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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앨리스 Oct 17. 2021

그저 그런 이야기

2020. 5. 25. 오후 9:56~10:46


‘타성에 젖어’라는 말을 중학교 국어 시간에 처음 들었던 것 같다.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도 모르게 졸졸 흐르는 시냇물을 떠올렸다. ‘젖다’라는 동사에 물을 연상하고 타성의 ‘성’자가 ‘소리 성’을 의미한다고 지레짐작해서 그랬던 것 같다. 한적한 시냇가에서 꾸준한 템포로 시원한 소리를 내며 줄줄 흐르는 시냇물을 상상하며 그렇게 단어를 배웠다. 왠지 모르게 마음에 드는 단어가 될 것 같다는 기분 좋은 생각까지 더해졌다.


단어 하나만으로도 흐뭇해지던 중학생의 나이에서 갑절의 나이로 자라난 나는 더 이상 저 단어를 좋아하지 않는다. 알고 봤더니 타성의 ‘타’ 자는 둥둥 울리는 타악기의 타가 아닌 '게으를 타'였고, ‘성’ 자는 소리 ‘성’도 아닌 ‘성품 성’이어서 실망했던 건 오래전 일이고, 사실은 저 문구가 내 일상을 한 줄로 표현하기 때문이다. 동경할 멋있는 삶의 태도도 아니고 죄책감만 불러일으키는.


오늘 퇴근길에 집 근처 지하철역에서 개찰구를 빠져나왔다. 익숙한 몸짓으로 주머니에서 교통 카드를 꺼내 개찰구에 몸이 맞게 포즈를 취하고 카드를 찍은 뒤 빠져나오다가 섬광처럼 생각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 '참 로봇처럼 사는구나.’ 시간 되면 퇴근하고 퇴근하는 여정에는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일상이, 그런 일상을 영위하는 내가 의식 없는 껍데기처럼 느껴졌다. 나이가 들어가며 변화보다는 안주라는 단어에 더 눈길이 가는 보수적인 나지만, 아니 교통카드 찍는 제스처마저 매일 똑같다면 이런 삶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한때 즐겨보던 미국 드라마 ‘내가 그녀를 만났을 때(How I met Your Mother)’에서 모범생 캐릭터 테드(Ted)가 자신은 루틴(Routine)을 사랑한다고 말했을 때 모험과 청춘을 사랑하는 망나니 캐릭터 바니(Barney)는 ‘너는 루틴(in a routine)이 아니라 틀에 박힌 거야(in a rut-tine)’라며 말장난했다. 술을 마실 때도 집 근처의 바에서만 시간을 보내는 테드가 참 지루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스물 세살의 나는 바니를 꿈꾸며 낄낄 웃었던 것 같은데 어느새 내가 그런 테드가 되고 말았다.


거래처와 문자를 주고받다가 ‘저녁 6시에 마무리되는 일정입니다.’라는 문장 대신에 스마트폰의 텍스트 자동 완성 기능에 빙의해서 의식 없는 손짓으로 ‘저녁 6시’ 뒤에 ‘퇴근합니다.’라고 잘못 타이핑하는 나를, 스물 세 살의 나는 알았을까?


미국 드라마를 보며 낄낄 웃던 스물세 살의 나와 타성에 젖어, 라는 말을 동경하던 열네 살의 내가 2020년 5월 서른의 나를 보면 뭐라고 이야기할까? 그냥저냥의 대기업은 마음먹으면 언제든 취업할 수 있다며 떵떵거리면서 휴학했던 그 스물세 살은 내게 ‘어휴 뭐 저런 흔한 직장인이 돼서 그마저도 제대로 못하고 낑낑대고 있담?’ 이렇게 말할까? 의사, 변호사를 노래하던 열네 살은 옆에서 ‘아이고, 아이고, 인생을 제대로 말아먹었네.’하고 땅을 치며 한탄할 수도 있겠다.


