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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린 Jan 28. 2023

내 안에 세 가지 다른 얼굴들 1

자아, 초자아, 원초아

주말드라마의 뻔한 클리세 


  주말드라마에서 수십여 년 동안 바뀌지 않는 클리세가 있습니다. 바로 가족이 식사하는 장면입니다. 대체로 중산층 이상의 가족을 소재로 권위적이고 가부장적인 아버지가 중앙에 앉고, 그 옆으로는 자식들과 손자들이 차례로 앉습니다. 요즘처럼 바쁜 일상에서 이런 식사를 즐기는 집들이 몇이나 있을지 모르겠으나 드라마 작가나 피디들은 이런 장면을 큰 고민 없이 사용합니다. 

  그런데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오순도순해야 할 식탁에 갑자기 누군가 예상치 못한 분란을 일으킵니다. 가족으로부터 독립을 하겠다느니, 듣도 보도 못한 사람이나 겹사돈 등 예상치 못한 사람과 결혼하겠다느니, 후계문제나 재산 다툼 같은 일들로 말이지요. 식탁은 갑자기 분위기가 싸해지죠. 누군가는 밥을 먹다 말고 벌떡 일어나 버럭 화를 내고 나가버리기까지 합니다. 대체로 가족 분위기에 융화되지 못한 채 철딱서니 없거나, 자유로운 영혼이거나, 차별받아서 억울한 자식이 그런 경우에 해당할 겁니다. 

  식탁의 정중앙에 앉은 사람은 대개 가부장적인 아버지로 그간의 가족 질서를 만들고 유지해오던 분입니다. 일종의 초자아 역할이죠. 그에 반해 반대편 말석에 앉은 사람은 그동안 자기 욕망을 억눌러 왔다가 터트리는 존재입니다. 갈등은 대체로 이 둘 사이에서 일어납니다. 

  두 사람 사이를 중재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들은 두 사람의 불화를 어떻게든 말리려고 노력하죠. 만약 이들의 영향력이 강력하면 어느새 갈등은 해결되고 즐거운 식사는 계속되지만, 이들의 영향력이 미약하면 가족은 더 갈등으로 치닫게 됩니다.      


초자아, 자아, 원초아의 비율     


  만약 한국의 주말드라마를 프로이트 선생이 봤다면 어떻게 받아들였을까요? 아마도 초자아, 원초아, 자아를 극적으로 잘 표현했다고 박수를 보낼 것입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프로이트는 인간의 정신을 크게 초자아, 자아, 원초아로 구분했습니다. 질서와 도덕 규범을 외치는 초자아, 억눌린 욕망의 대변자 원초아, 둘 사이의 갈등을 조절하는 중재자인 자아까지. 이렇게 세 가지의 서로 다른 인격이 인간의 정신을 이룬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주말드라마의 가족이 한 사람의 정신세계를 비유적으로 표현한다고 가정하면, 식탁 가운데에 앉아 도덕이나 규범을 내세우는 권위적인 가장은 초자아, 권위에 맞서서 자신의 욕망을 쏟아놓고 분란을 일으키는 존재가 원초아, 이 둘 사이를 뜯어말리고 집안 분위기를 애써 지키려는 가족이 자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가족 중 중재자의 노력이 소용없을 때, 가족이 위기를 겪듯이, 정신의 중재자인 자아의 역할이 약하면 인간은 도덕적으로 지나치게 엄격한 초자아가 지배하거나, 거꾸로 개념 없는 철딱서니 같은 원초아에 휘둘려 막살게 되겠죠. 

  이야기의 인물들이든, 현실의 사람들이든 사람들은 초자아, 자아, 원초아의 비율에 따라 성격 유형이 결정되는 것 같습니다. 도덕적인 수준이 높아서 욕망을 절제하는 이들도 있고, 도덕적인 기준을 내팽개치고 그저 자신의 욕망에 따라서 살아가는 이들도 있죠. 후자의 경우는 프로이트에 따르면 그 욕망이 성적이거나 파괴적인 충동에 해당하기에 자칫 사이코패스와 같은 무서운 캐릭터가 나타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둘 사이를 중재하는 자아의 기능이 건강하다면 욕망을 지나치게 억압하지도, 또 그에 휘둘리지 않으면서 자신을 잘 지켜나가는 캐릭터가 형성되겠지요.      


아버지와 아들, 불편한 상징들      


  다시 주말드라마의 식탁을 떠올려봅시다. 가장 중앙에 권위 있게 앉아 있는 사람, 바로 그 집안의 아버지입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기세에 눌려 있다가 더는 참지 못하고 발끈하는 사람은 그 집안의 아들이죠. 아버지와 아들, 왜 이렇게 불편한 걸까요? 

  불편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어제오늘 이야기가 아니라 유구한 역사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스 신화를 떠올려봅시다. 대지의 여신 가이아는 하늘의 신 우라노스와 함께 티탄 12명, 키클롭스 3형제 등을 낳았습니다. 그런데 이때 우라노스는 말썽을 일삼는 자식들을 지하세계인 타르타로스에 가둬버립니다. 이에 격분한 가이아는 아들 크로노스와 함께 복수를 감행합니다. 우라노스가 방심하는 사이 그를 거세시켜 버린 거죠. 

  크로노스라고 예외는 아닙니다. ‘너도 네 자식의 손에 죽게 될 운명’이라는 우라노스의 저주를 들었던 크로노스는 자식이 태어날 때마다 그들을 집어삼켜 버립니다. 프랜시스 고야의 그림 ‘자식을 잡아먹는 크로노스’는 이를 소재로 하고 있죠, 한편 태어난 자식들이 곧장 잡아 먹히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 크로노스의 아내 레아는 막내가 태어나자 돌덩이를 보자기에 싸서 크로노스가 아들 대신 돌덩이를 삼키게 만들지요. 그렇게 목숨을 부지하게 된 신이 바로 제우스입니다. 제우스는 크로노스의 뱃속에 들어 있던 형제들을 모두 구한 뒤, 힘을 합쳐 크로노스를 물리치고 올림포스의 제왕으로 등극합니다. 

  어디 그리스 신화뿐일까요? 아버지와 아들의 불화는 성서에도 종종 등장하고, 심지어 20세기 신화처럼 평가받는 조지 루카스의 스타워즈 시리즈도 그 구조를 들여다보면 아들과 아버지 사이의 결투가 핵심이죠. 신화가 인류의 보편적인 감정을 반영한다고 할 때, 아버지와 아들 사이는 그리 좋아 보이지 않습니다. 아버지는 기존 질서를 지키려 하고, 아들은 이를 벗어나고자 하니 조화를 이루기 쉽지 않습니다. 이런 까닭에 그리스 신화가 주말드라마의 밥상 위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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