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직장에 대하여
N포 세대가 늘어나고 그 무리 중 하나인 나는 심심찮게 ㅈ소기업을 비판하는 글들을 볼 때마다 자세히 보지 않으려고 애써 외면해왔다. ㅈ소기업은 미루어 짐작하건대 남자의 성기를 뜻하는 비속어를 붙여 중소기업을 낮추어 말하는 말이리라. 대게 이런 ㅈ소기업의 특징은 사장의 차는 계속해서 바뀌고, 사장 가족들이 임원이나 이사를 맡고 있으며 가'족'같은 분위기의 미래는 보이지 않는 그런 기업이다.
우리 집 ㅈ소기업 한다. 그리고 우리 아빠가 사장이다.
나의 부모님은 강원도 삼척에서 맨손으로 올라와 서울 면목동 사글세에 사시다가 인천 석바위 사거리 단칸방을 얻어 삶을 시작하셨다고 했다. 요즘 말로 기술도 학력도 부모가 물려준 재산마저도 1도 없었기 때문에, 아빠는 당시 인천 숭의동 공단지역에 자전거로 출퇴근을 시작했고, 엄마는 바느질을 하다가 도저히 생활이 안되어 보험을 시작하셨다고 했다. 나의 형이 태어나던 80년대 중반 우리나라 경제는 좋아지기 시작했고 그에 따라 빚을 내 남의 철강공장 옆 빈자리에 지금 우리 아빠 공장의 이름을 걸고 사업을 시작했으니, 자본의 관점에서 볼 때 남의 공장 옆 공터가 곧 나의 근본이기도 하다.
그러다 장사가 잘되기 시작하면서 아빠는 번듯한 내 공장을 갖고 싶단 생각을 하시게 되었는데, 공부는 고사하고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집안 빚을 갚느라 산판 일을 다니셔서일까, 어려서부터 새엄마 손에 배 다른 동생들과 자라오셔서일까, 박정희 대통령 시절, 우리나라가 돈을 빌리려 할 때 담보 대신 보냈던 우리 부모님 세대들을 서독에 보내던 시기에 사우디에 노동하러 다녀오셔서일까.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강한 자만이 살아남던 80~90년대에 거하게 사기를 당하시고 만다.
엄마가 회상하기로는 당시 2천인가 3천만 원을 사기당했는데, 아빠가 기분 좋게 들고 온 계약서에는 갱지와 비슷한 느낌의 종이 위에 손으로 휘갈겨 쓴 글씨가 다였다고 했다. 엄마는 그때 눈앞이 캄캄했다고 했다. 그때부터였을까 아빠는 술 없이 살 수는 없는 사람이 되었는데, 배운 거 없고 능력 없는 사람이 가장 만만한 사람들은 가족이었으리라. 그렇게 아빠는 가족들과 멀어져 가면서까지 저 밑바닥 최하층에 있는 인간으로서의 마지막 자존심만큼은 지키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빠는 외로운 사람이었다. 내 아빠가 못다 흘린 눈물은 우리 엄마 가슴속에서 산다. 그래서 우리 엄마도 외로운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한 모성애 때문일까 조상님이 도와주신 것일까, 탁월한 영업능력과 친절도로 엄마는 전국 보험왕을 몇 번이나 하게 되면서 우리 집 형편이 좋아지기 시작하는데 그러면서 우리 아빠도 아주 번듯한 자기 공장을 두 개나 갖게 된다. 인천 숭의동 어딘가에 있던 첫 번째 우리 아빠 공장은 철강 원자재를 구입해 이를 접고 자르고 모양내 납품하는 일을 했는데, 그때부터 시골에서부터 연이 있던 동네 사람들을 직원으로 채용해 본격적으로 사업을 시작하게 된다.
사실 워낙 촌구석 동네였기 때문에 몇몇은 한 다리 건너면 친척이기도 하다. 97년 IMF 모든 기업들이 줄도산을 해나갈 때, 마침 기계설비에 투자해 공장은 더욱 호황을 맡는데, 인천 기준 초등학생 때 나의 사교육비가 우리 학교 1등이었던 걸 생각하면 나는 복 받은 인간인지도 모르겠다.
