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마드 프로덕트 디자이너
우리 가족(집순이 동생 제외)은 가만히 있는 것을 못 견디는 지독한 역마살러들이다. 매주 주말마다 단거리든 장거리든 일단 나갔다. 목적이 없어도 일단 집을 나서는 게 Step 1이다. 일단 나가고 보자! 그러고서 밖에 나와 어딘가를 가는 과정, 가서 무언가를 보고 먹고 경험하는 과정을 나누고 함께 하는 것이 우리 가족의 일상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게 모든 가족의 디폴트라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친구들을 통해 그렇지 않은 모습의 가족도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의 충격이란)
20년 가까이를 이렇게 살았으니 부모님으로부터 독립해 서울에 살게 된 이후에도 이런 삶의 형태는 자연스레 이어졌다. 다만 이 성향은 업무 환경에서는 철저히 배제되었다. 일단 회사라는 물리적인 공간이 있기도 하고, 집=자는 곳, 회사=일하는 곳으로 머리에 이미 구분되어 저장했기 때문이다. 코시국 이전만 해도 '노마드'의 삶은 영화나 드라마에서만 보는 먼 미래의 환상 속 모습 같은 느낌..? 그래서 아빠랑 내가 제일 부러워한 사람은 세계 테마 기행 카메라 감독이었다. 그 이유는 여행도 다니고, 영상도 기록하면서 돈도 벌 수 있으니까! 세상에서 제일 부러운 사람! 그래서 나도 기필코 언젠간 경제적 자유를 누리며 노마드의 삶을 살겠다 막연히 생각만 하곤 했다.
그러다 올해 초 현 회사로 이직하고 전면 원격 근무 환경에 놓이게 되자, 비로소 내가 꿈꾸던 노마드의 삶을 어느 정도 실천에 옮길 수 있게 되었다. 약 5개월 동안 회사, 카페, 공유 오피스, 집, 야외 등 다양한 환경에서 다양한 근무 시간대를 적용해보면서 나에게 맞는 업무 환경을 찾아 시행착오를 거쳤다. (아직도 진행 중)
지금까지 약 5개월 동안 시행착오를 거친 결과 "나한테 맞는 환경은 딱 이거다!" 싶은 정답이 나오진 않았다. 사실 정답을 내릴 수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접할 수 있는 모든 환경을 다 접하지도 않았을뿐더러, 정답이든 오답이든 내가 처한 상황에 따라 언제든 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해서 아예 소득이 없었느냐, 그건 아니다. 그래도 어느 정도 소득은 있었다. 직장인으로서의 나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 수 있었고, 새로운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직장인으로서의 나는 '어느 장소든 간에 여러 번 반복되면 질린다', '적당한 소음과 활기를 띄는 공간을 선호한다', '새로운 자극이 업무를 수행하는 엄청난 동력이 된다', '새로운 자극은 음악, 채광, 인테리어, 향, 주변 사람 등 외부 환경에서 비롯된다'이다.
제주도로 첫 워케이션을 가게 된 계기는 부모님으로부터 시작됐다. 갑자기 심심하다고 1박 2일로 짧게 제주에 다녀온다길래 나도 마침 심심하던 차에 잘 됐다 싶었다. 그럼 기왕 간 김에 나는 좀 더 있다가 오지 뭐 싶은 마음이었다. 어차피 서울에서도 돌아다니면서 일하는 것도 슬슬 질리고. 제주에서 자유롭게 돌아다니려면 차도 렌트해야 하고, 숙소도 묵고 싶은 곳으로 잡아보다 보니 비용이 꽤 돼서 일단 1주일 정도만 잡아봤다.
아, 그리고 무엇보다 제주 디앤디파트먼트에서 묵어보고 싶은 마음이 컸다. 1인 숙박 비용에 16만원(+회원권 5만원)은 좀 너무했지만.. 솔직히 이 돈이면 호텔에서 묵는 게 더 나은 거 아닌가 싶긴 하면서도, 새로운 경험에 의의를 두며 예약했었다. 결과적으론 정말 좋았지만!
그간 봐온 여타 미디어에서 그려지는 워케이션은 퇴근 후 여러 액티비티를 즐기는 모습(?)을 많이 접했는데, 그래서 나도 뭔가 게스트하우스나 코워킹스페이스에서 진행하는 프로그램을 살펴보면서 한번 도전해보자 싶어 계획은 해,, 뒀..었다. 출근 전 아침 요가, 퇴근 후 서핑, 수영, 등산 등......? 그러나 평소 하지 않던 운전을 하느라 긴장을 한 탓인지, 하루에 두 군데 이상 일하기 좋은 카페를 돌아다녀서인지 퇴근 시간쯤 되니 그저 고되고 아무 생각 없이 가만히 쉬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했음........ㅎ...
