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를 좋아한다. 본격적으로 바다를 다니기 시작한 건 길었던 사업 준비과정 중 나쁜 마음들을 버려야 할 때마다 혼자 바다를 찾곤 했었다. 처음엔 집에서 가까운 서해 바다를 다녔는데, 조석간만의 차와 서해 특유의 바이브가 음산해 그만두고 찾은 곳이 속초였다. 지금은 고성 속초 양양 강릉까지 안 가본 해변과 방파제가 없을 정도지만 처음엔 혼자 속초까지 간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의 첫 속초 여행은 그럴듯한 호텔을 잡아두고, 지금은 속초에 갈 때마다 들르는 동아서점과 문우당 서림에 들렀다가, 사람 제일 많은 속초해변에서 수영을 한 뒤 호텔로 돌아와 제법 괜찮은 룸서비스 메뉴와 와인을 벌컥벌컥 마시면서 뉴스보다 잤다. 다음 날엔 양양에 들러 스쿠버다이빙과 배낚시 체험을 했는데, 다이빙 선생님께 나 정도면 바로 오픈워터라고 칭찬까지 들었다. 그 뒤로 한 달 정도 바닷가에 살면서 본격적으로 다이빙을 하겠다고 마음먹고 픽업트럭까지 샀는데 코로나 몇 년과 일 때문에 시간이 안나 아직 실행은 못하고 있다. 배낚시 체험에서 처음으로 잡아본 동해안 참가자미가 너무 맛있어서 낚시를 시작했는데, 처음엔 머릿속에서 검도랑 낚시랑 회로가 엉켰는지 낚싯대와 릴을 통째로 바다로 던져버려 옆자리 동호회 아저씨들이 꺼내 주기도 하고, 아무것도 모르고 태풍 오던 날 쫄딱 젖어가며 낚싯대를 들고 있기도 했었다. (낚싯대가 피뢰침 역할을 해서 천둥칠 땐 진짜 조심해야 함..;;)
그래도 바다에서 좋은 사람들도 많이 만나고 그중 친한 형이랑은 지금까지도 잘 지내고 있다. 마흔이 넘어 늦장가를 간 승호형은 인제에서 과수원이랑 노래방을 하는데 명절 때마다 사과를 보내준다. 나의 낚시 목표는 동해안 해변에서 잡을 수 있는 끝판왕 감성돔이었는데, 작년 가을 승호형이랑 네네치킨 아저씨랑 삼포해변으로 갔던 출조에서 47cm짜리 감성돔을 잡은 뒤로 흥미가 떨어져 낚싯대는 창고에 넣어두었다. 나는 고기가 잘 잡히는 방파제보다 고기가 안 잡혀도 해변에서 낚시하는 걸 더 좋아하는데, 해변에서 고기도 구워 먹고 불멍과 함께 듣는 파도소리가 너무 좋기 때문이다. 그러다 밤이 되면 어느새 별들이 쏟아지기 시작하는데 괜찮은 카메라를 챙겨간 적이 없는 게 아쉬울 정도다.
양양은 그나마 낙산과 동호리 해변이 좀 조용하고, 속초는 콩새식당과 남경식당이 맛있고 장사항 앞 대게거리가 괜찮다(리얼깽크랩). 대포항에는 라마다와 롯데리조트가 있고 그 옆에 반얀트리 카시아가 공사 중이다. 고성은 르네블루에 꼭 가보고 싶고 예쁘고 조용한 펜션과 갤러리, 카페도 많으며 아야진 또올래식당의 장치 조림이 끝내준다. 해변으로는 자작도, 가진, 송지호, 공현진, 초도까지가 그나마 사람이 적고 수영하기 좋다.
봄의 속초는 척산온천 올라가는 산 길의 벚꽃이 으뜸이고, 늦봄부터 초여름까지는 왕벚꽃나무가 고성까지 곳곳에 피어 너무 예쁘다. 여름엔 역시 바다고, 가을과 겨울에는 단풍이랑 설산 보러 다닌다.
뤽 베송 감독의 영화 그랑블루에서 남자 주인공 자크가 연인 조안나를 뒤로 하고 깊은 바닷속으로 잠수해 떠나는 장면을 좋아한다. 물 밖에 완벽한 반쪽을 찾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완성을 향해 죽음을 무릅쓰고 끝없는 물속으로 나아가는 시퀀스는 인간으로서 자크의 고상한 품격이 완성되는 순간이 아닐까 한다.
생각해보면 참 많은 사람들이랑 바다에 다녔다. 새로 만나게 된 사람들과 친한 친구들부터 전 연인까지, 나는 지금까지 많은 감정과 추억들을 바다에 두고 왔다. 그렇게 나쁜 마음들을 버리려고 혼자 찾았던 나의 바다에는 어느새 많은 사람들과의 기억들이 남아 나를 반겨주고 있다.
벌써 22년도 8월이다. 청승 떨러 바닷가에 다녔던 나는 이제 일 때문에 바닷가에 다닌다. 지금까지 흘려보내 온, 되돌아가라면 아찔한 나의 깊은 물 같은 시간들이 헛되지 않았음을 내게 말없이 지키고 서서 바다는 말해준다.
바다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어떤 감정의 말도 묵묵히 들어주고 시간이 지나 희석된 감정을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말없이 안아주는 여유를 가진 사람이 되면 좋겠다. 옷에 시접이 넓을수록 늘리고 줄일 수 있는 범위가 커지는 것처럼 내 삶과 마음이 다채롭고 유연한 사람이 되어야겠다.
언젠가 바닷가에 별장을 하나 지어야겠다. 그래서 앞으로도 많은 추억들을 바다에 쌓아두고, 바다에 올 때마다 소중한 추억들을 좋아하는 책에 접어둔 페이지처럼 꺼내 읽어야겠다.
바다는 비에 젖지 않는다.
여름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