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을 잘하는 디자이너의 기준은 무엇일까
나는 일상 중 종종 '나 혹시 치매 초기..?' 싶은 순간들이 있다. 평소에도 주변 사람들의 얼굴이나 이름을 곧잘 까먹는터라 난감했던 일이 많았는데, 이보다 더 심각한 건 가장 가까운 이들의 존재를 너무 당연하게 여겨서인지 이들의 존재에 대한 히스토리를 잊을 때가 있다. 가장 가까운 예로는 남자친구와 같이 있을 때 갑자기 머릿속이 '텅' 빈 것과 같은 상황이 오는 것이다. 그럴 때면 나는 얼른 혼자 머릿속으로 '지금 내 옆에 있는 이 사람은 누구지? 왜 내 옆에 있지?'부터 시작해 '아, 이 사람은 내 남자친구고 우린 지금 주말이라 바람 쐬러 공원에 나와 산책 중이었지.' 하고 그와의 히스토리를 끄집어내 다시 한번 복기하고 입력해 둔다. 이는 비단 사람에 대한 것뿐만 아니라, 내가 처한 상황 또는 주변 환경에 대한 것에서도 발생한다. 이를테면 '내가 지금 왜 여기(회사)에 있지?, 내가 어쩌다 여기서 일하게 됐더라?, 근데 내가 무슨 일을 왜 하게 됐더라?'와 같은 생각이다.
이런 상황이 발생할 때마다 나는 의외로 낙관적인 사람인지라 금세 이렇게 생각하곤 한다. 요즘 흔히 말하는 원영적 사고처럼 '규칙적으로 되새기면서 초심을 되뇌거나, 존재의 소중함을 생각하고 깨닫기도 하니까 나쁘지만은 않은 걸!' 그런 나를 걱정스레 바라보는 주변이들의 눈길은 물론 마음에 걸리지만..
'일을 잘하는 디자이너란 무엇일까?' 평소에는 휘몰아치는 프로덕트 배포 사이클의 한가운데에서 정신없이 사느라 잊고 살다가, 무사히 QA를 마치고 시원섭섭하게 프로덕트를 배포하고 나면 다시금 머릿속 한편에서 스멀스멀 생각이 떠오른다. 그렇게 조금 고민하다가 또다시 사이클이 시작되면 일에 몰두하느라 금세 또 잊어버린다. 인사이드아웃처럼 내 머릿속 불안이가 일을 하는데 방해되니 치워버리는 게 아닐까 싶다.
일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에는 'GUI 디자인을 예쁘게 잘 정돈하여 만들어내는 사람'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dribbble이나 Behance를 자주 들락날락 거리며 그래픽 디자인 실력을 키우려 노력했다. 그러나 세상엔 너무나도 뛰어난 디자이너들이 많았다. 심지어는 After Effect까지 잘 다루는 디자이너들도 있었다. 뭔가 내가 세운 이 기준이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기준대로면 내가 잘하는 것도 아닐뿐더러, 최고가 되려는 노력조차 하기 어려웠다. 나는 저들만큼 개성 넘치는 예술성도 없고, 디테일에 약하고, 장인 정신도 없는 꼼꼼하지 못한 덜렁이였다.
이후 회사에서 홍수처럼 쏟아지는 다양하고 많은 업무를 수행하면서 내가 세웠던 이전 기준은 금세 바뀌었다. '개발 지식을 지닌 사람, 기획을 잘하는 사람, 데이터 로그를 심고 해석할 수 있는 사람, 글을 잘 써서 UX Writing도 쉽게 잘 쓰는 사람, 말재주가 좋아 다른 이들을 잘 설득하는 사람' 등. 막상 일을 해보니 회사가 기대하는 바도 그렇고, 내가 스스로 느끼기에도 프로덕트 디자이너는 단순 예쁜 GUI 그리고 사용성 좋은 UXUI를 만들어내는 능력만으로는 설명하기 부족한 직업이란 생각이 들었다.
