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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깅토 Oct 15. 2024

화마 속에서 찾은 우물 하나

조커:폴리 아 되(2024)를 보고

2019년은 특별한 해였다.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의 후보 목록을 되돌아보면 이토록 영화에 대한 평단의 평가에 맞먹는 대중의 반향을 이끌어냈던 적이 있었나 싶다. (그래야 한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한해를 휩쓸었던 기생충부터 1917,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 아이리시맨과 작은 아씨들까지. 이듬해 역병과 함께 다가온 극장의 침체를 아는지 모르는지 2019년의 영화는 빛났다.


조커(2019)도 그 별 중 하나였다. 와킨 피닉스의 열연을 집요하게 따라가는 카메라는 악의 잉태를 모니터링한다. 한 아이를 키우기 위해 마을이 하나 필요하듯이 악인이 태어나기 위해서는 무너지는 사회가 하나 필요하다. Nobody에 불과했던 아서 플렉의 손에 총이 쥐어지고 무례한 이가 차례로 찾아온다. 그는 somebody가 될 때까지 총구를 당긴다. 규탄과 추앙의 대상이 된 그는 조커로서 불바다가 된 도시에 우뚝 서고 수많은 현실 세계의 관중도 동요했다.


조커:폴리 아 되(2024)의 놀라운 점은 이토록 많은 이가 화마로 기억할 전작의 엔딩에서 아직 마르지 않은 우물을 하나 찾아내 전혀 다른 새로운 이야기를 창조했다는 점이다. 아서 플렉의 인격은 전소하고 조커라는 가면만 남았던 자리에 영화는 법정 영화라는 장치를 가져와 재심을 청구한다. 재심의 요는 다음과 같다: 아서 플렉과 조커는 동일인이 아니다. 영화는 변호인의 입을 빌려 전작의 결말을 배반하는 거스르는 명제를 역설한다.


대척점에 선 검사는 이중인격은 법망을 빠져나가기 위한 속임수에 불과하다 말하며 아서 플렉이 저지른 죄에 대해 사형을 구형한다. 흥미로운 점은 법원 밖 조커의 추종자 역시 비슷한 입장이라는 것이다. 사형이 육체적 죽음이라면 리 위젤을 위시한 추종자의 믿음 또는 요구에 따라 완전히 조커로 탈바꿈하는 것은 인격적인 죽음을 의미한다. 영화의 후반부에 다다르면 어느 누구도 아서 플렉이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에게 허락된 것은 비열한 살인자로 전락하거나 또는 비인격체로 변모하는 것뿐이다. 편리한 중간은 없다.


안타깝게도 아서 플렉은 둘 중 무엇도 될 수 없다. 비열하게 살기에 그는 너무 외롭고 관계를 갈구한다. 사랑이라 믿고 싶은 리와 가족을 만들고 싶고 유일하게 그에게 잘해줬던 개리에게 상처를 준 것을 못내 후회스럽다. 또한 아서 플렉은 조커라는 혼돈의 화신이 되기에는 너무나도 지리멸렬한 자다. 그가 법정에서 망상하고 변호하는 모습은 전작에서의 코미디 공연을 생각나게 한다. 그 일이 조커를 탄생시킨 특별한 사건이라는 점에서 추종자에게 감흥을 일으킬 수 있겠지만 그가 스스로를 주장할 능력조차 갖추지 못하고 있음을 영화는 여실히 드러낸다.


이 영화가 뮤지컬 영화처럼 춤과 노래로 가득 찬 것은 이러한 불가능성을 보여주기 위한 장치라고 생각한다. 망상과 뒤얽힌 폴리 아 되의 춤과 노래는 의사소통이라기보다는 방언에 가까워 보인다. 방언은 고통받는 자의 언어다. 언어 능력을 벗어난 고통을 겪을 때 방언은 배출구로 기능하지만 동시에 화자는 의사소통 능력을 잃는다. 전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자신이 고통받고 있다는 사실뿐이다. 울부짖음 자체에 추종자가 생길 때 사회는 건설적 대화 대신 광기를 재생산하게 된다.


아서 플렉은 양극단을 횡단하다 사형을 선고받고 추종자에게 살해까지 당하는 이중처벌을 받는다. 최후의 순간 바닥에 쓰러진 그의 모습은 전작에서 광고판을 빼앗기고 구타당한 오프닝의 모습과 겹친다. Nobody로 태어나 nobody로 돌아갔다. Somebody가 되는 것도 잠시였고 허락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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