. 

  착한아이 콤플렉스를 지닌 이들은 삶에서 자기 기준이 없거나 매우 약한 탓에 자기 주도적인 일을 거의 하지 못한다. 그레고르를 보라. 그는 외판을 즐겨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에게 자신의 만족감은 삶에서 중요한 기준이 아니다. 중요한 기준은 오직 가족의 안락과 행복이다. 가족이 행복하다면 아무리 하기 싫어도, 또 자기 성향과 맞지 않아도 어떻게든 해내야 한다.  


  또한 이들은 타인에게 인정받기 위해 늘 전심전력을 다하는 특성을 지닌다. 특히 상사나 권위자에게 인정받으려는 욕구가 강하다. 자기 기준이 없기 때문에 타인의 요구와 기대를 충족하려고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불쾌하거나 고통스런 감정이 생기더라도 이들은 무조건 참으려 한다. 따라서 착한아이 콤플렉스를 지닐 경우 ‘자기감정이 없는 사람’이 되기 쉽다. 자기 몸이 벌레로 변했는데도 불쾌한 감정을 견디고 출근을 서두르는 그레고르가 이에 대응한다. 


  다른 사람의 요청을 거절하지 못하는 것도 이들의 특성이다. 오히려 이들은 타인의 필요와 요구를 채워주면서 자기 존재를 인정받으려 애쓴다. 그런 점에서 작가가 그레고르를 외판원으로 설정한 것은 참으로 탁월했다. 외판은 처음부터 타인의 요구를 맞춰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처럼 지나치게 착한 역할을 수행하다보면 스스로 좌절하고 탈진할 때가 있다. 극단적일 경우, 자신과 세상을 항해 분노를 표출하기도 한다. 한 마리 벌레로 변신한 그레고르, 그것은 어쩌면 탈진한 채 세상을 향해 분노를 표출하는 그레고르의 본 모습일지 모른다.      



착한 아이, 어떻게 생겨나는 걸까?


  그렇다면 어째서 착한 아이 콤플렉스가 생기는 걸까? 심리학자 존 브래드쇼는 칼 융의 그림자 개념을 활용하여 ‘상처받은 내면 아이’로 착한 아이 콤플렉스를 설명한다. 칼 융에 따르면 사람에게는 마치 그림자처럼 잘 드러나지 않는 감춰진 성격이 존재한다. 존 브래드쇼는 그중 하나를 상처받은 내면 아이라고 보았다. 그에 따르면 상처받은 내면 아이란 어릴 때 받았던 마음의 상처가 어른이 되어서도 아물지 않고 여전히 남아 있는 경우를 뜻한다. 


  그렇다면 상처받은 내면 아이는 어째서 생기는 것일까? 심리학자들은 착한 아이는 어린 시절 환경의 압박 때문에 생겨난다고 한다. 여기서 어린 시절의 환경이란 대체로 가족환경을 가리킨다. 어린 시절을 떠올려보자. 가족 구성원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가족, 특히 부모의 가치관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불이익이 뒤따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때 가족의 가치관을 과도하게 받아들일 경우 상처받은 내면 아이가 생길 수 있다. 심리학자들은 어머니의 지나친 사랑이나 보호, 또는 이와 반대로 부모와의 불완전한 애착이 상처받은 내면 아이를 만든다고 한다. 다시 말해 부모가 자기를 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부모의 눈치만 보는 착한 아이가 되려 한다는 것이다. 부모 사이에 잦은 갈등이 있거나, 부모가 양육의 책임을 다하지 못할 때에도 아이는 불안감에 휩싸여 부모의 눈치만 살피는 착한 아이가 될 수 있다. 자기 기준은 형성되지 못한 채 부모의 기준을 행동의 기준으로 삼는다.  


  그레고르의 유년 시절은 소설 속에서 확인할 수 없다. 하지만 그레고르의 유년을 추측해볼 수는 있다. 무엇보다 부모의 양육태도가 문제적이다. 소설을 주의 깊게 살피면 그레고르의 부모는 그레고르가 벌레로 변신하기 전, 여동생을 그저 쓸모없는 천덕꾸러기로만 여기고 있었다. 집안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구박한 것이다. 자녀를 그 자체로 보기보다 쓸모로 판단하는 부모, 무엇인가 성과를 보여야 자녀를 인정하는 부모. 이런 부모의 양육태도는 한순간에 이루어진 게 아니다. 아마도 그레고르가 성장할 때에도 부모는 비슷한 태도를 보였을 것이고, 그레고르가 성과를 보이지 않았을 때, 그의 부모는 그를 냉담하게 대했을 것이다. 그레고르가 벌레가 되어서도 부모의 눈치를 보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늘 잘해야 한다는 강박적인 생각과 불안정한 애착이 결과적으로 그레고르를 착한 아이로 만들었다.    