사용자가 마주하는 화면을 만들기 때문에 예쁜 GUI 그리고 쉽고 편리한 사용성을 디자인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나는 그보다 더 상위의 것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서비스인가?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는가?'에 대한 것을 기민하게 발견하고 논리를 만들어내는 역량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예쁘고 사용성이 좋아봤자, 쓸모가 없으면 버려지고 외면받는다. 프로덕트 디자인은 예술이 아니다.
최근 서핏에서 '디자인 조직 그리고 디자이너의 성장'과 관련된 글을 읽었다. 그 글을 읽고 나서 주변에 '일을 잘하는 디자이너란 무엇이라 생각하세요?' 의견을 묻고 다녔다. 여러 의견이 있었지만, 그중 인상 깊었던 것은 "손이 많이 안 가는 디자이너가 일을 잘하는 디자이너라고 생각해요."라는 의견이었다. 즉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상급자의 도움 없이 100% 수행해 내는 사람, 리더나 동료들로 하여금 일을 맡길 때 불안감이 들지 않도록 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물론 업무를 하면서 도움은 충분히 받을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도움이 필요할 때는 언제든 주변에 도움을 요청하고 받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회사는 나를 가르쳐주고 이끌어주고 보듬어주는 학교가 아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모두 '프로'가 되어 일을 해야 한다. 본인의 업무 수행 능력 수준을 인지하고 있어야 하고, 이를 바탕으로 업무를 할당받아 주어진 바를 충실히 해내야 한다. 즉 메타인지가 되어야 한다. 내가 디자이너라고 해서 단순히 '디자인 업무만 잘하면 돼'가 아니라, 회사 그리고 팀 또는 조직의 목적 그리고 눈앞에 주어진 목표를 위해 각자 자신의 도구를 들고 열심히 무언가를 만들어야 한다.
만약 집을 만드는 팀이 구성됐고, 각자 1개의 기둥을 1주일 동안 만든다는 목표가 세워졌을 때, '난 내 기둥만 잘 만들면 돼' 하는 생각으로 다른 팀원들과 일절 소통하지 않거나 제대로 된 소통을 하지 않으면, 일정 내 기둥을 못 만든 팀원이 발생할 수도 있고, 엉뚱한 두께나 길이 또는 모양의 기둥을 만든 팀원이 발생할 수도 있다. 결국 지붕을 올리지 못해 실패하거나, 이상한 지붕을 올려 비가 새거나 바람이 드는 엉성한 집을 만들게 된다. 이처럼 회사는 지속적으로 타인과 함께 공동의 목적 그리고 목표를 공유하고 소통하며 협동심을 발휘하는 인력을 필요로 한다. 이는 직급 또는 직무에 국한되지 않아야 한다.
그래서 최근 '일을 잘하는 디자이너란 무엇일까?'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답은 이렇게 정했다. '일을 되게끔 하는 사람' 근데 이제 그 일을 되게끔 하는 데 사용하는 도구가 디자인인 사람말이다. 물론 여기에 '개발 이해도도 높고, 데이터도 볼 줄 알고, 글도 잘 쓰고, 말 재주도 좋고, 예쁜 디자인도 잘 만들어내는 능력'이 결국 '일을 되게끔 하는 사람'이 되도록 도와주는 밑거름이 되는 듯하다. 소프트 스킬과 하드 스킬을 적절히 잘 분배해 길러내자.
일반적인 IT 프로덕트 디자이너는 결코 혼자 살아남을 수 없다. 개발이 되어야 프로덕트가 존재할 수 있고, 비즈니스 기획 그리고 마케팅 그리고 운영 인력이 함께 있어야 프로덕트가 만들어지고 돌아간다. 모두가 상호 보완적인 관계인 것이다. 그러니 디자인만 깊이 디깅하지 말고, 주변 동료들에게 관심을 갖고 그들을 이해하며 상호 신뢰를 쌓고,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에도 노력하고 경험치를 기르자.