어리고 꿈 많던 과거의 내가 지금의 나를 아무리 비웃어도 자괴감이 들거나 우울한 감정이 밀려들지는 않는다. 오히려 실실 웃음만 나온다. 타성이라는 이름 아래 일상에 침식하고 있는 자신이 무의식중에는 그리 나쁘지 않은 것 같다. 퇴근길에 분주하게 몸을 놀려야 할 만큼 돌아가면 따뜻한 가정의 울타리 안에 내가 사랑하는 부모님이 있고, 매일 마시는 시원한 맥주가 냉동실에서 나를 기다리고, 저녁을 다 먹고 나면 재생하는 노래 몇 곡이 있고, 잠이 들고 눈을 뜨면 나를 필요로 하는 직장이 있다는 사실이 그리 참담한 결과는 아니다. 사실, 안정적이어서 꽤 마음에 든다. 자석의 N극과 S극이 딱 들어맞듯이 나도 이 세상의 중력에 꼭 들어맞는 기분이다.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다.


글을 쓰는 동안에 저 위에서 나를 비웃고 한탄하던 스물 세 살과 열 네 살에게 해줄 말이 떠올랐다. 가서 응수해주고 와야겠다. “뭐, 타성이 시냇물이고 타악기인 줄 알았던 주제에. 나중에 나처럼 되고 싶다고 울지나 마라.”




2021. 10. 17. 오후 11:07~11:31

♪ 21 (acoustic) - Gracie Abrams


예전에 쓴 글을 꺼내 보는 건 즐거운 일이다. 물론 내가 나르시시즘에 빠진 사람일수도 있다. 사실 오늘은 이전 글을 찾아보려고 찾은 건 아니고 글쓰기 모임에 제출할 글이 필요한데 아무래도 요새 마음이 많이 메말라져서 새로운 글을 쓰기는 힘들었기에 회심의 '재활용' 카드를 꺼냈다.


내 PC에는 글쓰기 폴더가 있는데 그 폴더 안에는 브런치에 올리려다가 여러 가지 이유로 올리지 못한 글들이 많다. Behind the Scenes 정도의 글들인데 이 브런치는 한때는 회사 사람들도, 지인들도 보는 페이지라 에디터에 빙의해서 내가 쓴 글을 내가 검열했고, 여러 글들이 잘려 나가 워드에만 보관되어 있다.


다시 읽어보니 그렇다고 잘려나간 글들이 썩 나쁘지는 않았고 읽으면서 새삼 쓸데없는 주제로 얼마나 많이 주절거렸는지 놀랐다. 정말 일상의 사소한 흔적까지도 다 기록했구나, 싶었다. 할 말이 많다는 건 삶에 그만큼 열정이 있다는 건데 진짜 그랬는지도 궁금해졌고.


오늘 재활용으로 올리는 글은 1년 반 전에 쓴 글인데 문장만 조금 손을 봤다. 1년 반 전에 저런 생각을 하고 저런 글을 썼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지냈다. 나는 한 사람이지만, 내 안에는 얼마나 많은 감정이 요동치고 있는 걸까. 틀에 박힌 안정감을 미워하면서도 사랑하는 마음을 갖던 그때의 나에서 지금의 나는 좀 많이 멀어진 것 같다. 이마저도 1년 반 전의 나는 상상 못했겠지.


당분간, 어쩌면  오랫동안 브런치를 못쓸지도 모르겠다. 2020 5월의 나와는 정반대로 마음 한구석에 작은 열정 같은  움텄는데  싹을   키워보려고 한다. 시냇물의 소리를 연상하며 '타성에 젖어'라는 단어를 곱씹는 인생을 냇가의 부단한 움직임 같은 리듬에 내맡겨보기로 했다. 그래도, 영영 브런치를 놓지는 않았으면 좋겠는데. (이래 놓고 얼마 뒤에 브런치 업데이트하면 사람이 많이 우스워지겠다.)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은 내 브런치의 구독자들, 지인들, 얼마나 될지는 모르겠지만 브런치로 내 일상을 염탐할 이들, 우연히 걸려 들어온 이들, 그러니까 누가 됐든 내 글을 읽는 사람들을 떠올리면 뱃속 한가운데에서부터 뭉근하게 따뜻한 기운이 퍼진다. 나 자신에게도, 그들에게도, 일렁이는 이 감정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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