그래서 결국 5일의 워케이션 기간 동안 나는 업무 외 시간에 무엇을 했느냐면, 서해에서 나고 자라 뿌옇고 불투명한 갯벌 바다가 익숙한 나는 제주의 투명하고 푸른 바다를 너무너무너무 좋아하기 때문에 바다와 인접한 활동을 많이 했다.
아침에 출근하기 전 바닷길 가볍게 런닝이나 산책하기, 퇴근 후엔 바다나 오름 근처 예쁜 길 드라이브하기, 노을 바다 구경하기, 동네 산책하면서 고양이 구경하기, 게스트하우스 사장님이랑 스몰 톡하기, 자기 전 숙소에 있는 책 읽기, 그리고 제주에 사는 대학 동기를 만나 같이 저녁 먹고 오래간만에 근황 토크하며 시간 보내기를 했다.
디앤디파트먼트는 이태원에서 카페랑 소품샵으로 처음 알게 되었는데, 이후 매거진 B나 롱블랙 노트로 좀 더 상세한 브랜드 히스토리를 접했다. 정말 좋은 목적을 지닌 곳인 것 같아 개인적으로 참 좋아하는 브랜드다.
해당 지역의 특화된 오브젝트를 큐레이션하고 판매하는 것도 참 좋지만, 오롯이 개인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배려 가득한 소품과 인테리어가 참 인상 깊었다. 객실 내 테이블도 있지만 공용 라운지도 정말 잘 꾸며놔서 업무 환경으로서도 손색이 없다. 아침에 1층 카페에서 조식을 먹을 수 있는데 그날의 참 좋았던 따스한 햇볕과 고요한 실내 분위기가 아직도 생생하다.
회원권도 끊었으니(숙박하려면 필수로 해야 함 매우 영악함) 만료되기 전에 꼭 다시 가야겠다. 다음번엔 2박 이상 묵으면서 내부 시설도 충분히 이용하고 일정상 방문하지 못해 아쉬웠던 아라리오 뮤지엄도 꼭 방문해야겠다. 결국 재방문하게 만드는 상술에 제대로 걸려버렸지만 그래도 좋으니 봐준다.
첫 워케이션을 경험하며 느낀 바는 '근무 가능한 시설을 갖춘 숙소에 묵자', '카페 말고 코워킹스페이스를 이용해보자', '워케이션이니 꼭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부담을 내려놓자', '혼자 있는 시간을 더 늘려보자'였다.
카페는 아무래도 오랜 시간 머무르기가 불편하기도 하고 바람직하지 않은 것 같아, 2-3시간 정도 있다가 옮겨 다니고 하다 보니 하루에 2-3곳을 다녔다. 그렇다 보니 매번 근무에 적합한 카페를 찾는 것 + 주변 식사할 곳 + 이동 동선 계획을 하는 것에 에너지가 생각보다 많이 소모됐다. 그래서 다음번에 또 워케이션을 가게 된다면 그땐 꼭 코워킹 스페이스를 이용해보자 다짐했다.
워케이션이라고 해서 꼭 무언가를 해야만 한다는 부담이 되려 나 자신을 부자연스럽게 만들고 무리하게 만드는 것 같다. 정답은 없으니 그냥 저마다 각자 맞는 것, 하고 싶은 것을 하자.
나는 운전하며 좋아하는 음악을 한껏 틀어놓고 좋아하는 풍경을 감상하며 자유로이 가고 싶은 곳을 향해 가는 그 시간이, 퇴근 후 방 안에 편히 앉아 좋아하는 음악을 틀어놓고 따뜻한 차를 마시며 읽고 싶은 책을 읽고 감상을 일기로 쓴 그 시간이 참 좋았다. 정말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서울에 있을 때에도 동생과 함께 지내다 보니 막상 온전히 혼자인 시간이 생각보다 많이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제주에 와서 오롯이 혼자 있는 경험이 생각보다 너무 좋았다. 마치 혼자 있는 동안엔 내가 공간과 시간을 마음대로 지배하는 느낌. (표현이 중2병스러운데 아무튼 그러함)
평소 일기 쓰는 습관을 자주 못 지켰는데, 이런 환경 속에서 있었던 덕인지 제주에 와서는 1일 1일기를 잘 지켰다. 역시 마음가짐도 중요하지만 환경도 정말 중요하구나 새삼 느꼈다. 일기를 쓰면서 나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마주하는 경험을 하고, 이전보다 더 나에 대해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었다. 무척 값진 시간이었다. 정말 잘했어 그때의 나야. 토닥토닥.
그 이후 약 3개월 뒤 10월 중순에 제주에 한번 더 다녀왔다. 이번엔 제주도에 사는 언니가 캠크닉하러 오라고 초대해줘서 다른 대학 동기와 함께 놀고, 나머지 기간 동안 혼자 남아 워케이션을 하고 왔다. 저번 워케이션 때 아쉬웠던 부분, 다음번에도 해야지 했던 부분을 실천해 봤다. 첫날은 오전 반차를 냈어서 카페에서 바다를 보면서 근무했고 이후 3일은 코워킹스페이스로 제주에서 제일 유명한 '오피스 제주'를 이용했다.