전형적인 3D업종인 아빠 공장은 시대가 변할수록 뒤쳐지기 시작했고, 공장에 메꿔야 하는 돈이 있을 때마다 매번 보태주던 엄마도 보증을 잘못 서서 가세가 기울기 시작한다. 또 그 전에는 우리 공장에서 일하던 외가 쪽 친척형이 기계를 다루다가 손을 다치게 되는데 손가락 몇 개가 잘려 산재처리와 함께 갖고 있던 현금 모두를 갚아주게 된다. 그때 외삼촌도 돈 받으러 오시고 집 앞 식당에서 밥을 먹었었는데, 술을 얼마 먹지도 않은 아빠가 그렇게 우는 모습은 나도 그때 처음 본 기억이 난다. 그러면서 그 친척형은 10년도 넘게 더 근무를 하고 우리 회사 기술과 거래처를 다 빼돌린 채 나가서 같은 업체 사장 따님과 결혼해 지금은 아주 잘 산다. 그런 친척들을 우리 아빠 엄마는 아직도 도와주기도 하고 얼굴을 보면서 사는데, 글을 쓰면서 생각해보니 부처님이 계시다면 우리 집에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부자는 망해도 3년은 간다고 내가 군대를 다녀와 유학까지 다녀왔으니 그 말이 일리는 있다고 생각한다. 아니면 내가 돈 대신 아빠 엄마의 영혼을 팔아서 다녀왔던가.
그러고 나서 엄마도 보험은 이제 우리나라에서 끝인 것 같다며 직업을 바꾸셨고, 공장은 공장대로 겨우겨우 직원들 월급 줘가면서 적자만 면하고 있다. 이미 아빠랑 비슷한 시기에 시작했던 다른 사장님들은 공장은 다 임대로 줘버리고 손주 보고 놀러 다니면서 사신다는데, 우리 공장은 초창기부터 시작한, 이제는 다 늙어버린 직원들 그대로 아직도 돌아가고 있으며 아빠 엄마가 제일 먼저 출근을 한다.
아빠는 70이 넘으셨고 엄마도 60대 중반을 향해가는데 아침 5시에 일어나 6시에 집을 나서는 일이 지금까지 평생 반복되어 왔다. 요즘은 기름값이 올라 그것도 차 한 대로 같이 다니신다. 300평 정도 될까? 정확히는 모르겠는데, 어쨌든 공장 청소며 쓰레기 버리는 일까지 거의 아빠 엄마가 하고, 눈이 오면 거래처 화물차들을 위해 아빠는 휴일이고 뭐고 할 것 없이 공장에 나가 쇠로 직접 만든 무거운 넉가래를 들고 눈을 미신다. 우리가 이렇게 직접 만든 무거운 넉가래를 쓰는 지도 지난겨울 아빠를 도와드리면서 처음으로 알았다. 아빠는 일주일에 7일을 공장에 나가시는데, 휴일이라도 나가 거래명세표라도 들여다보고 홀로 시간을 보내다 오신다.
아빠랑 엄마는 벌써 몇 년째 이 얘기를 한다. 이제 직원들도 나이가 들어 힘이 없으니 일도 못하고, 젊은 애들은 이런 일을 안 하려고 하니 공장을 팔던가 그만해야겠다고. 그러면 빚 갚고 남는 돈으로 그렇게 나는 자연인을 동경하는 아빠의 노후 정도는 되지 않겠냐고. 그러나 그런 결정이 쉽지 않은 이유는 평생을 지켜 온 직원들과 그에 딸린 식구들을 생각하는 아빠의 마음 때문이리라.
어디서 선물들이 들어오면 꼭 직원들 다 나누어 주고 큰 기업만큼은 못되어도 매번 월급과 성과급 때문에 우리는 대출을 받지만, 우리 집에 좋지 않은 일이 있었을 때에는 코빼기도 비치지 않는 직원분들이 야속한 나의 마음과는 정 반대인, 이상한 그런 책임감 때문이리라.
