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극중 지하에서 나온 존재들의 정식 명칭은 the tethered이지만 원문의 어감을 살리기 어려워 ‘그림자 미국인’이라 표현했습니다.
조던 필 감독의 두 번째 작품 어스(2019). 전작 겟 아웃(2017)과 같은 영화를 기대했다면 극장을 나서며 예상과 다른 결과에 실망할지도 모르겠다. 고백컨데 내가 그랬다. 전작이 한 계단씩 쌓아가던 긴장감을 후반부에 폭발시켜 쾌감을 선사했다면 이번 작품은 메인 스토리와 맥락이 닿지 않는 곁가지가 많아 다소 산만하며 반전 또한 주의를 기울였던 관객이라면 진작에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다. 허나 장르적 쾌감보다 감독이 영화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를 곱씹어본다면 이 영화가 전작에 못지않은 날카로운 영화라는것을 알 수 있다. 요컨대 캐치프레이즈인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서 방점은 ‘누구’가 아니라 ‘우리’에 찍혀 있는 것이다. 우리는 누구를 ‘우리’라고 부를 수 있는가? ‘우리’라고 부를 수 없는 그들과 우리의 차이는 무엇인가?
우리는 미국인이다: 보편성과 배타성
어스(2019)는 미국 사회의 은유이자 모든 분열하는 시대의 단면이다. 구분할 수 없이 닮았지만 잊혀진 채 지하에서 살던 이들이 마침내 봉기하고 세상에 존재를 각인시키기 위해 분투한다. 애들레이드의 가족을 습격한 레드의 가족은 가장 먼저 “우리는 미국인이다”라고 선언하는데, 그들이 기형적으로 닮은 삶을 살았다는 점에서 이는 보편성에 관한 선언이다. 11:11, 거울, 반으로 접어 오린 종이 모형과 가위 등 영화가 대칭의 모티프로 형상화하듯이 그들은 닮았다. 똑같은 외모를 가지고 태어나 똑같은 행동을 따라 하며 살았지만 지하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로 태양을 볼 수 없던 소위 그림자 미국인들은 그들의 박탈당한 천부인권을 되찾기 위해 지상으로 올라왔으며 자신의 카운터파트와 동일한 크기의 권리를 주장한다.
하지만 사회적으로 부여할 수 있는 권리의 총량이 유한하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우리는 미국인이다”라는 선언은 동시에 배타적이다. 동일한 권리를 온전히 누리기 위해서는 두 존재는 양립 불가능하며 오직 한 존재만이 ‘미국인’이 될 수 있다. 그렇기에 그림자 미국인들은 직접 가위를 들고 자신의 카운터파트를 살해해야 한다. 또한 그렇게 사라진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손에 손을 잡고 미국을 둘러싸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켜야 한다. 이렇게 ‘우리’라는 이름을 가진 또 다른 집단이 탄생하게 되고, 역설적이게도 이로 인해 그들과 다른 존재들을 ‘우리’라는 이름으로 묶게 만든다. 살육의 밤은 지났지만 진정한 ‘우리’와 ‘우리’의 충돌은 이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가지 못한 길에 대한 아쉬움
영화는 보편성과 배타성을 포함하는 사회 분열의 양상을 묘사하는데 그치지 않는다. 말미에 상영시간 내내 암시되어온 애들레이드와 레드의 뒤바뀐 삶이 확정되는 순간 감독은 새로운 관점을 부여한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지위를 상승시킨 애들레이드는 언어를 배우며 그의 카운터파트에게 기대되던 사회적 역할을 수행한다. 반면에 지하로 추락한 레드는 언어를 잊어가며 형평성을 박탈당한 자신의 삶을 되돌리기 위해 봉기를 준비하게 된다. 그들과 ‘우리’의 차이는 무엇인가? 영화는 개인이 통제할 수 없는 외부 환경으로 말미암아 차이가 발생하고 그곳에서 분열이 시작한다고 말한다.
또한 둘의 관계는 ‘우리’의 범위가 확장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어릴 적 애들레이드가 배운 무용은 그가 지상의 삶에 동화하는데 큰 도움을 주지만 동시에 레드가 지하에서 비범한 존재로 변모하는데도 일조한다. 이는 ‘우리’의 정의를 확장하여 제도권 밖의 이들을 포함하는 것만으로도 긍정적인 변화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들이 파이를 갉아먹는 불쾌한 손님이 아니라 파이 크기를 함께 키울 수 있는 이웃가 될 수 있음을 상기시킨다. 허나 영화에서도 우리 삶 속에서도 그것은 우리가 가지 못한 길이다. 그 길을 갈 수 있었다면 그림자 미국인들이 가위로 목을 밸 필요도 없었을 것이며 어쩌면 애초에 비참한 삶을 살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제라도 우리는 가지 못한 길을 갈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누구인가
미국에서는 어스(2019)가 트럼프 집권과 그 이후 미국의 사회를 다루고 있다는 해석이 인기를 얻고 있으며 공화당을 상징하는 붉은색과 장벽을 연상시키는 인간 띠로 미뤄봤을 때 꽤 타당한 것 같다. 제삼자의 입장에 있는 나로서는 이 문제에 대해 양측의 입장이 이해가 되며 금세 가지 못한 길이 도출될 것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하지만 당사자도 그러한 생각을 할 수 있을 것인가? 대한민국 사회에도 수많은 ‘우리’가 존재한다. 파면된 대통령의 추종자들과 그들이 불편한 시민들의 충돌이 빈번해지고, 난민 수용을 두고 그들을 ‘우리’라고 부를 수 있는지 논쟁이 이어진다. 일자리를 두고 세대 간 갈등이 발생하고, 성 대결은 전례 없이 깊어져 혐오가 만연하다. 존속하고자 하는 사회는 이제 가지 못한 길을 가야만 한다. 적어도 같이 살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 길의 처음에 서있는 우리는 자문해야 한다. 우리는 누구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