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2 Royal Conservatoire of Scotland : Professional Graduate Diploma in Musical Directing
1. 기초부터 다시
<피아노>
개강을 하고 첫 피아노 레슨을 받는 날이었다. Laura 교수님과 서먹서먹한 인사를 나누었다. 머리를 단발로 자르시고 블루색으로 염색을 하신, 굉장히 스타일리시한 교수님이시다. 한 곡 연주해 달라고 부탁하시기에 자작곡 'Far Away'를 들려드렸다. 영국에 간 후 거의 두 달 동안 피아노를 만져보지 못하고 오랜만에 친 피아노였기에 모든 게 굉장히 어색했고 낯설었다. 연주를 다 들려드리고는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피아노는 언제부터 쳐왔는지, 클래식과 재즈 두 장르에 경험은 어느 정도인지 등등 말이다.
피아노는 한국 나이로 7~8살 때부터 쳐왔던 것 같으며 이곳에 오기 전 한국에서 실용음악을 전공했으며 클래식보다는 재즈가 더 익숙하다고 했다. 그리고는 자연스럽게 고민거리들을 솔직하게 교수님에게 털어놓게 되었는데, 몇 년 전부터 피아노 치는 게 너무 힘들고 연주할 때 온몸이 아프다고. 허리 통증이 심하게 있으며 온 몸이 마비가 되고 굳는 것 같다는 얘기를 교수님에게 했다.
이때부터 1년 동안 교수님은, 내 마음 어딘가에 방치되어 있는 책장에, 내가 그동안 살아오며 담아놓은 여러 책들을 하나둘씩 바닥에 내던지시기 시작했다. 분명 문제가 있는데 무엇 때문에 잘못된 건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도저히 모르겠는 지금 나의 이 상태를 고치기 위해서는, 먼저 내가 가지고 있는 음악적 뿐만 아니라 삶의 고정관념과 습관들을 버리길 원하셨다. '틀리면 안 돼', '실수해서도 안돼'와 같이 스스로에게 주문처럼 외우는 말들에 '아니야, 택근. 실수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 틀려도 괜찮아.'라고 얘기를 해주시곤 했다.
일단 피아노 앞에 앉는 연습부터 시작했다. 그다음에는 '도' 하나 누르는 연습. 피아노에 앉는 자세부터, 손 모양 등등 아주 기초적인 것부터 다시 시작했다. 실제로 굉장한 인내심을 필요로 하는 작업이었다. 해야 할 일들은 많은데 여유롭게 피아노 앞에 앉아서 곡 연습은 안 하고 '도', '레', '미' 하나씩 천천히 연습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런 과정을 겪는 도중에 교수님에게 '이젠 뭔가가 내가 아닌 것 같다'며 얘기를 한 적이 있다. 예전에는 너무나도 쉽게 연주할 수 있던 것들이 지금은 왜 이렇게 어렵고 힘든지 모르겠다고. 나를 한동안 쳐다보시고는 (본인이 도움이 못되어 미안하다는 말도 하셨다.) 바닥에 엉망진창 흩트려놓은 책들을 다시 하나둘씩 버릴 건 버리고 간직할 건 간직하여 책장에 다시 담는 과정이니 미안하지만 조금만 더 버텨보자라는 얘기를 해주셨다. 하지만 스스로에게 조금은 여유를 주라는 얘기 또한 하셨다.
1년 동안 Laura 교수님에게 피아노 레슨을 받으면서 스스로 많이 변한 것을 느낀다. 영국에 있을 때 느꼈던 본인에 대한 한계를 이겨냈다고 과연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레슨 때마다 교수님이 해주신 말씀 덕분에 그 당시 계속 버틸 수 있던 걸 수도 있겠다.
'택근. 넌 여기에 배우러 왔어. 배우고 성장하기 위해서는 네 안에 있는 두려움들을 당당히 마주할 필요가 있어. 실수해도 괜찮고, 틀려도 아무도 너한테 뭐라 할 사람 없어. 그런 것들은 너 자신이 스스로에게 하는 말들이야. 네 마음 어딘가에 '용서' 버튼을 만들고 그런 생각들이 들 때마다 그 용서 버튼을 눌러보렴.'