코워킹스페이스에 방문해보고 다른 이들이 워케이션에서 왜 근무 환경을 꼼꼼히 검토하는지 여실히 느꼈다. 간간히 카페에 가서 리프레시하는 것도 좋지만 역시 근무에 최적화된 공간에서 주는 안정감과 편리함은 무시할 수 없는 큰 가치다. 평소에도 자주 카페에서 근무하는 터라 책상이나 의자, 보조 모니터 등 장비나 환경 등에 크게 구애받지 않는 편인데 아무래도 남들과 함께 해야 하는 미팅은 제약사항이 좀 있다. 주변 소음이 많은 곳은 아무래도 미팅하기에 적합하지 않다 보니 가끔 차에서 미팅을 한 적도 있는데, 회의실이 마련되어 있다는 점은 더할 나위 없이 큰 장점이었다. 이것만 놓고 봐도 이용할 만한 가치가 충분하다!
그리고 상시 이용할 수 있는 커피머신과 여러 종류의 티백 그리고 정수기가 있다는 것이 평소 마실 것을 많이 마시는 편인 내게 있어 가장 좋았던 점이다. 그밖에도 자리에 짐을 두고 밖에 나가 밥을 먹고 오거나 볼일을 보고 올 수 있다는 것 또한 좋았다. 아무래도 카페에서 근무하다 보면 식사를 간단하게 빵이나 디저트류로 때우곤 했어서 느끼한 속을 완화시켜주기 위해 퇴근 후엔 꼭 한식이나 국밥을 먹었었다....ㅎ
이번에도 혼자 산책도 하고, 평소 미뤄왔던 독서나 글 쓰기, 영화보기 등을 하며 충전하는 시간을 보냈다. 아, 무엇보다 혼자 있으면서 아무 말도 안 하는 것이 가장 큰 충전이었다. 평소 사람들과 만나는 것을 좋아하는데 좋아하는 것과는 별개로 어쨌든 누군가와 함께 있다 보면 자꾸 말을 해야 하고 상대의 상태를 신경써야 하다보니 에너지가 소모된다. 요근래 이런 것에서 힘든 게 쫌쫌따리 쌓였었나 보다. 그냥 아무 말도 안 하고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것 자체가 너무 좋았다. 가끔 좀 적적하면 친구나 부모님이랑 전화하는 정도?
인스타그램에 스토리를 올릴 때마다 다들 하나같이 하는 말이 '네 표정만 봐도 행복한 게 보여'였다. 역시 마음은 겉으로 드러나기 마련인가 보다. 이번 워케이션은 확실히 카페에 돌아다니느라 시간이나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아서 그런지 업무 시간에 훨씬 더 집중하고 전념할 수 있었다. 간간히 바다도 보고, 가끔 일에 집중이 안 될 때면 나가 산책하고. 내가 원하는 곳에서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형태로 근무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 이번 워케이션을 통해 새삼 느꼈다. 이런 게 주체적인 삶 아닐까? 나는 앞으로도 쭉 이렇게 살고 싶다. 다양한 근무 형태를 경험하면서 더 많은 인사이트를 얻고 싶다. 이런 삶을 누리기 이전으로는 되돌아가기 어려울 것 같다. 이미 너무 좋은 것을 누려버렸어!
지금 존 메이어 노래를 들으면서 이 글을 작성하고 있는데 뭔가 영화 마지막 장면 같은 느낌이 든다. 주인공의 성장기를 다룬 영화의 끝 부분 같은 느낌..... 뭔가 엄청나게 감동적인 결론을 적어야 할 것만 가턴 그런 너낌 .... 후후 .... ... ..
아무튼 그래서 이번 워케이션도 참 좋았고, 다음 워케이션은 좀 더 먼 곳으로 장기간 떠나려 한다. 아직 구체적인 계획은 없으나 아마 일본이나 베트남? 태국? 아니면 인도네시아? 모르겠다.
사실 지금 당장도 가려면 얼마든지 갈 순 있지만 주저하게 되는 부분이 있다. 다음 워케이션은 마냥 경험만 쌓는 것뿐만 아니라 콘텐츠 생산과 같은 아웃풋까지 고려하고 준비한 뒤에 떠나고 싶다. 그냥 가서 좋은 기분과 경험에 돈만 쓰고 오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장기적으로 내게 수익이 되는 방향을 고려한 투자가 되었으면 한다. 여기서부터 시작되어야 미래에 직장인이 아닌 직업인으로서의 삶, 진정한 노마드의 삶을 이룰 수 있을 것 같다. 아무런 생각 없이 떠나는 휴가가 아니기도 하고, 내 성격상 무언가를 하면 생산적인 측면을 항상 고려하는지라 그렇다. 부디 다음 워케이션 관련 글을 작성하게 되면 이전 워케이션 경험과는 사뭇 다른 내용이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미래의 나야 부디 그래 주길 바라!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