그것도 아니라면 1년 365일 중에 365일을 출근하는, 본인이 평생 일궈온 한 가지 일과 그곳에 대한 한 인간의 애착 때문일까.
아빠는 외로운 사람이었다. 자전거에서 공장 화물차로 출퇴근을 하다가, 소나타 골드를 10년 넘게 타다가 내가 초등학생 때 고속도로에서 같이 죽을 뻔 한 뒤로 SM5 초창기 모델을 또 10년 정도 타셨다. 그러다가 차를 좋아하는 나의 형의 허세 때문에 지금으로부터 전전전전 세대 BMW 5 시리즈를 또 계속 타다가 그 차를 형에게 물려주고는, 엄마 차 조수석에 올라 출퇴근을 한지도 또 벌써 몇 년이 되었다.
그런 우리 아빠가 차를 바꿨다. 아니 말하자면 샀다. 일평생 본인이 선택해서 차를 사본적도 없고, 아직도 똑같은 옷을 일주일 내내 입고 똑같은 신발을 헤질 때까지 신는 우리 아빠가 난생처음으로 본인이 직접 계약금을 내고 계약서에 사인을 했다.
얼마 전 어느 일요일 오후 아빠 엄마랑 옆 동네에 칼국수를 먹으러 갔다가, 엄마가 바쁠 때면 내가 내 일 제쳐놓고 아빠를 모시러 왔다 갔다 했기 때문에, 제발 아빠 차 좀 사라고 전시장으로 부득불 모시고 갔었는데 그때 일어난 일이었다. 나는 살면서 아빠가 그렇게 어떤 물건에 대해 관심 있게 지켜보는 걸 처음으로 봤다. 다만 이것도 고민 없이 한 것은 아니었고, 엄마랑 내가 옆에서 설득 설득을 하다가, 마지못해 '직원들 월급도 못 올려줬는데..'라는 말을 끝으로 겨우 계약을 했다.
아빠는 사우디에서 운전을 배웠는데, 그때 말로 제무시, GMC로 운전을 배웠다고 했다. 중년의 로망인 픽업트럭이 역시 우리 아빠에게도 로망이었으리라. 언젠가 정말로 평생을 바쳐온 공장을 그만하게 되는 날이 온다면, 이 우람하고 튼튼한 우리 아빠 차가 아빠를 싣고 산길 임도를 거침없이 달려주기를 바라본다.
사연 없는 집은 없겠다만, 아빠는 특히 평생 일만 해 온 외로운 사람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런 아빠의 술주정 역시도 언제부턴가 이해하기로 했다. 못난 자식들 때문에, 그리고 어찌 됐건 평생을 지켜 준 직원들 때문에 아빠는 아직도 공장이라는 곳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아빠는 종종 철강 분야는 버리는 게 없어서 좋다고 했다. 자전거에서 시작해 지금의 픽업트럭을 타게 될 때까지 평생 철만 만져온 아빠처럼, 단단한 사람이 되어야겠다. 세상 남들이 뭐라고 하든 내 인생 내가 제일로 잘 살아서 꼭, 아빠 엄마한테 효도해야겠다. 빨리 더욱 큰 사람이 되어서 돈도 많이 벌고 예쁜 여자 친구 만나 결혼해 예쁜 손주들도 안겨줘야겠다. 꼭.
누군가 나한테 이루어질 일은 이루어질 테니 조급해하지 말라고 했는데, 아니, 그래서 나는 항상 조급하고 성급하다. 아빠 엄마가 더 늙기 전에 중소기업 그만두고 풍요로운 노후를 보내시게 만들어드리고 싶다.
기필코, 내 인생을 완성시켜줄 내 꿈을 통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대기업을 일궈내고야 말겠다. 우리 아빠 공장의 강철처럼. 유하지만 절대로 부서지지 않는, 그런 단단한 인간이 되어야겠다.
우리 아빠 회사는, 한 인간의 삶 전체가 녹아있는 중소기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