<지휘>
Andrew Nunn 교수님. 1년 동안 지휘를 가르쳐주신 분이시다. 뮤지컬 쪽 보다는 클래식 합창 지휘가 전문이신 교수님이시기에 클래식 합창 지휘를 배웠다. 한국에 있을 당시 타교양으로 합창지휘를 수강한 적이 있는데, 비교했을 때 지휘 방식이 나라마다 그리고 어느 교육기관에 있느냐 등에 따라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Andrew 교수님은 클래식이 모든 음악 장르의 기본이라는 클래식 부심이 엄청나신 분이시다.
어떨 때는 굉장히 상냥하고 친절하게 칭찬도 하시며 지도해주신다. 그러나 어떨 때는 자존감이 뚝 떨어질 정도로 혹독하게 대하신다. 특히 각자 가지고 있는 Comfort Zone에서 벗어나라는 말을 강조하셨다. 편한 곳에서 편한 것만 하지 말고 더욱 다양한 것들을 시도해보고 지휘로 여러 감정들을 표현해보라는 것이다.
나에게는 더욱 이 Comfort Zone에서 벗어나도록 요구를 많이 하셨다. 유난히 내성적인 성격이기에, 남들에게 무언가를 표현하는 것이 굉장한 일인 나이기에(mbti : INFJ) 우리 인간이란 존재가 소유한 여러 감정들을 지휘로 자유롭게 표현하는 것들이 쉽지 않은 일들이었다.
1년이 지나 끝나갈 무렵 교수님은 나에게 굉장히 자랑스럽다며 본인이 가르쳤던 학생들 중 가장 놀라운 성장을 한 학생이라고 칭찬을 해주셨다. 넌 이미 그 '무언가'를 네 안에 가지고 있으며 앞으로 계속 그것들을 표현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마음껏 표현하라는 말씀에, 감사하다고 한국식으로 고개 숙여 인사하며 마지막 레슨을 마무리했다.
<Rep Session>
매주 한 번씩 뮤지컬 배우 친구들과 Repetoire Session이라고 해서 뮤지컬 곡 하나를 같이 연습하는 시간을 갖는다. 학기 초반에 Ava라는 친구와 rep session을 자주 가졌었는데 당시 코로나 때문에 연습실 안에서 노래를 부르면 안 되는 제한사항이 있었기에 주어진 시간에 대신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Ava는 Ginger색 머리에 해리포터에 나올 법한 긴치마를 좋아하는 어린 친구였다. 스코틀랜드에서 자라고 계속 살아왔으며 영어도 하지만 Gaelic이라는 스코틀랜드어도 한다고 했다. 어렸을 적부터 뮤지컬을 좋아했으며 이곳에 오기 전에 RCS Junior에서 뮤지컬을 했다고도 했다. Ava는 나에게 이곳에 온 것 자체가 굉장히 용감하다고 했다. 새로운 곳에 와서 새로운 것들을 배우는 것이 대단히 용감하다고 하는 그 아이의 말에 당시 따듯한 감동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Loussine라는 프랑스인 친구도 있었다. 본인은 영어를 못한다고 계속 그랬지만 그 프랑스인 특유의 영어 발음이 이렇게나 매력적일 수 있다는 걸 처음 깨달았다. 그 아이도 나와 같이 성격이 조용했으며 밖에 돌아다니기보다는 집안에서 혼자 시간을 보내는 것을 좋아하는 친구였다. 하지만 서로에게만큼은 편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 같다. (나만 편했던 걸 수도 있겠다.)
음악감독으로서 배우들과 rep session을 가질 때에 보컬 코칭을 어느 정도 해야 한다는 것이 조금은 놀라웠다. 나보다 노래를 훨씬 잘 부르는 친구들인데 보컬 코칭을 하라고? 이 부분에 대해서 여러 교수님들과 오랜 시간 얘기를 나눴던 것 같다. 현재 영국 런던에서 음악감독으로 활동하시는 교수님들도 본인들은 노래를 잘 부르지 못하지만 보컬 코칭을 해야 하는 상황이 있다고 한다. Vocal Warm-up 목을 푸는 시간이라던지, 뮤지컬 작품 안에서 배우가 원하는 것이 아닌 캐릭터가 필요한 보컬 톤을 결정하는 데에 있어서 피드백을 해준다던지 다 음악감독이 해야 할 일이기에 본인이 노래를 잘 부르고 못 부르고가 중요하다기보다는 기본적인 발성과 여러 보컬 톤들 그리고 캐릭터가 원하는 색깔들을 잘 이해하고 있으면 된다고 한다. 즉 '감독'으로써 코칭을 해주는 것이지 '가수'로써 코칭을 하는 것이 아니란 말씀 같다.