  낮은 자존감이 자기희생을 부른다


  그레고르는 변신을 한 후에도 변함없이 가족을 생각했다. 그는 생각했다. 자신이 사라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그는 여동생이 자기를 내쫓아버리겠다는 말을 내뱉기 훨씬 전부터 이런 생각을 지니고 있었다. 그가 죽었을 때, 이미 납작하게 말라있던 걸 보면, 그레고르는 음식을 거부한 채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게 분명하다. 

  가족을 위해 집을 마련해주고 생계를 책임지며 자기를 희생했던 그레고르. 그는 한 순간 벌레로 변했지만 가족의 도움을 요청할 자격은 충분했다. 그게 아니라면 자기를 배신하고 내몰려하는 가족에게 적대적인 모습을 취하거나, 극단적으로 집을 떠나 다른 길을 모색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스스로 좁은 방에서 굶어죽는 길을 선택하다니. 


  그레고르가 스스로 굶어죽기를 선택한 진짜 이유는 뭘까? 무엇이 그를 사지로 몰아넣었나? 그것은 다름 아니라 자기 목숨을 다른 가족보다 무가치하다고 여기는 생각 때문이었다. 죽는 게 서럽지 않다거나, 가족을 위해 나를 희생해야 한다는 생각, 나 같은 건 죽어도 괜찮다는 생각, 이런 생각들이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모두 자존감 낮은 생각들이었다. 이처럼 착한 아이 콤플렉스의 밑바탕에는 낮은 자존감이 존재한다. 겉으로는 남을 돕는 착한 행동만 하기에 자존감이 높다고 여길 수 있지만 그의 내면은 온통 멍투성이다.



착하게 살기보다 개성 있게 살자


  자, 이제 처음으로 되돌아가자. 어째서 그레고르는 벌레로 변신했을까? 낮은 자존감, 부모와의 불완전한 애착, 그리고 그것들이 내면에 착한 아이를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기가 아닌 남을 위해 희생하며 살다가 자기를 잃고 벌레로 변해버렸다. 그렇다면 그가 벌레에서 다시 인간으로 돌아갈 방법은 없을까? 착한 아이 콤플렉스를 벗어날 방법은 없는 것일까? 


  우선 그레고르 자신보다 그레고르의 부모가 해야 할 일이 있다. 무엇보다 그레고르를 그 자체로 인정하고 사랑하는 일이다. 만약 그레고르의 아버지가 좀 더 따뜻한 사람이었더라면 어땠을까? 그레고르를 궁지에 몰고, 사과 따위를 집어던지는 아버지가 아니라, 그의 변신을 진심으로 가엾어 하고 따뜻이 돌봐주는 아버지였다면? 아마 그레고르는 죽음을 선택하지 않고 인간으로 되돌아왔을지 모른다. 이보다 앞서, 그러니까 변신하기 전에 그레고르의 부모가 진작에 그에게 애정과 관심을 기울였다면, 애초에 변신 따위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잊지 말자. 불완전한 애착은 상처받은 내면 아이를 만드는 주범이다. 


  다음으로 그레고르가 해야 할 일이 있다. 그것은 자신의 기준을 회복하여 개성 있게 사는 일이다. 흔히 착한 아이들은 자기 기준을 억눌러놓는 경우가 많다. 자신을 타인에게 맞추다 보니 정작 자기 욕망이나 감정은 무의식 속에 깊숙이 묻어둔다. 하지만 자기 기준을 회복하려면 억압했던 것들을 의식 위로 꺼내어 이를 현실의 자아와 통합해야 한다. 그레고르가 억압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건 외판에 대한 거부감이었다. 그는 외판원으로서 살기 위해 교제도 포기하고 오로지 성과에 쫓기며 일에 파묻혀 지냈다. 자유롭고 넉넉하게 살아가는 것, 가족보다 한 번쯤 자기를 먼저 생각하는 것, 이런 것들을 그는 무의식에 가둬 두었었다. 


  따라서 그레고르가 자기 기준을 회복하려면 고된 외판원 일을 그만두고 자신이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을 찾고, 사람들과의 교제도 즐기며 자유롭고 넉넉하게 살아야 한다. 자기만 가족을 위해 희생해야 한다는 생각, 오히려 이런 생각을 무의식에 가둬 두어야 개성적인 삶을 살 수가 있다. 더 이상 남들의 눈치를 보지 말고 개성을 만들어가야 그레고르는 착한 아이를 벗어나게 될 것이다.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예의범절을 중요하게 여기고 체면을 중시해왔다. 그러다보니 착한 아이를 좋게 여기는 관습이 강하게 존재해왔다. 예의바른 아이, 공손하고 겸손한 아이가 자기의 개성을 나타내는 아이보다 긍정적으로 평가받아온 것이다. 아직도 적지 않은 부모들은 자기 자녀가 착하게 성장하길 바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기억해야 한다. 항상 착한 아이로만 자라다가는 내면이 멍투성이인 착한아이, 다시 말해서 그레고르처럼 끔찍한 한 마리 벌레가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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