뮤지컬 곡들이 아닌 대중음악 곡들을 메들리로 편곡해서 공연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나는 과연 무엇을 하면 좋을까 고민을 하다 한국 대중음악을 해보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내가 가장 잘 알고 잘 이해하는 음악들을 해보자라는 생각을 당시에 했던 것 같다.
편곡의 방향과 오케스트레이션은 Stuart Morley 교수님이 지도해주셨다. 너무나도 친근한 교수님이시다. 편곡에 대한 피드백을 매번 새벽에 보내주시곤 했는데, 과연 교수님은 도대체 그럼 언제 주무시는 걸까 궁금했었다.(나중에 실제로 교수님에게 이 질문을 드렸었는데 잠을 안 잔다고 하셨다?!)
노래와 춤은 2학년 친구들이 해주었다. Hannah, Annabelle, Sylvie, Michali, Seb, Hugo 이렇게 6명 그리고 나까지 해서 2~3주 동안 매일 만나 리허설하며 시간 보냈던 것 같다.
내가 당시 서른을 막 출발하는 시기였다면 이 친구들은 20대를 이제 처음 마주한 어린 친구들이었다. 이 친구들을 보며 나도 20대 초반에 과연 이랬을까? 에너지가 넘쳤으며 열정이 있었고 모든 일에 그렇게 열심이었을까 생각을 해봤다.
분명 나이가 들면서 그리고 음악을 해오면서 자연스레 열정이 식고 점점 지쳐갔을 것이다. 20대 중 후반에는 항상 불만이 많았고 '왜 그래야만 하지?'라는 질문을 혼자 늘 해왔으며이런저런 것들에게서 숨고 도망치느라 시간을 낭비해왔던 걸까.
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그 첫사랑을 내가 잊었구나 싶었다. 이들이 노래하며 춤추며 본인들 스스로 즐기는 모습을 보니, 그 열정이 사람을 사람답게 살아있게끔 만들어주는구나 깨달았다.
가장 마음에 들었던 연습실
3. Enjoy
"즐겨!"
Musical Director 학생들을 지도해주신 David Higham 교수님이 우리에게 늘 하시던 말씀이다.
'지금 런던에 있는 훌륭한 음악감독들 중에 너처럼 피아노 잘 치는 사람을 못 봤어 택근. 너는 정말 훌륭한 뮤지션이야. 그 Musicianship을 이제 어떻게 음악감독으로서 잘 활용하는가가 관건이지.
남들이 갖지 못한, 특히 내가 가지고 싶은 침착함과 여유로움이 너에게 있어.(교수님은 전형적인 Scottish다. 영화 브레이브 하트에 나온 멜 깁슨과 그 주변의 인물들을 보면 어떤 의미인지 알겠지.)음악감독으로서 굉장히 필요한 자질이기도 하지. 하지만 에너지를 표현하는 것 또한 음악감독이 해줘야 할 일이야. 너는 조용한 성격이지만 다른 연주자들과 배우들을 support 해주기 위한 적극적이며 긍정적인 에너지 또한 표현할 방법들을 찾아내야 해. 하지만 무엇보다 지금 이 과정들을 네가 즐겼으면 해. 네가 평생 할 일이잖아?'
Performance 강의실 피아노
이 외에 Sound(로직, 메인 스테이지, 큐랩 등등) 수업, Voice(목소리) 수업, Keys Conducting 수업, Notebashing 수업, Keys depping 수업 외 다양한 Workshop(뮤지컬 Wicked)과 프로젝트(Actor Muso <The Baker's Wife>, Cabaret등등)들로 스코틀랜드에서의 1년이 흘렀다.
이리저리 바쁘게 꽉꽉 채운 시간들로 1년을 의미 있게 보낸 것 같지만 정작 중요한 것들 또한 내가 놓치고 있지는 않은가 생각을 해본다.
처음 시작할 때에는 '너는 무엇을 하고 싶니?'라는 질문을 많이 받았다. 초중고 지나고 대학교 다니면서도 스스로에게 많이 한 질문이었지만 대답을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 하고 싶은 게 많아서일까 아니면 정말 하고 싶은 게 뭔지 몰라서일까. 교수님들이 이 질문을 물어보시면 나도 내가 뭘 하고 싶은지 모르겠다며 부끄럽게 웃을 뿐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너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니?'라는 질문을 하기 시작한다. 질문이 바뀌니 뭘 하고 싶은지가 보이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